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 여사는 초기작도 대담하다 [형사의 아이]
한동안 미미 여사의 에도물에 빠져 있다 보니 [모방범], [솔로몬의 위증] 같은 현대물의 훈김이 그리웠었는데. 마침 초기작 [형사의
아이]가 발간되었다.
미미 여사는 언제부터 그렇게 재능이 출중했나, 했더니.
역시, 처음부터 훌륭했었던 거다.
비교적 초기 작품에 해당하는 [형사의 아이]에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만큼 그녀의 역량이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이
보인다.
소년 탐정을 주로 내세우곤 했던 것도 [형사의 아이]에서 형사의 아들 준이 주인공으로 나선 것을 보면 그 맥락을 쉽게 따라잡을 수 있다.
도쿄 대공습으로 황폐화되었던 과거와 거품 경제로 번성기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사회 질서가 요동치는 현재의 모습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며 "범죄"와 "사회"의 맞물림을 잘 보여준다.
경시청 수사과에 근무하는 미치오는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 준과 단둘만의 생활을 시작한다. 도쿄의 시타마치(옛 정취가 남아 있는 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셋집을 구하고 동시에 기적과도 같이 하나라는 나이 지긋한 베테랑 가정부도 얻게 되었다.
준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가정부 하나는 <컬렉터> 같은 옛날 영화도 많이 보는 호기심 많은 할머니다.
하나 할머니는 동네에 떠도는 소문도 물어다 주었다. 제방을 등진 단독주택에 혼자 사는 노인, 그 집에서 살인이 벌어졌다...젊은 아가씨가
살해됐다는 소문이었다.
마침 그 때 시타마치의 강에서 토막 시체의 일부가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미치오는 그 사건을 담당하게 되는데, 준은 잠 못들던 새벽, 우체통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갔다가 한 통의 편지를 들고 온다.
"시노다 도고는 살인자."
편지에는 달랑 한 줄 뿐.
준은 이 사건을 스스로 수사하겠다며 시노다 도고를 찾아 나서는데, 그는 '일본 화단의 이단아이며 이색적인 작풍으로 소개되고 있는 화가였다.
그리고 동네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의 근원지인 바로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직접 시노다 씨를 만나고 그의 유명한 작품 <화염>을 눈앞에서 보게 된 준.
'숨이 멎을 뻔했다'는 관용구에서 진실을 발견했다.
그림을 올려다보는 준은 쇼와 20년 3월 10일 대공습 가운데 있었다. 뺨을 그슬리는 불길이 느껴졌다. 고함 소리가 들렸다.
(...)
그 소리들이 불길한 중저음으로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달마 오뚝이가 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 꼼짝 않고 내려다본다. -113
<화염>이라는 그림은 일본 대공습의 참혹했던 모습을 담고 있는 수묵화이고 준의 시선에서 자주 다루어진다. 과연 이 그림이 그리고
잊혀지지 않는 달마 오뚝이가 토막 살인 사건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아버지 미치오가 사건의 큰 전개를 따라 수사하고 있다면 준과 가정부 하나는 <화염>과 노화가 시노다 씨에게 집중하면서 숨겨진
진실을 찾아 내려고 애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영역에서 수사하는 것도 흥미있지만 미스 마플 같은 할머니 탐정 하나 또한 약방의 감초 같은 활약을 보여 준다.
끝부분에 가서 소시오패스 같은 범인이 등장하지만 그들을 벌주기 위한 또 하나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으니 기대하시길...
초기 장편에서도 충분히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미미 여사의 필력은 대담하다.
뒤로 갈수록 서서히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 속에 번화하는 사회 이면에 감추어진 청소년의 일그러진 가치관이 드러나고 경악할 만한 함정을 파놓은
인물에 그저 망연자실 할 뿐이지만...
미미 여사는 끝내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감추지 않는다.
아니, 독자에게 지독한 사건을 겪어내게 하면서 숨어 있던 양심을 끌어올리게 만든다.
범죄자에게도 남아 있는 일말의 양심을 보라, 너희들은 그 마음을 어떤 식으로 쓸 것이냐.
독설을 퍼붓지 않고 톡톡톡 이불 덮어 다독여 주는 훈훈한 마무리를 잊지 않는다.
사건의 진상이 여름날의 폭우에 와르르 허물어지는 토사처럼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한 순간에 쏟아져내리듯 밝혀지지만 끈기를 가지고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소년탐정의 끈기도 인정해줄 만하다.
오랜만에 미미 여사의 현대물을 읽었지만 역시나 그녀는 탁월한 이야기꾼임을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손에 잡은 책을 쉬이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녀의 전매 특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