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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강희진 지음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평범한
백성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이신]

참으로
질긴 목숨이다. 반정에서도, 조선의 의병과 싸우던 골짜기에서도, 압록강에서도, 그리고 청에서 그 수많은 전쟁터와 병자년 조선에서도 살아남았다.
-195
이씨
왕조의 신하로 살라며 아비가 이신(李臣)이라 이름지어 주었건만, 그는 이신(貳臣)-다른 왕을 섬김-으로 살았다.
어찌하여
조선의 백성으로 태어난 그가 다른 왕을 섬기며 질기게 살아남게 되었는가.
평범한
한 백성의 뒤를 쫓아가 보니 우리의 역사가 보였다. 부끄럽고 치욕스런 시대가 펼쳐졌으나 단연코 그 치욕스런 시대를 펼친 장본인은 백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지 못한 왕이었다.
아아.
왕은, 조선이라는 나라는, 왜 조선의 품에서 나고 자라 그 속에서 뜻을 펼치지는 못하더라도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사랑을 일구려는 한 평범한 백성
하나 지키지 못하고 그로 하여금 지존에게 칼끝을 겨누게 하는가.
끝내
평범한 이신(李臣)을 이신(貳臣)으로 만들고 만 왕이 부끄럽고 부끄럽다.
조선은
정묘년의 전쟁으로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이후에도 후금을 오랑캐로 무시했으며, 전쟁에 대비하지도 않았다. 조선이 명과의 명분에 묶여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명은 자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으며, 명의 적지 않은 지휘관들이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하여 이신(貳臣)이 되었다.
귀순자와 투항자가 가져간 신무기와 군사 기밀들이 명의 목줄을 조이고 있었으며, 그들을 우대한 홍타이지는 그들을 기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고 국가의 역량을 증강하는 데 활용했다. 명의 원숭환을 제거하는 계책을 제시한 인물도 명의 이신이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조선의 평범한 백성
이신이 그 역할을 맡은 인물로 나온다. 마침내 청이 칭제건원하자 후금과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선택한 조선. 청군은 철기를 앞세워 조선으로
곧장 돌격했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다 삼전도로 나아가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높다랗게 마련된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례. 청은 소현세자를 볼모로 끌고 가며 조선의 백성들까지 끌고 갔다.
왕이
무릎을 꿇은 나라의 백성들에게 ‘사대부’란 허울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사대부의 아낙이며 여염의 아낙 가리지 않고 ‘정절’이란 단어는 사치일
따름이었다. 오직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우선일 그 때에도 그러나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내와 딸들은 치욕스런 삶을 견디지 못하고 압록강으로 풍덩풍덩
뛰어들었다. 혹여나 살아 돌아온 그녀들에게는 ‘환향녀’란 이름이 붙여졌다...
서자로
태어나 감히 넘보지 못했을 사대부집안의 처자, 복사꽃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던 선화를, 전쟁 중이라는 것을 빌미로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지만
또다시 그 전쟁 때문에 아내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백성, 이신.
조선이
아닌 이 세상 어딘가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곳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서자의 차별이 없고, 사랑하는 여인을 가슴에 안을 수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가 조선 아닌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환상에 불과했음을 이신은 청에서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서자도 아니고, 갖바치도 아니었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떠돌았다. 황제의 신임을
얻었어도 그는 이방인이었고, 압록강에 아내의 시체를 두고 온 도망자였다. -201
아내와 딸 난이,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를 모두 잃은 줄 알았던 이신은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부지하여 청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청 황제의
칙사로 조선에 파견된다.
황제의
칙사, 조선의 왕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황제의 오른팔이 되어 다시 조선땅을 밟은 이신은 가족을 잃은 후 아무 곳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고
오직, 아내 선화가 아직 아내 선화가 살아 있다는 말에만 의지할 뿐이었는데...
아픈
시대를 살아낸 한낱 평범한 백성은 이다지도 많은 걸 겪으며 존재의 의의와 올바른 도리와 잃어버린 사랑을 아파하고 있는데,
역모를
통해 광해를 몰아낸 왕은 지존의 자리에 오르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백성과 자기 자식을 볼모로 내세운 다음, 어떻게 하면 자리보전을 할 것인가에
골몰하다니...
나쁜
왕은 죽여야 한다고 울부짖는 이신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다.
진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 백성의 눈에 무엇이 비춰지게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바로 권력인 바. 그 권력을 좇는 왕의 가슴을 겨누는
이신의 칼끝이 부디 날카로웠기를.
소설
속 무책임한 지배세력의 자세도 통탄스럽지만 400여 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이 또한 통탄스럽다는 역사학자 이이화의 뼈 있는 한 마디에
가슴이 찌르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