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고 싶다[해변빌라]
사람과 사람이 얽히는 일에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생겨나고, 그것은 대부분 감정을 기저로 하여 만들어진다.
일이라는 것이 만들려고 만들어진다기 보다는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맡기면 결국엔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때로는, 사건의 흐름을 좇기보다 감정의 흐름을 좇는 것이 더 이해하기 빠른 경우도 있다.
소설 속에서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감정을 모두 좇아야 하지만, 이 책의 경우는 감정의 흐름을 좇는 편이 ...아니, 처음부터 감정을 따라
오라는 듯한 작가의 의도가 명백히 보이기에 그저 정신을 느슨하게 풀고 편하고 느긋하게 따라가기로 했다.
여기, 유지라는 소녀가 있다.
아버지의 존재를 처음부터 느껴보지 못하고 그 자리를 뻥 뚫린 채 남겨두어야 하는 소녀.
피아노를 치며 현의 움직임과 그 현들의 떨림에 온 세상을 다 던져넣고서야 겨우 제 존재 하나를 이해할 수 있었던 소녀는 어느날, 과학실에서
새로 들어온 인체모형을 자랑하듯 어루만지는 생물선생 이사경 앞에서 옷을 벗어던진다. 맨몸으로 서서, '나 여기 있어요'라며 침묵 속에서 맹렬히
부르짖는다.
" 왜 그랬니?"
유지를 추궁하던 작은 고모 이린은 실은, 유지의 친엄마였다. 그럼, 아버지는?
절대 아버지의 실체를 밝히지 않으려 한 이린에게는 아는 남자가 많았다.
이사경은 아버지의 존재와 가장 맞닿아 있는 인물이었고 과학실에서의 그 사건 이후 어찌된 일인지 유지는 이사경의 아내 백주희, 그들의 아들
연조, 이사경의 어머니인 노부인과 가족 같은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다.
피아노 치는 데 재능이 있었지만 함께 미래를 꿈꾸던 남자 오휘와의 미래가 산산조각이 날 때부터였던가, 팔이 무거워지면서 음악가로서의 꿈도
내려놓게 된 유지는 황량한 바닷가 동네의 해변빌라에 살면서 <피아노호텔>이라는 교습소를 운영하며 살고 있다.
폐해수욕장에 있는 작은 카페 '해변의 가능성'에는 여러 사람이 밀려왔다 밀려간다.
유목들이 쓸려왔다 다시 쓸려가는 것처럼, 모래 무덤이 쌓였다가 은빛 물결에 스러져 가는 것처럼.
유지로부터 뻗어나간 사람들의 관계는 슥슥 그려지지만 희미하다.
무엇 하나도 확실한 것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가거나 히말라야의 동굴에서 생을 마치듯이, 그는 이곳 페루의 해변까지 도망쳐오지 않았던가. 다른
이들이 하늘가에서 살듯, 그는 바닷가에서 살고 있었다. 바다가 소란스러우면서도 고요한 살아있는 형이상학, 바라볼 때마다 자신을 잊게 해주고
가라앉혀주는 광막함, 다가와 상처를 핥아주고 체념을 부추기는 닿을 수 있는 무한이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중.
복잡한 생각, 엉킨 실타래들은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 앞에선 그 힘을 잃는다. 거대한 철썩임 앞에서 그저 마음을 비우고 바라만 보게 된다.
바다가 주는 형이상학, 광막함과 무한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것인가.
유지는 해변빌라에 산다. 폐해수욕장에 자주 들르고 '해변의 가능성'의 인연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가 서서히 차오르겠지.
문제를 괄호 속에 담아두고, 타자와는 가능한 한 부딪치지 않고 돌아서 가고, 변하는 것은 변하는 대로 받아들이고, 세상과는 최소한만
연루되고, 이야기를 억제한 채 감정과 시간이 가만히 흐르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작가의 말
남의 인생이라고 그저 아무렇게나 바라보게 만들지 않는 것이 바로 작가의 힘이다.
생을 마주하는 또 다른 자세 하나를 유지로부터, 해변빌라와 그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배우게 된다.
리스트의 [순례의 해]와 슈베르트의 [ 피아노 소나타]와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를 몰라도 왠지 그 음률이 어디선가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맡기게 된다.
피아노와 해변에 와닿아서 부서지는 파도의 조화로운 소리가 이 소설을 꽉 채우는 것 같다.
바다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