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은 무력하다. [공허한 십자가]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를
뜻하는 것이다.
오욕칠정이 넘쳐나는 것을 양심이 제어하지 못할 때 범죄자가 생겨난다.
범죄라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게 마련.
피해자 혹은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어떤 경로로든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응당의 대가를 치르게 되기를 원한다.
살인의 경우, 똑같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부르짖기도 한다.
가해자가 사형제도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면 피해자 부모의 마음이 과연
후련해지기나 할까?
가해자에게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옳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사형제도는 필요한 것인가? 가해자가 진정으로 속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접점을 찾지 못하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려 논쟁의 불씨를 일으키는 소설. [공허한 십자가]
"히루카와의 사형이 집행된 이후, 뭔가 달라진 게 있나요?"
나카하라는 즉시 대답했다.
"아니요. 아무것도...무엇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아, 그래?' 하고
생각했을 뿐이지요."
"그렇겠지요. 그리고 히루카와도 결국 진정한 의미의 반성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사형 판결은 그를 바꾸지 못했지요."
히라이는 약간 사시인 눈으로 니카하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형은 무력합니다."
광고 회사에 근무하던 나카하라는 딸이 살해당한 이후 아내 사요코와 이혼하고
반려동물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엔젤보트"라는 장례식장을 운영한다. 11년 후, 갑자기 그를 찾아온 형사로부터 아내 사요코가 대낮에 한 노인의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이유 없이 가슴이 먹먹해지는 때가 종종 있는데, 부모보다 자식을 앞세운 사람들의 사정을 들을 때
그렇다. 아이를 잃은 슬픔이 겨우 치유되고 있는가 싶을 때에 연락을 거의 끊고 살다시피 했던 전처 사요코의 죽음을 전해 들은 나카하라는 왠지
납득할 수 없는 사실에 사건을 좀더 깊이 파헤쳐 보기로 한다.
사요코의 쓰야에 참석해서 예전 장인 장모를 만난 나카하라는 결혼 전 광고
카피라이터로 일했던 사요코가 취재노트를 쓰며 기사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요코가 취재했던 도벽증 환자 사오리도 만나게
되는데...
아내 사요코가 남긴 '사형 폐지론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원고는 유족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단순한 통과점의 의미로서 '사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지만 '속죄'와 '보상'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사요코도 꽤나
고민을 한 듯, 원고의 결말은 속시원히 지어지지 않고 있었다.
사요코를 살해한 노인의 사위라는 사람은 의사라고 했는데, 그로부터 옛 장인
장모에게 사과의 편지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듣고 나카하라는 그를 찾아가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곤 사요코가 취재했던 도벽증 환자 사오리와 의사
사이에 접점이 있음을 알아낸다. 사요코가 취재했던 도벽증 기사에 따르면, 사오리는 도벽증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사례자들과는 달리 이 세상에
자신처럼 죄가 많은 존재는 없다며, 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이 판단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재범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 피해자 가족의 슬픔을 극복하는 통과점을 찍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처벌인가?
여기에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속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교도소에 들어가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 사람이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아무런 무게도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이 지금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그렇지
않아요. 너무나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무겁고 무거운 십자가예요. 나카하라 씨, 아이를 살해당한 유족으로서 대답해보세요.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느 것과 제 **처럼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하세요?"-413
사형제도의 찬성과 반대라는 의견은 십자가처럼 완벽하게 어긋난 길을 달리고 있다.
다른 두 직선이 단 한 번 마주치는 십자가처럼 두 의견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공허한
십자가]
나무의 바다, 수해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면서 오랜 시간 묻혀 있던 사건이
드러나지만 그들에게 과연, 감히 이래라 저래라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괜시리 숙연해지는 마무리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책장을
덮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