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르르 머리 굴리다 패함 [그랜드 맨션]
또르르 머리 굴리려다 작가에게 된통 당했다!
"이야기의 구성을 교묘하게 뒤틀어 트릭을 만드는 '서술트릭'의 대가 오리하라 이치." 라고 역자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는데도 가볍게 무시했다가 이런 참담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모두 7편의 단편 중 첫 번째 단편을 읽으면서 "아, 신선하다."하며 눈빛을 빛냈고 다음 번에는 속아넘어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쯤에서 두 손을 들고 메모를 시작했더라면 ~하고 후회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
무슨 기억력을 믿고 그 많은 맨션 주민들을 그냥 스르륵 흘려보냈던가.
두 번째 세 번째로 이어지는 단편을 읽으면서는 감히 맞붙어 보겠다는 호언장담이 쑥 들어가 버렸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며 허점을 쑥 파고드는 작가에게 무슨 수로 당하겠는가.
7번의 반전을 겪으면 혼이 스르륵 빠져나간다. 정신 혼미.

이 심상치 않은 표지 사진을 보라.

선명하게 대비되던 빨강과 파랑이 어느새 색채가 지워진 채 머릿속에서 엉켜버린다.
아파트보다 조금 나은 낡은 4층짜리 공동주택, 그랜드 맨션.
본사에서는 그랜드 맨션이 노후 건물이라 해체할 계획이었으나 마지막까지 이전을 원하지 않는 주민들이 남아 있어서 공사를 할 수 없다.
그런데 알 수 없게도 그랜드 맨션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유아학대, 가정폭력, 연금 부정수급, 전화사기...그야말로 현대 일본이 안고 있는 어둠, 또는 병적인 문제가 이 공동주책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335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는 당연히 퇴거하고 노령화된 입주민 중 몇 명은 자연사해 입주민 수는 점점 줄었다. 초조해하지 말고
천천히 기다리면 모든 집이 비어 팔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랜드 맨션에서 사건이 일어나게 된 진짜 원인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그랜드 맨션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뉴스의 사건사고 단골 메뉴들임에 틀림없다.
202호의 사와무라 히데아키는 실직한 상태인데 "다른 남자가 생겼다"며 아내가 집을 나간 후로 왠지 윗층의 소음이 견딜 수 없어졌다. 술
냄새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들어오는 윗층 여자에게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말하자 "얌전히 시킬게요."라고 대답한 뒤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서 히스테릭한 비명이 들린다. "이 새끼들, 죽고 싶어!" "입 다물어. 다물라고, 죽여버린다!"
사와무라는 위층 아이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돈다. "때렸더니 조용해지고 냄새가 난다."
오싹한 사건이 발생했음을 암시하는 말 때문에 위층 여자에 대한 혐의가 짙어진다. 과연...범인은?
단편 중 1편 <소리의 정체>에서부터 작가에게 말려버린 후에는 술수에 말려들지 않겠다며 이후 계속 반복되는 말에 집중해가며
읽었다. 작가가 반복하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역자의 팁을 백퍼센트 반영한 것이다.
그랜드 맨션의 민생 위원을 맡고 있는 전직 공무원 다카다 에이지가 노령자들의 안위를 위한다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소식을 주워모으고 있지만
역시 그로써는 한계가 있는지 스쳐지나가듯 했던 인물들이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곤 한다. 맨션 주민들의 신상정보를 제공해달라는 다카다 에이지와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밝히기를 꺼리는 관리인의 실랑이가 자주 펼쳐지는 것에 신경을 쓰다보면 "관리인"이 사실은 둘이었다는 사실조차 까먹기
일쑤다. 요컨대 현란한 말재주와 어물쩍 넘어가는 반복되는 구절에 트릭을 다 숨겨놓았는데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꼭 잡고 있어야 할 정신줄을 놓게
된다는 말이다. 그랜드 맨션 1관, 2관, 3관도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 한몫 한다.
105호의 노망난 늙은이 다가 이네코의 깜빡깜빡하는 증상이 저절로 전염되는 듯하다.
아~ 끔찍하지만 다시 또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은 중독성 있는 반전의 반전.
결국, 이 책을 두 번 읽어야 했고 두 번째에는 메모 필수라는 점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처음에 읽을 때는 작가에게 덤벼보리라 하는 각오로 읽으면서 사건 중심으로 읽어나갔지만 당했다.
두 번째 읽을 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심히 읽어나가면서 죽자 사자 메모했지만 속아넘어가는 과정을 되새김질하는 기분은 역시 씁쓸했다.
패배감을 복기하는 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다음에 이 작가의 책이라면 또다시 손을 뻗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또르르 머리 굴린다고 나름 굴렸지만 결국엔 패함.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그저 즐기기를 권하는 바이지만 메모를 준비하고 야심차게 트릭에 도전하겠다는 이가 있다면, 감히 도전해
보시라고...거기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