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를 둘러싼 미스터리 [비취록]
형암은 탐욕과 부패가 없는 세상,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소...예언서에 등장하는 진인이 나타나 새로운 이상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원했던 것이오. 평소에도 형암은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사회적 약자의 삶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해왔소.-268
세상을 전복시키려는 자들은 시대가 뒤숭숭한 틈을 타 재림한다. 사이비 종교를 따르는 이들은 공허한 이들의 마음을 파고든 교주에게 몰려들어
피리부는 사람을 좇는 쥐들처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절벽으로 첨벙첨벙 뛰어내린다.
때로는 전쟁보다도 테러보다도 더 무섭게 국가의 기강을 들고 흔드는 것이 바로 민심의 이동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다루어지지 않는 흉흉한 세상에서는 국가도 그 권위를 잃는다.
대학교수이자 고서감정 전문가 강명준의 사무실에 고서의 복사본 하나를 툭 던져놓고 간 사내가 있었다. 한문 필사본 "비취록"의 감정을
부탁하러 온 사내는 밑도 끝도 없이 "당신, 예언을 믿소?"라는 말을 던지고는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자리를 떴다.
논문표절시비에 휘말린 강명준은 고서에 밝은 학과장에게 잘 보여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비취록을 찾으려 하는데, 뜻밖에도 그 의문의 사내가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비취록"을 두고 서로 견제하는 사이였던 용의자 또한 얼마 후 시신으로 발견된다.
한편 계룡산 자락에 위치한 쌍백사에서 흘러나오는 갖가지 소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해광을 보낸 중허 스님은 해광의 입적이란 비보를 듣고
진상확인차 유정 스님을 보냈지만 그 또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쌍백사의 사건 또한 예언서 "비취록"과 무관하지 않았기에 강명준과 오 반장은 뜻을 모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에 힘쓴다.
그들은 <정감록>의 사상으로 무장했던 조선시대 '홍경래의 난'으로부터 뻗어나온 <비취록>과 민족종교인 보천교를
추종하며 새로운 세상을 위해 '거사'를 준비하는 형암과 쌍백사 승려들의 실체에 점점 다가간다.
기존의 비결서와 조선 혁명가들의 명문장을 집대성하여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명료하게 제시했다는 책, <비취록>
오래전 예언서가 범상치 않은 총기를 지닌 한 사람에게 침투하여 "신념"을 가지게 했다.
썩어빠진 세상을 갈아엎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개인을 비난하기보다 훌륭한 지도자를 갖지 못한 국가에 더 울분을 느끼게 된다.
백성의 마음에 예언서가 깊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썩어빠진 세상"에서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소설에서는 한낱 종교세력의 모사 치고는 꽤 규모가 큰 '거사'내용이 드러난다. 쌍백사에 거취를 마련한 이들이 민족종교에 뿌리를 둔
종교세력인 관계로 그 대상이 우리나라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일왕,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고위 관계자들, 친일파 후손이 발족한 단체인 일영회
회원이 되었다.
진짜 거대한 음모 세력이 우리 나라 내부로 눈을 돌린다면 ...하는 상상을 쉽지 않게 해볼 수 있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한때 온나라가 들썩였다. 조선조 역성혁명이 일어날 당시 <정감록>이 대유행하던 시절에 비견할 일은 아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가 혼란할 수록 마음 기댈 데가 필요하다. 그 곳이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작가 조완선의 작품으로는 <외규장각 도서의 비밀>이후 간만에 접하게 되는 <비취록>이다. 추리적 기법과 역사적
상상력을 결합하는 방식이 낯설지 않다. 역사를 기본으로 한 픽션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이 책도 흥미롭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