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의 이유는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 [이름 없는 자]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을 드디어 읽을 기회가 왔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오래전부터 실종되었다 다시 나타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범죄학과 행동과학의 전문가로
활동해온 그가 쓴 소설이 현실에 기반한 것임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상이 범죄와 관련된 것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면 한 번쯤 글로
쏟아냄으로써 자신의 머릿속을 비워내는 작업도 꼭 필요한 일이었을 터.
어둠의 세계를 드나들었던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만나기도 하면서 그 알 길 없는 그들의 마음 속을 한 번 끝까지 파헤쳐 보자는 마음이 강렬하게
몰아쳤을 것도 같다.
현실인지 가공의 세계인지 애매하여 머리를 갸우뚱하다가 점점 몰입하게 되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이야기 속으로 온몸을 내던져 푹 빠져 있다가
책을 덮고나면 "실화였다" 라는 말에 마지막으로 녹다운 하게 된다.
믿을 수 없어~ 를 몇 번이고 연발하게 되는 놀라운 책.
이번 소설은 그가 쓴 작품들을 모두 아우르는 프리퀄에 해당한다고 한다.
가출과 실종 문제에 대해 연구해오다가 데뷔작 [속삭이는 자]를 발표했고, 우연한 기회에 바티칸 '사면관'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혼의
심판]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원래목적에 따라 연구를 이어나가다가 가출 후 돌아온 10대 소녀를 만나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가출'을 경험해 보기도 한 후 [이름없는 자]가 탄생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조금씩은 또아리를 틀고 있을 '악의'를 건드려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잠재의식 속의 연쇄살인범 '속삭이는 자' 사건에 깊이
관여했던 밀라 형사는 '림보'라 불리는 실종전담반으로 이동하여 실종자들을 쫓고 있다. 대형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승진 기회가 주어지자 밀라는 주저
없이 림보 행을 택했다. 모든 게 보류된 상태로 자신이 살아 있는지도 모르고 죽었는데 죽을 수도 없는 사람들의 사진으로 도배된 곳이라
"림보"라 불리게 된 실종전담반. 벽에 붙은 미제사건의 '피해자들' 수가 늘어날수록 일을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줄어들기 때문에 림보에 합류하려는
사람은 없었는데 제 발로 지하 림보에 틀어박힌 밀라를 주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날 오래 전 실종된 사람들이 나타나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그 중엔 한 때 림보에 근무하다 홀연히 사라졌던
에릭 빈첸티도 모습을 보이는데...림보의 팀장인 스티프는 밀라에게 사이먼 베리쉬라는 형사를 소개해주며 사건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베리쉬는 한때 현장을 누비는 형사였으나 인류학을 공부한 후 취조나 면담조사 최고 전문가가 된 사람이라고 했다.
밀라와 베리쉬는 사건을 따라가다 '카이루스'라는 존재와 맞닥뜨리게 된다. 유일한 목격자이면서 카이루스의 희생자가 될 뻔했다 마지막 순간에
빠져나온 카밀라의 증언에 따르면 앰브러스 호텔 317호실로 자신을 인도하기 바로 직전에 전화상으로 카이루스는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새 인생을 살아보는 건 어때?"
비참하거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바로 악마의 유혹에 다름아니었을 것이다 .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치명적인 존재. 어둠의 주인이 '신도'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던진 일종의 미끼이자 약속은 한쪽이 허물어져 버린
약해빠진 인간들에게 너무나도 큰 보상으로 보이게 된다.
냉정한 판단력으로 범인을 마주대해야 할 주 인물인 밀라와 베리쉬는 또한 인간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다. "속삭이는 자" 사건 이후 어둠에
중독되어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두려움과 어둠을 힘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길을 택한 밀라는 이 사건에 스스로 걸어들어갔다. 베리쉬 또한 어둠의
주인과의 과거사를 청산하는 데 적극적인 이유는 한때 증인보호프로그램으로 처음 만났던 실비아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 때문에
비리경찰이 됐고, 왕따신세로 전락했으면서도 ...
그들의 연약한 마음이 어둠의 존재의 힘에 먹혀들어갈까봐 가슴 졸이면서도 어서 빨리 그 악의 존재와 대면하고 싶어지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초반, 어둠의 존재에게 조종당한 실종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연속 살인사건을 벌인 참혹한 현장을 지켜보는 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왜 이들은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좀처럼 그 원인이 드러나지 않아 경찰본부에서는 '테러'라 이름붙이기도 했다. 지지부진한 듯하던 사건이 밀라와 베리쉬의
연합으로 줄기를 잡아가게 되고부터는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인간적인 단점을 드러내는 둘을 걱정하며 과연 이들이 카이루스를 이길 힘을 가지고 있긴 한 걸까? 계속 걱정하게 되었다. 밀라에게는
앨리스라는 딸이 있었고, 그 딸아이는 밀라의 가장 큰 약점이었기에 어둠의 손길이 앨리스에게 닥치게 되었을 때는 옆에 있는 이불이건 무엇이건
닥치는 대로 꽉 쥐게 될 정도로 긴장하게 되었다. 제발 앨리스만은...밀라에게 가장 큰 고통이 될 것이 뻔했으므로...
사람이 약해질 때, 가장 쉽게 하는 생각은 어딘가로 떠났으면.
아니면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하는 것이다.
바로 그 생각을 교묘히 이용하는 어둠의 주인이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하다"라고 인식하고 계속해나갈 때 지옥도와도 같은 현실이 펼쳐지게 되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실종의 이유는 과거에서 찾아야 하고 그 과거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상처"로 발현된 것임을 직시하게 해 준다.
작가는 범인이 밝혀지게 되는 과정에 "헉"하고 놀라게 되는 충격적인 반전을 빠짐없이 준비해두었다. 한 번으로도 모자라 두 번씩이나.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면서 더더욱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 또 한 번 놀라게 되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공포와 전율까지도 느낄 수 있다.
마지막까지 안심하며 책장을 덮을 수 없게 만드는 쫀쫀한 마무리.
최고의 긴장감으로 인해 끝까지 숨을 참으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후속작을 예고하는 섬뜩한 결말까지.
어째 다 읽고 난 후에도 끝이 끝이 아닌 것만 같은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강렬한 스릴러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한다.
아직 도나토 카리시를 만나지 못했다면 [속삭이는 자]를 먼저 읽고 [이름 없는 자]에 도전하기를 권한다.
밀라의 마음의 행로를 이해하고 이 책을 만나는 것이 훨씬 나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