[비포 아이 고]

내가 만약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다면?
가장 먼저 눈에 밟힐 사람은 아이들이다.
이제 한창 자신의 꿈을 키워가며
조잘조잘 떠들어대기도 하고 장난도 치며 시도 때도 없이 까르르 웃어대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무진장 기대되는
아이들의 커가는 모습을 얼마 보지 못하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 가장 아쉬울 터이다.
남편은 아마 그 뒤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인 데이지는 아직 젊고, 신혼이고, 아이가 없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일은 없었다.
좀 더 자기 자신을 우선시하는, 말하자면 이기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인 것이다.
그런 그녀가, 3개월 혹은 6개월의 이른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첫 번째 유방암은 그럭저럭 넘기고 주기적으로 검사도 받았지만, 젊은 육체에 깃든 암이라는 놈은
가혹할 정도로 재빠르게 그녀의 몸 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남아
온몸에 전이를 일으켰고 심지어 뇌에도 들어가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데이지는 텔레마케터로 일하다가 마음 속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심리학 학위 과정에서 논문만을 남겨 놓고 있는 상태이고 그녀의 남편 잭은 역시
수의학 학위와 동시에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전도 유망한 사람이다.
잭은 ,유방암에서 회복된 이후 데이지가 심혈을 기울여 챙겨먹는 유기농 케일을 집에서 기르는 기니피그에게 양보해서 안 그래도 뭔가를 꾹 참고
있는 데이지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하는, 드물게 무감각한 남자이긴 하지만
데이지가 무한정 애정을 표하는 남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갑작스런 암 재발 선고를 받고 그녀가 가장 먼저 그녀 사후의 일을 걱정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남편 잭인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암세포가 정상적인 데이지의 상식을 좀먹어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녀의 오지랖은 좀 펼칠 자리를 잘못 선택한 것만 같다.
혼자 남게 될 남편 잭을 위해 아내를 찾아주겠다는 데이지.
<엽기적인 그녀>에서 견우가 떠나가는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부탁하는 심정이 그러했을까.
잭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고 자신만큼, 아니 자신 이상으로 잭과 대화가 통하는 여자를 고르고 고르던 데이지 앞에 마침내 파멜라가 나타났을
때.
데이지의 반응은, 나의 상상을 뒤엎었다.
조용히 응원해주고 잭과 파멜라가 맺어지기는 것을 두손 두발 다 걷어붙이고 도와주러 나설 줄 알았는데...
자신이 수술하는 동안 남편이 곁에 있어주길 바라면서도, 곧 세상에서 사라질 자신 때문에 잭의 커리어가 완성되지 못할 것을 견딜 수
없어
"필요 없다,"며 딱 잘라 말하는 것으로 잭에게 상처를 입혀버린다.
어쩌면 서로간에 가장 이해와 공감이 오고 가야 할 때에,
독립적이고 이기적인 그 심성이 툭 튀어나와 관계를 해치고야 마는 것인지.
엇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라지만
평생 싸우고 화해하면서 신뢰를 쌓아갈 시간이 남아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야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겨우 몇 달 뒤면 볼 수 없는 서로가 남아 있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고 자신들의 길을 고집하는 장면에서는 가만히 앉아 관조하는
입장인데도, 내 마음이 확확 달아올랐다.
죽음을 앞둔 데이지가 너무나도 이상적인 방향으로 남편의 아내를 찾아줄 리 없다.
암에 걸려 보지도 않은 내가 로맨스와 현실을 착각해서 해피엔딩을 꿈꾼 게 잘못이다.
현실은 그저 현실일 뿐.
아직 사랑할 시간이 많이 남은 젊은 이들의 안타까운 사랑에 눈멀어 제 2의 아내를 기도했다면, 나는 대책없는 낭만파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로서의 데이지와 그것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잭이 있을 뿐이다.
눈물바람으로 책을 덮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끝낼 수 있었다.
인생은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지만, 그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적절한 균형을 맞추어 가는 것이 현명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임을...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