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붉게 피던 집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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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쓰다듬는 일 [라일락 붉게 피던 집]

 

지금은 대형화되어 버린 만화방과 오락실.

나의 80년대는 만화방과 오락실에 관한 기억으로 가득하다.

 

불온한 학생들의 아지트라며 소위 범생이, 혹은 건전한 학생들은 가기를 꺼렸다는데...믿거나 말거나.

오락실에서 울려나오는 뿅뿅 소리가 얼마나 황홀했으면 그런 곳 다니면 나쁜 언니 혹은 오빠들한테 삥 뜯긴다며 엄포를 놓는 사촌오빠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그곳을 기웃거렸을까.

그러다가 사촌오빠의 눈에 띄어 질질 끌려나오기도 여러 번.

사촌오빠는 거의 오락실에서 살았으면서, 아마 짱도 먹었을 걸...

그래도 오빠의 주무대는 만화방이 아니어서 나는 주로 곰팡내 나는 만화방을 애용했다.

옆집 언니가 만화방에서 빌려왔던 김동화의 만화<아카시아>가 내 첫 만화다. 얼마나 강렬했는지 아직도 제목과 작가를 잊지 못한다.

순정만화를 한창 섭렵하던 그 시절, 시장통 한가운데 나만의 비밀계단을 내려가면 만화책으로 꽉 찬...아마 담배연기도 자욱했겠으나 이상하게도 한산했던 나만의 공간을 만나는 즐거움이 너무도 컸었다.

그 즐거움에 500원, 1000원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학교 파하자마자 내리달았던 추억, 추억들.

다행히 내가 그 즐거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내게서 삥뜯어간 나쁜 언니 오빠들은 없었다. 감사, 또 감사.

 

기억을 되짚어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야식을 먹는 일과 같다.

뭔, 뜬금없는 소리냐고?

야식을 먹고 나면 나른한 포만감에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흡족한 미소를 만면에 띄며 행복해 할 수도,

'내가 왜 먹었을까?' 후회할 정도로 더부룩한 배를 부여잡고 오만상을 찌푸릴 수도 있다.

두 가지 경우의 수를 유발하는 야식먹기처럼,

기억을 되짚는 일도 어떤 때에는 달콤하지만 어떤 때에는 시금털털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좋았던 기억도 누군가에게는 기억하기 싫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나 또한 만화방으로 내리달았던 숨가쁜 행복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가게 일을 돕기 싫어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던, 현실도피처로서의 만화방의 기억도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 떠올린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의 기억은 잘나가는 대중문화평론가 현수빈이 비밀의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된다.

유명한 인터뷰어, 강사로서의 유명세에 힘입어 80년대 얘기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10회 연재분 칼럼을 쓰게 된 현수빈은 어릴 적 살았던 다가구 주택을 소재로 삼기로 한다.

라일락 하우스라 이름붙인 그 집에는 그녀의 다섯 살 무렵부터 여덟 살 초까지의 기억이 스며 있었다.

마침 20년 만에 다시 만난 소꿉친구이자 현재 남자친구인 우돌이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줄 터였다.

안채와 별채로 나뉜 집에는 수빈네 가족과 세 언니들, 과일장수 우돌네 네 가족, 유난히 닮았으며 금실 좋았던 별채 신혼부부, 문간방에서 자취했던 영달이 오빠가 살았고, 가끔 들러 집을 단속하던 집주인 아저씨가 있었다.

 

연탄 아궁이, 석유풍로, 김장 묻은 화단 구덩이.

새록새록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들이 속속 등장하는 가운데 그녀의 칼럼 5회째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은 영달의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이 부분을 읽고 그녀를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 그는 바로 늙은 전직형사 고영두였다.

 

은퇴 후 할 일 없이 넘겨 보던 신문 속에서 과거의 사건이 영두에게 다시 다가와 해결되지 못한 의문을 건드렸다. 무엇을 더 하든 하지 않든 앞으로는 이 여자아이가 결정할 것이다. -21

 

현수빈의 칼럼에서는 쥐 한 마리에 20원 하는 부업에 열중하는 아낙들 , 컬러 TV와 빨간 전화기에 얽힌 추억, 서민 낙찰계의 실상들이 하나 하나 소개되는데 그것들이 알고 보면 영달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해결하기 위한 징검돌이 되어 준다.

형사 고영두의 접근 때문인지, 칼럼이 소개되고 라일락 하우스에 살던 이들과 연락이 닿으면서 그들을 만나는 동안 현수빈은 영달의 죽음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며 사건의 진실에 점차 근접하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남자친구 우돌은 그만 덮어두자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다.

 

역시 추억은 추억으로 덮어 두었을 때에만 아름답게 빛나는 법인가?

마냥 복고풍의 추억담을 꺼내 쓰며 순진하게 과거를 회상하기에는 라일락 하우스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현수빈이 만나는 사람들의 기억은 다들 달랐지만 그들의 말들은 점차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이고 있었고, 거기에는 묻어두었더라면 좋았을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모두가 다 몰랐다면, 알고도 숨겼다면, 알고도 모른 척했다면...그 일은 없었던 일인 거잖아요. 내가 나 자신을 의심해야 했겠죠. "

고맙습니다.

김순자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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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쓰다듬는 일.

더러는 간지러움에 웃음 터지게도 하고, 더러는 아픈 상처를 건드려 쓰라리게 하기도 한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 안에 우글거리며 모여 살던 사람들은 그저 제대로 살아보려고 애썼을 뿐이다.

아이들은 그저 천진난만하게 눈망울을 또록거리며 작은 것들 하나 놓치지 않고 기억에 담았을 뿐이다.

지나온 발자국은 돌아보면 삐뚤빼뚤.

그래도 먼 발치에서 보면 대체로 평탄하게 이어져 온 것 같다.

기억을 꺼내보느냐, 덮어두느냐하는 결정은 스스로의 몫이다.

해마다 라일락을 보면, 어찔한 향기와 함께 라일락 피던 집의 이야기가 피어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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