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간들 -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지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담담하려 애썼지만 울컥하는...[상실의 시간들]

 

태어날 땐 태어나느라고 고생이고, 살면서는 병들고 늙어가느라 괴롭고, 죽을 땐 죽느라고 무섭다. 고통만이 인생이다. -207

 

여러 번의 굽이굽이를 거쳐 이제 평탄한 언덕에 안착한 지금에 와서 내 인생이 어떠했나, 되돌아 보니 어지러웠던 그 때의 고통과 절망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그 시절엔 숨이 막혀 꺽꺽 거리던 순간이 있었고 슬픔의 강에 빠져 죽을 것 같던 장면이 있었고 이걸 해내지 못하면 다시는 살아갈 힘을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내 짝을 만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큰 걱정거리 없는 날들로 하루하루를 채우다 보니 바싹 말라 있던 내안의 물줄기가 도도한 물살의 흐름을 타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그리하여 꺾어진 80을 앞두고 그럭저럭 잘 살고 있구나, 하며 배 두드리고 미소를 깨물며 살고 있는데, 내 앞에 사진앨범을 촤르륵 펼쳐보인 것처럼 나의 지난날의 기억을 새록새록 되살리는 이 책이 나타났다.

 

아직은 "상실"을 얘기하기엔 내가 누린 행복이 너무 짧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누군가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책을 읽기엔 시기가 맞지 않다고 느껴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다가 슬그머니 들췄더니 착착...주인공 석희가 어머니의 49제를 치르고 그 이후로부터 99일까지, 그리고 한참 후의 일까지를 담담하게 적어내려간 이야기에 나의 기억이 스며들어 한 몸이 되었다.

 

퇴역 군인인 아버지의 전형적인 가부장제적 권위를 과시하는 스타일은 내 아버지의 모습과 판박이였고, 엄마를 잃은 경험은 그 형태만 다를 뿐이지 (분명 존재하면서도 함께 부대낄 수 없는 내 엄마) 나의 아픔을 고스란히 뽑아다 놓은 것 같았으며, 세 딸들의 갈등은 지금 현재 내가 내 여동생 둘과 반목하고 있는 갈등의 그 지점, 바로 그것을 재현해 놓고 있었다.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커다란 설정이 앞에 놓이고 장례를 둘러싼 가족들의 반응이 꽤나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49제 이후의 나날들이 하루하루...이어진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장례식을 치른 후에도 어머니 살아 있을 적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 생을 이어간다. 신장이 안좋아 병수발을 들 사람이 필요하고 끼니를 챙겨줄 사람이 필요하니 실질적으로 아버지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은 둘째인 주인공 석희다.

첫째와 셋째가 가끔씩 들러 훈수를 두는 사람이라면 석희는 아버지의 성질을 다 받아내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다 처리해주어야 하는, 말하자면 엄마의 대용품 노릇을 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 지긋지긋함, 내가 잘 안다.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언니 얼굴엔 한 점 악의도 없다. 말도 선량하고 착하기만 하다. 언니는 아버지를 지금보다 더 잘 모셔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니까, 자기 말이 완전히 옳고 바르다는 확신을 갖고 있겠지. 권하는 말을 하면 할수록 효녀가 되는 좋은 입장이다. 하지만 나는 뭐란 말인가?저 말에 무슨 이유를 붙여 싫다고 대답한들, 결론적으로는 아버지를 같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악역이다. -263

 

혹시 나도 동생들의 눈에 이런, 선량하고 착하기만 한 언니로 비춰지는 것일ㄲ? 아마 그럴지도..

 

자애롭고 부성애 강한 아버지와 함께 단둘이 있는 것도 숨막힐 노릇일 텐데, 명령과 규율의 세계에 익숙하며 군림하려고만 하는 답답하고 고지식한 연금생활자인 아버지와 살려면 그 비위 맞추어 내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머니 사후 100일 정도의 꼼꼼한 기록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나는 아직 우리 가족 누구의 상도 치러보지 않았지만 황망하고 깜깜할 장례의 날들과 애도하는 49일이 지나고 나면 어떤 얼굴을 하고 살아갈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누군가와 마주대하며 그 때마다 어머니를 추억해야 할 일.

잔잔한 파도만이 가끔 왔다갔다 하던 일상에 폭풍같은 쓰나미가 몇 번씩 와 닥치곤 할 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막막하다.

어쩌면 석희네 집의 일을 나도 똑같이 답습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담담한 이 서술 속에서 많은 비를 뿌릴 먹구름의 존재를 감지한 후부터는 절제된 감정의 이야기에 시도때도 없이 울컥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쩌면 우리 아빠도... 어쩌면 내 동생들도...

너무도 핍진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어, 말하자면 진실의 거울 앞에 서게 되어 거울을 깨버리고 싶은 충동,  자꾸 외면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뭉게뭉게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용기를 내어 마주보아야 한다는 조용한 조언을 작가는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담담하려 애썼지만 울컥하는 심정...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동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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