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여인들 [헤르만 헤세의 사랑]
어렸을 적,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칠 때 헤르만 헤세의 책은 말 그대로 "교과서"와도 같았다.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은 지금도 청소년들에게 유효한 교과서이다.
그 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헤세에 매료되어 좀 지나서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혹은 지와 사랑)에 이어 [유리알 유희]까지 찾아서 읽게
되었고내게 헤세는 위대한 작가로 각인되어 있었다.
최근 헤세의 에세이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고 나서는 위대한 작가 이전에 정원 가꾸기를 사랑한 사람, 그리고 오랜 세월
속에서 세계대전을 겪어온 한 사람으로의 헤세를 만날 수 있었다.
문학에서 큰 성과를 이루어 너무나도 크게만 보였던 거장 헤세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가 즐겨 그렸던 집-몬타뇰라의 카사 카무치, 카사 로사-들과 나무들은 [헤르만 헤세의 사랑]을 읽는 동안 자주 머리속을 맴돌곤
했다.
위대한 작가로서의 헤세, ‘옷자락이
다 해져 올이 성긴 바지를 입은 왜소하고 보잘 것 없는 문학가’로서의 헤세를 만날 수 있었던 전작에 비해 [헤르만 헤세의 사랑]을 읽으면서는
헤세를 거의 우러르기까지 했던 독자로서의 경외감이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여인들과
짝을 이룬 헤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헤세의
일생은 친구였던 후고 발에 의해 최초로 전기로 쓰였고 헤세의 여인들에 관한 전기도 더러 나왔었다. 후고 발이 헤세의 전기를 쓰던 당시에 후고는
헤세의 당부대로 둘째 부인과의 삶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못했으며 셋째 부인을 잘 알지 못했다. 지금은 헤세의 삶과 관련 인물들의 기록이 모두
공개되어 있고 책의 말미에 실린 연표만 보아도 헤세의 일거수 일투족이 한눈에 드러난다. 이 책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편지와 문서를 찾아내
헤르만 헤세가 사랑한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 것이다. 아마도 헤르만 헤세의 여인들을 다룬 첫번째 전기가 될 것이다.
아주
특별한 세 여인 이전에 헤세에게는 어머니가 특별한 여인이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를 향해 아름다운 머리를 숙이고 있는 나의 어머니. 가냘픈 몸매와 부드러운 자태, 너그러운 품성을 지닌 당신.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갈색 눈을 지닌."-31
아버지에게서
엄격한 양심을, 인도에서 태어난 어머니에게서 인도의 이야기를 물려받았지만 심리적으로 과도하게 억눌려 있었던 헤세는 작품 속에서 실제와는 전혀
다른 어머니를 만들어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헤세는 가족의 경건주의는 감당하기 어려운 구속이었다. 육체적 본능과 욕망을 부정하는 교육 또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헤세의 첫사랑은
실패로 끝났고 그 사실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헤세는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한다.
"헤세가
신학교 시절에 겪은 갈등은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어머니의 상징을 향한 무지하고도 광적인 사랑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그 어머니는 냉정한 모습으로
신앙 일기를 쓰던 어머니였다."
1904년
마리아 베르누이, 1924년 루트 벵거, 1931년 니논 돌빈.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던 헤세는 세 번의 결혼식을 올렸다.
헤세의
첫 결혼 상대였던 마리아 베르누이는 체구나 기질,음악에 대한 열정에서 헤세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헤세와 마리아의 사이에는 세
아들이 있었으나 헤세는 그리 다정다감한 아버지나 남편이 되지 못했다. 스스로의 문학적 성취와 내면적 자유를 위해 마리아가 출산하는 동안에조차
여행을 다니고 있었으며 툭하면 '도피'를 일삼았다. 마리아는 헤세의 신경과민 증세가 창작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와 결혼한 지 11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은둔자적 평화를 추구하는 그에게 가족은 창작과 사유를 방해하는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헤세는 정신분석을 받으며 의사 랑과 친해지게 되는데 이후 오랜 시간동안 그 둘은 친밀한 관계를지속하게 된다.
의사 랑과 환자 헤세의 관계는 무척 가까워졌다. 랑 박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에서 '사랑하는 친구'가 되었다 . 두 사람의 관계에는 젊은
시절이 동성애적 감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157
이 즈음 헤세는 정신분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데미안]을 집필하게 된다.
헤세의 인생이 그리는 궤적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마도 작품이 쓰여진 순서대로 그의 작품을 읽으면 그의 행로가 드러날지도 모르겠다.
페터 카멘친트-수레바퀴 아래서-크눌프-데미안-싯다르타-황야의 이리-나르치스와 골드문트-유리알 유희
헤세의 편지에서 작가는 헤세의 여인들과 결혼생활, 갈등, 이혼에 관해 알게 되었고 그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와 망설임 없이 내뱉는 고백에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던 여인들에 대한 그의 냉정한 평가에 무척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런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기에 이 책은 놀라웠으며 작가가 되살려낸 헤세의 세 여인은 비로소 생명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신경과민에 시달리며 주위 사람을 힘들게 했던 헤세는 만년에 가서야 가족들 -아들들과 며느리들, 손자들-에게 점점 애착을 갖게 된다.
헤세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너그러워졌다. 반면 니논은 점점 더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486
작가와 정원을 가꾸는 사람으로서의 헤세는 합격점에 들었으나 남편으로서의 헤세, 남자로서의 헤세는 그렇지 못했다.
만년에 와서 좀 부드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하니 사람은 변하긴 하는 모양이긴 하다.
헤세의 특별한 세 여인을 만나볼 수 있었던 특별한 이 책 [헤르만 헤세의 사랑]을 읽음으로써 헤세를 이루고 있는 "진실" 한
조각을 이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헤세에게 특별했던 세 명의 여인이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이 책을 만나볼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