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예수
고진하 지음 / 비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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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넘어서서 마음을 어루만지다. [시 읽어주는 예수]

 

복음서는 역사를 담은 것이 아니었나?

예수의 육성이 담긴 복음서를 살아 있는 언어 곧 시라고 말하는 것이 일단은 놀라웠다.

성경을 자세히 탐독하진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시편'도 있는 것 같았는데... 각 복음서마다 몇 장 몇 절로 표기가 되는 것도 그렇고, 줄줄 읽는 것을 보면 꽤 운율도 느껴지는 것이 시에 가깝다면 가까운 것 같았다.

저자는 고대 인도의 <베다>, 히브리인들의 [시편] 같은 경전을 보면 신에 대한 찬가는 시적 운율로 이루어져 있다면서 시와 종교의 연관 관계를 얘기한다.

신비롭고 경이롭고 모호하고 불가사의한 세계는 시적 언어가 아니면 표현할 길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시 언어가 사라진 자리를 이성과 합리에 기반한 산문적 언어가 차지하고 있는 시대를 반성하고 계산과 타산에 밝은 산문적 인생들이 종교라는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북적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보인다.

죽은 말을 토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을 토해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침묵을 사랑하는 예수를 '시 읽어주는 이'로 모셨다는 저자.

 

이 책에는 마음에 큰 울림을 남기는 동서양의 시가 담겨 있다.

특정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살짝 걷어내고 본다면 이 책은 그저 자칭 "예수"라고 하는 이가 정성들여 시를 읽어주는 책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김지하의 <님>, 틱낫한의 <서로 안에 있음>, 헬렌 켈러의 <행복의 문>, 임의진의 <마중물>, 에밀리 디킨슨의 <짧은 노래> 등 꼭 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도 삶의 다양한 순간에 읽으면 일단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만 같은 언어의 시들이 빼곡히 자리한다.

보통 시에 등장하는 "님"을 저자는 '하느님'과 연관시켜 보고자 하지만 나는 애써 그런 해석을 벗어나려 했다. 여기 있는 시들을 종교적 관점이 아닌 "마음 보듬기"의 차원에서 읽기 위해 저자의 해석 부분을 취사선택하여 보았다. 그러자 거부감이 서서히 옅어지면서 시 자체의 평온하고 부드러운 언어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둠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정현종, <경청> 중.-166

 

특히나 이 책에서 가려 뽑은 시들은 시보다는 잠언에 가까워서 어렵게 함축된 뜻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시를 읽으며 머리와 이마에 푸른 핏줄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된다.

스르륵 수월하게 읽어내는 사이에 슬픔이 저만치 사라지고 아름다운 꽃망울이 막 움을 틔우려는 찰나를 맞이하게 된다.

 

나도 이 작은 나비처럼

내 기쁨을 만들어가리

나비의 행복한 마음은 바위를

꽃으로 만드는 힘이 있으니.

-윌리엄 데이비스, <본보기>-256

 

내일 일을 염려하고 숱한 걱정으로 힘겨워할 때 부처의 염화미소는 대중들에게 이상하게도 커다란 힘을 불어 넣어준다.

나비의 행복한 마음이

바위를 꽃으로 만든다는 시를 읽으면서

한순간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버리고 만족을 맛보게 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한다.

격렬하게 성토하거나 휘몰아치는 듯한 격정으로 몰고가는 강렬한 시는 아니지만 여기 실린 잔잔한 시들은 현재의 "자족"을 꿈꾸게 한다.

뭐랄까, 아련한 자장가와 함께 내 머리 위에, 아픈 배 주위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엄마의 "약손"같은 처방이 가득한 것이다.

 

[시 읽어주는 예수]라는 제목 때문에 읽기를 꺼려하는 이들이여, 기억하라.' 엄마의 약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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