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에 도전하다.[푸른 수염]
샤를 페로의 동화로 널리 알려진 무시무시한 이야기 푸른 수염이 독창성과 신랄한 문체로 유명한 아멜리 노통브의 펜을 빌어 다시 태어났다.
상상만 해도 기괴한 푸른 수염의 귀족 남자가 아내를 데려온 뒤 선뜻 열쇠를 맡기는데 단 한 군데, 비밀의 방만은 절대 열지 말라고
당부한다. 남편이 멀리 나간 동안 아내는 결국 비밀의 방을 열고 예전 아내들의 시체가 죽 걸려 있는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푸른 수염은
잔혹한 연쇄살인마였던 것.

아~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욕심 아니던가.
신화속에 등장하는 판도라도 호기심을 못 이기고 금기의 상자를 열어 세상을 혼돈에 가득차게 만들었고, 에로스와 프쉬케의 신화에서조차 얼굴을
보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던 에로스의 말을 프쉬케가 어기면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눈물의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듯 오랜 역사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대대로 전해내려오던 신화의 틀에서조차 "금기"라는 것은 필시 깨라고 만들어져 있는 것임을 찾아볼
수 있는데...
금기를 접했을 때, 모두들 "나는 절대 어기지 않아"라고 장담하지만 금기의 매력은 광기로 돌변하여 사람을 겉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
나만 아니면 돼, 하는 심정으로 그 이야기를 읽어가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심장이 한껏 쫄깃해지면서 금기를 어긴 뒤의 일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까...눈썹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는 듯한 긴박감을 느끼며 침을 꼴깍 삼키게 된다.
이미 너무나도 유명한 푸른 수염의 이야기가 다시금 현대의 소설로 태어났다고 했을 때, 뭐, 다 아는 얘기인데 새로울 것이 있겠어? 하고
코웃음을 쳤었다.
그렇지만 아멜리 노통브의 변주는 독특하고 새롭다는 평을 들었을 때 그냥 지나칠 수 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녀의 이름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책을 집어 들어 몇 장 읽다가 '무슨 대사가 이렇게 많아?' 하며 눈살을 찌푸렸고 도무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에 머리가 아파왔으며 게다가 또한 은근한 은유와 역설적인 비꼼으로 가득한 문장들은 참을 수가 없어서 덮어놓았던 기억이
있는지라...이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제목이 너무나도 익숙하고 결말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푸른 수염'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아멜리 노통브를 무시한 채 살고
있었으리라.
당돌한 여성 사튀르닌은 친구 코린의 집에 신세 지며 살고 있다가 파리 7구의 호화 저택에 들어가 살게 된다. 방을 구하는 지원자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이미 여덟 명의 여자가 방을 얻어 산 적이 있는데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어쨌거나 집주인의 눈에 든 26살의 사튀르닌은 에스파냐의
귀족 성에서 44살의 돈 엘레미리오와 함께 동거하게 된다. 사전지식으로 중무장한 사튀르닌은 절대 넘어가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돈 엘레미리오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데 어쩌나...그가 제공하는 쾌락과 편안함, 배려에 서서히 마음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값비싼 샴페인을 곁들인 호화로운 식사를 하면서 둘이 쉴새없이 주고 받는 재치 있는 대화들은 진정 이 소설의 백미라 할 만하다.
아멜리 노통브가 창조한 현대의 푸른 수염은 광기 어린 사람이지만 단단한 벽을 품고 들어간 사튀르닌의 마음을 한순간 녹여낼 정도로 사랑에
있어서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보일 줄 아는 사람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냉철하게 이성을 내세워 핵심을 파고든 사튀르닌은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가리워질 뻔한 베일을 걷어내고 곧장 푸른
수염에게로 칼날을 들이댄다.
사진을 유일한 취미로 갖고 있는 푸른 수염에게서 암실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한밤중에 식칼을 들고 직진하는 사튀르닌의 모습에 푸른 수염이
오르가즘을 느낄 뻔했다고 말하는 장면은 가히 푸른수염을 변주한 장면 중의 압권일 듯하다.
왜 사튀르닌이 아홉 번째 여자인지를 알아내면 아멜리 노통브의 "푸른 수염"이 가진 독특한 비밀이 벗겨진다.
동시에 사튀르닌은 생명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금기에 대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사랑"이라는 것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던 돈 엘리미리오의 선택은 끝내 잘못된 것이었는가.
"난 미치광이가 아니라,절대에 사로잡힌, 사랑하는 여자와 자신 사이의 정확한 경계가 무엇인가 하는 끔찍한 질문에 아홉 번이나
직면한 남자요."
사튀르닌에게 쏟아내는 돈 엘리미리오의 대사가 왠지 처절하리만치 슬프게 느껴진다.
금기에 도전한 여성의 최후는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지만 사투르닌의 경우는...사랑에 빠진 여자의 고뇌가 그대로 느껴진다고 할까.
나 역시도 연쇄 살인범에 불과한 돈 엘리미리오에게 동정표를 던지고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