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정령처럼 아름다운 곁말, 벚꽃박죽 [벚꽃, 다시 벚꽃]
여럿이 마구 섞여 엉망이 된 상태를 일컬어 뒤죽박죽이라 한다.
미미 여사의 신간 [사쿠라 호사라]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벚꽃박죽" 정도 된다.
우리말 제목은 [벚꽃, 다시 벚꽃]으로 좀 더 운치있께 지어졌지만 원문 그대로의 뜻은 벚꽃박죽이다.
처음 이 단어를 봤을 때, 호박 대신 벚꽃을 넣어 쑨 죽 이름인가? 했다.
먹는 걸 좋아하는 내 습성이 이럴 때 유달리 빨리 나서준다^^
식도락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는 미미여사가 신간에서 새로운 메뉴를 소개하려나 보다~ 하고, 나 혼자 김칫국을 여러 사발 마셨을 즈음.
벚꽃박죽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벚꽃과 뒤죽박죽의 "박죽"이 합쳐진 말이란 것을.
자~ 그렇다면, 이 책의 내용이 한바탕 어우러져 뒤죽박죽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것이렷다!!
에도 시대물이니만큼 순박한 시골 무사 하나쯤은 나와 주어야 미미 여사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인 사건의 구성이나 분위기는 무시무시하여도 주인공 정도 되는 이의 심성 하나만은 언제나 올곧은 인물을 창조해내는 것이 정석인
만큼...
주인공을 찾아내서 재빨리 그의 성정을 확인해 봐야 안심하고 뒷 얘기를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루하시 쇼노스케.
인정이 많고 심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쇼노스케의 아버지는 뇌물을 받았다는 누명을 쓰고 할복자살을 했다. 아버지의 친필과 필적이 같은 증거 문서가 나왔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건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쇼노스케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숨은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35
쇼노스케는 어머니 사토에의 부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인 도가네 번 에도 대행 사카자키 시게히데에게 맡겨진다. 후루하시 가의 재건을 청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목을 들기는 했지만 한통속으로 보이는 어머니와 형은 아버지의 오명을 벗기는 것과는 별개의 일을 꾸미는 것만 같았다.
뒤죽박죽인 마음을 가지고 에도로 올라온 쇼노스케는 일단, 에도 대행이 손써 준 덕분에 무라타야 지헤에의 가게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무라타야의 책방에서 필사 일을 하며 낚시를 드리워 놓는 것이었다.
아무런 수확 없이 입체 그림도 만들어 보고 지헤에로부터 소설에 가필하여 달라는 부탁도 받는 등의 나날을 보내던 중.
벚꽃 정령과도 같은 아가씨 '와카'를 만나 마음이 움직이고 만다.
검은 단발머리에 검은 눈, 갓 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한 벚꽃처럼 붉은 기가 살짝 도는 하얀 뺨.
쇼노스케의 일상에 살랑 봄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후루하시 쇼노스케'라는 동명이인을 찾는 이와 만나 암호 풀이에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미카와야의 상속녀 기치의 가출 사건에 휘말리기도 한다.
안타까운 과거 때문에 죽도로 할복한 사람의 시신을 수습해 주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쇼노스케는 점점 단단해 졌을 게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무사 출신 치고는 검술 실력이 영 형편없는 것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쇼노스케의 인간 됨됨이는 더더욱 진국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얼굴의 붉은 멍조차도 이제는 신경쓰지 않게 될 정도로 '와카'는 기지가 뛰어나고 총명함이 반짝이는 규수라 쇼노스케와 와카 둘 사이의
간질간질함이 내내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점점 커져간다.
가족이 소중하지만 가족만이 만능의 묘약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겠다던 미미여사의 장담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에도로 올라온 얼뜨기
무사는 이제 눈을 뜨게 되었다.
끝까지 아버지의 무고를 밝히기 위해 끈질기게 파헤치던 그 사람, 아버지의 필적을 모방한 그 사람이 쇼토스케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흑막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 것이다.
부모라도 무조건 자식에게 똑같은 애정을 나누어 주는 것은 아니고
형제간이라도 혈육의 정을 나누었다는 것만으로 단단한 결속이 생기는 것이 아니란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띵~ 하고 울리는 아찔한 현기증.
아.
순수한 한 청년이 평평한 대로를 걷는 데에는 참으로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그 청년이 나쁜 마음을 먹고 있었더라면 그의 주위에는 그를 도우려는 인물이 없었을 것이다.
후루하시 쇼노스케의 주위에는 참으로 선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많았다.
"쇼노스케, 그 자를 처단하고 싶으냐?"
아버지의 원수다.
어지러운 마음으로 똑바로 생각할 수도 없는 채 쇼노스케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
"왜지?"
"아버지가...그것을 바랄 것 같지 않습니다."
-594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용기 없는 겁쟁이라 스스로를 자조하지만 쇼노스케의 그 마음이야말로 바로 주변의 다른 인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거대한 힘이라 생각한다.
굴신하는 자라 작고 유약하다 여기면 안되는 것이다.
한바탕 뒤죽박죽 회오리가 지나갔지만 벚꽃 정령과 함께 그 시간을 지나왔기에 "벚꽃박죽"이란 아름다운 곁말로 그 시간을 추억할 수 있다.
역시 미미 여사의 에도물은 아련한 분위기와 함께 죽은 듯 가라앉아 있던 마음 속의 선한 본성을 툭툭 건드리는 뭔가가 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벚꽃이 흩날리며 벚꽃박죽을 만들어냈지만 뭔가 애잔한 뒷맛을 남기면서 내년을 다시 기약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