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악을 캐다 [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쓰리]와 [왕국]을 읽었기에 이번 작품도 기대가 컸다.

[쓰리]와 [왕국]은 왠지 모르게 뒷골목의 어둠을 파고들어 꺼리게 되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자꾸만 끌어당기는 마약같은 힘이 있었던 책으로 기억하고 있다.  

작가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책의 날개에 설명되어 있듯이 아쿠타가와 상 수상자라는 것 과 프로필 사진-날이 바짝 서 있는 칼날 같은 표정을 한 작가의 얼굴-이 다였다.

어디서였을까. 작가가 여자라고 착각하게 된 부분은.

작은 네모 안에 선이 굵은 눈썹과 강렬한 눈동자가 들어 있었으나 얼굴 아래쪽이 선이 고운 손가락으로 가려져 있어서 그리고 이름이 후미노리라서 여자 작가인 줄로만 알았다.

여자 작가 치고는 하드한 어둠의 세계를 꽤 깊이 파고든 작가라 기억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세계를 창조해낼 수가 있지? '

이번 [미궁]까지 읽으면서는 도저히 여자 작가로서는 내지를 수 없는, 차마 쌓아올릴 수 없는 선이 굵은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내가...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참...둔하기도 하지.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남자였다!!

 

어떻게 남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냐고 물으신다면...

작가 후기 부분에서

"참고로 작품 속에 나오는 R은 옛날에 내 안에 실제로 있었던 존재다. 지금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라는 폭탄 발언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R이란 [미궁]의 나레이터이자 주인공 격인 남자 "나"의 이중인격을 부르는 말이다.

 

"나"는 안 지 얼마되지 않는 사나에라는 여자와 얽히게 된다.

웬 탐정이 찾아와 사나에가 미궁 사건-일명 히오키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가족이라고 말하면서부터 "나"는 사나에에게 관심이 생겼다.

히오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밀실 상태의 집에서 남편과 아내가 흉기에 찔려 죽었고 장남은 누군가에게 구타당한 끝에 독극물을 먹고 사망했다. 색색의 종이학이 아내의 사체 주변에 흩뿌려져 있었다.  장녀는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다가 뒤에 깨어나 참담한 현장을 보고 조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근처에 사는 남자가 용의자로 잡혔으나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과 모발의 DNA와 다르고 또한 밀실 상태의 범행을 연출하고 종이학으로 현장을 꾸며낼 만한 범인상과는 거리가 멀어 끝내 기소에 이르지 못했다.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악"의 맨얼굴을 맞닥뜨리게 되어 실로 당황했다고밖에 할 말이 없지만 후아~ 그러면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여자친구의 과거 고백이 덩진 충격파에 절로 몸을 싣고 "악"의 맨몸, 맨 얼굴을 친견하는 일을 아마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철학자들의 성선설, 성악설...이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할 일만을 신경쓰며 이제까지 살아왔건만 가끔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뚫고 들어오는 "악"을 대면하게 될 때가 있다.

눈살을 찌푸리면서 살짝 거부감이 일어나지만 야금야금 책을 읽어가면서 "재미"를 느낀다.

"악"을 관음증 환자처럼 지켜보며 즐기는 나를 깨닫고 순간 아찔해질 만큼 말이다.

자극적이고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보고 있다는 것을 조감도 들여다보듯 인식하는 내가 있다. 나의 초자아쯤 되려나. 기분이 묘하다.

나에게도 악을 추구하는 충동적인 면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주인공이나 사나에와 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바로 내 얘기였어~ 큭큭.

자학적인 웃음을 지으며 사악한 미소를 짓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R이 내 속으로 침투해왔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짜릿한 전율을 느끼면서 머리꼭대기 끝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 한 차례 지나가자, 뭐랄까.

개운한 뒷맛이 찾아왔다.

악을 통한 카타르시스. 정화의식인 것인지.

 

"자네가 그 사건을 쫓는 이유를 알려줄까? 그 사건의 깊은 곳에서, 그 수수께끼의 깊은 곳에서, 자네 자신을 보고 있지? 자신 속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분이 기묘하게도 그 사건에 반응하지? 그 사건의 진상에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 속의 그 정체 모를 부분도 해명된다는 듯이. 언젠가 자신을 망가지게 할 터인 자네 자신의 핵심.-71

 

이곳에, 악의 기회가 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추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230

 

그렇기 때문에 그 사건은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게 아닐까. 내면에 '어두운 부분'을 떠안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런 자신을 처리해줬으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것이 그 사건의 총체적인 진상이 아닐까. -245

 

책을 덮으면서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며 한숨이 새어나왔지만 그걸로 끝.

더이상 내 자아에서 R의 흔적이 비어져 나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정상이다, 를 조그맣게 읊조리며 안도했다.

가끔은 이렇게 악으로 물든 책을 읽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마음 한구석이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반응하며 기뻐 날뛰기는 하지만 결국은 내 힘으로 그놈을 진정시키게 되고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잘 살고 있다, 를 확인할 수 있게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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