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이야기꾼들
전건우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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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세요. 목련흉가로...[밤의 이야기꾼들]

 

여름밤에는 역시 괴담, 기담 등의 이야기를 들어야 제맛이다.

불을 꺼놓은 방에 모여 앉아서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소름돋는 이야기를 듣는 맛이란...

 

어린 시절에는 이런 시간이 제법 있었다. 오랜만에 친척 언니, 오빠를 만나면 "이리 와봐~" 하면서 끌고 들어가 불을 끄고 분위기를 한껏 돋운 다음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몸이 토막난 시체가 독 안에 들어있다가 범인과 마주했을 때 갑자기 "바로 너!" 하고 일갈했다든지...깊고 깊은 산골의 으슥한 길을 가는데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는데...로 시작하는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면 가만 앉아 있다가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오금이 저려왔다.

화장실을 자꾸 가고 싶은데 화장실에서 뭔가가 손을 흔들며 "파란 휴지 줄까, 빨간 휴지 줄까..." 하고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을 건넬까 싶어 오줌을 참기도 했었다.

 

바로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여기에 있었다.

[월간풍문]이라는 잡지사의 기자 둘이-"나"와 대호 선배-서 목련흉가로 취재를 갔다.

어둠과 고요 속에 놓여있는 의자에 형광 테이프가 붙어 있었고 사람들이 도착하여 의자에 앉으면 그 테이프가 하나씩 사라지는 것으로 누군가가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 이제 모두 모였으니 올해의 '밤의 이야기꾼들'을 시작하겠습니다."

 

노인의 말을 시작으로 모두 다섯 명의 이야기꾼들이 차례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울 시내의 폐가, 자정, 암흑 속에 둘러 앉은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밤의 이야기꾼들'이라는 이름의 비밀 모임.

긴장과 스릴을 위한 준비는 모두 마쳐진 상태에서 오소소 소름돋는 이야기들이 하나둘 꺼내어진다.

 

거슬리는 목소리의 여자가 들려주는 잃어버린 물건과 난쟁이 이야기에서  

사이코 여자의 해괴한 짓거리인지 도플갱어의 출현인지 모르게  애매모호하게 끝맺어진 정신과 의사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어느새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무미건조한 억양의 남자가 들들려주는 "홈, 스위트 홈"  이야기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라는 노래를 들으면 꼭 생각날 것만 같다.

한때 항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빨간 마스크"이야기의 재해석판 또한 생생하고 끔찍하면서도 자극적이다.

정재영 주연의 영화 <이끼>를 떠올리게 하는 마을의 저주 이야기 "눈의 여왕" 결말은 사랑 이야기로 귀결된다.

'밤의 이야기꾼들'의 규칙과 전통은 처음 참석한 사람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이다.

취재를 위해 참석한 "나"는 어느새 마음 속에 감추어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낸다.

아홉 살 여름, 어두운 밤, 미친 듯이 내리던 폭우로 물이 불었던 계곡에서 겪었더 그 날의 일을 ...

 

마지막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이야기의 힘"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서는 결코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것이 이야기 아닌가. (혼자 중얼거리면 정신병자로 오인받기에 딱 좋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얼굴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이야기할 대상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마음 속의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다.

꼭꼭 숨겨두었던 묵직한 덩어리를 밖으로 뱉어내는 그 행위만으로도 이미 그 덩어리의 무게는 훨씬 덜어진다.

아줌마들의 수다든, 직장인들의 뒷담화든.

이야기를 뱉어낸다는 행위는 스스로 정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다.

어떤 위대한 목적을 가지고 후세에 전달한다는 거창한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소한 잡담 수준의 이야기라도 한사람 한사람에게는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속이 후련해지도록 일단 비워내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쌓일 것이다.

 

여름의 끝자락에 머리끝이 쭈뼛 솟는 이야기들을 읽고 나니 서늘한 바람이 땀으로 젖은 등줄기를 시원하게 식히고 지나간다.

인간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

때론 너무 평범해서 지나칠 수도 있지만 속을 파고들면 괴담이나 기담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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