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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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은 뫼비우스의 띠 [이런 이야기]

 

 

 

 

알렉산드로 바리코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단순한 기쁨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가 들려주는 ‘이런 이야기’는 역시나 감기는 두 눈에 억지로 힘을 주고 읽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 울티모 파르리라는 인물을 파악하자마자 단숨에 매혹되어버렸기 때문에 책장은 퍼얼럭 퍼얼럭 잠시 적응의 시간을 보내며 넘어가다가 곧장 팔락팔락으로 속도감을 더하며 끝을 향해 달렸다.

 

 

 

 

 

울티모의 인생은 수학 기호 무한대 ∞, 혹은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켰다.

그가 관심을 가진 자동차와 길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인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영원히 돌고 도는 궤도를 따라 울티모는 아직도 달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분명 쓸쓸한 그의 끝이 명시되어 있음에도 ‘길’을 꿈꾸던 아이의 가슴 벅찬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며 인생 중반을 맞이하여 잠시 언덕에 기대어 쉬고 있는 나에게 ‘어서 일어나서 나를 따라와 봐.’라고 말하는 듯이 저 앞에서 손짓을 하고 있었다.

요즘 한창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GD(지드래곤)이 모 광고에서 “Follw Follow Me" 하는 것을 들어본 적 있는가? 강렬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면 피리 부는 사나이에 홀린 것마냥 내 눈길이 저절로 그를 좇게 되는 것처럼... [이런 이야기] 아니, 울티모의 이야기는 내 온 정신을 쭉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에도 울티모의 생애는 그가 만든 서킷을 따라 쌩하는 소리를 내며 달리고 또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본 것도 아닌데, 작가가 음유시인처럼 읊어댔던 절묘한 리듬에 도취되어 어느새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나.

눈을 깜빡이자 촤라락 펼쳐지는 필름들처럼 등장인물들의 삶이 지나간다.

 

울티모는 리베로 파르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두 세 번 죽었다가 살아났고, 그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울티모 같은 아이를 보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금빛 그늘이 어려 있지...”

 

화려한 전채요리 격으로, 1903년 224대의 여왕 같은 자동차들이 베르사유 정원에서 자동차 경주를 시작하는 장면에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

 

이야기는 다양한 맛을 조금씩 보여주며 그 풍부함을 더해간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이의 앞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되 아이가 길을 잃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하고 함께 걷는 것이 땅에 쓰여 있는 것처럼 의심할 바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40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갈 줄 아는 법을 아버지로부터 배운 그 때부터 울티모의 이야기는 뒤돌아보는 법 없이 앞으로 쭈욱 이어진다.

어느 날 언덕에서 도로의 굽이들을 따라 내려오는 먼지구름과 함께 금속으로 된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생애 처음으로 울티모가 본 자동차에서 담브로시오 백작이 내린다. 그의 등장으로 자동차를 독학하고 언젠가 정비사가 될 거라는 꿈을 꾸고만 있던 리베로 파르리는 자동차 경주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된다.

아버지가 심어준 자동차에 대한 관심은 그에게 있어 선물과 같은 것이었고 울티모는 머릿속에 길들을 품은 채로 자랐다. 무엇을 보든 길로, 자동차가 달리는 길로 보였고, 엔진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고, 어떤 형태의 선을 보더라도 길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 길 가운데 하나가 리베로 파르리를 좌절시킨 날, 삶 자체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울티모는 카포레토 전쟁에 참가했다. 그의 길에 대한 탐구는 여기서 끝나는가 싶었지만, 다시 자동차에 올라타게 되면서 길은 계속 이어졌고 몇 개월간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실은 트럭을 운전하면서 만나게 된 엘리자베타를 마음에 품게 된다.

훗날 울티모는 엘리자베타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 여자는 하나의 길과 같았어요. 생뚱맞은 굽이가 자꾸자꾸 나오는 길, 돌아올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광막한 벌판으로 내닫는 길,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달리고 또 달리는 길이었죠.(...)

가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가볼 만한 길, 그녀는 그런 길들 가운데 하나였어요.-405

 

수시로 바뀌는 시점에서는 여러 인물들이 울티모를 공통 분모로 한 채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담브로시오 백작과 리베로 파르리, 그리고 플로랑스로 이어지는 울티모 부모 세대의 이야기.

세상을 뒤로 한 채 잠시 몸을 의지했던 전쟁터에서 만난 친구 카비리아와 그 아버지인 수학 교수의 이야기

울티모를 기억에 담고 평생에 걸쳐 그를 회상하곤 했던 엘리자베타 이야기 등..

 

 그야말로 한 올 한 올 생명력을 가진 채 살아 숨쉬고 있는 ...아마 따뜻한 체온마저도 느껴질 듯한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다.

 

자신의 길을 달린 가슴 벅찬 인생이 담긴 울티모의 이야기는 얼핏 아름다웠고, 열정적이었으며 안타까웠고 끝내 조용히 한숨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중간중간 인용하고 싶은 구절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음악과 시가 어우러진 문장이라고나 할까.

아버지의 인도가 울티모에게 선물이었듯이, 작가의 [이런 이야기]도 내게는 선물이 되어 주었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을 뿐이었는데, 놀랍게도 풍부한 인생의 지혜가 가득한, 선물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굽잇길이 처음 출발했던 곧은 길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곡선이 그토록 부드럽게 직선 속으로 녹아드는 건 삶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재규어는 다시 직선 구간을 통과하여 U자 모양의 굽이로 나아갔다. 울티모의 보물 상자에 빨간색으로 써놓았던 U자를 닮은 굽이, 참담한 불행을 딛고 위안을 느끼게 하는 굽이로.-450

 

울티모는 악연의 고리를 끊을 때 ‘기억에서 지워버리기’를 택했고, 그래서 그와 유대를 맺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씩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럼에도 그의 ‘금빛 그늘’이 가진 힘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싶어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이었지만 그가 엘리자베타에게 남긴 서킷 그림으로 그녀는 그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리하여 울티모의 인생은 계속 계속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 혹은 무한대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가 걸어간 길은 굽이졌으나 곧은 길 위에 있었음을...나도 그의 금빛 그늘을 따라 길 위로 걸어가려 육중하게 늘어져 있던 몸을 곧추세운다.

 

더 이상 “세상은 어떤 곳이에요?” 하고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물어볼 수 없을 만큼의 나이를 먹어버렸다. 일찌감치 꿈을 찾아 자신의 운명을 끝까지 밀고 나간 울티모는 뒷모습만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무엇을 꿈꾸니? 너는 네 몫의 삶을 살고 있니?”

어떻게 자랄지 모르는 꽃나무의 시절을 지나온 지 한참 되어 “꿈”이라는 말이 주는 신비함을 잊고 살았다.

누구나 몇 굽이 서리서리 품고 있을 법한 삶의 고단함을, 빨간 꽃 무심히 툭 떨어뜨리는 동백나무 아래엔가, 청춘의 반짝임을 머금은 느릅나무 아래엔가, 어두운 과거 잊고 살자고 힘겹게 한 꺼풀씩 벗어버리는 배롱나무 아래엔가 묻어버리고 살았다.

이제 울티모가 던져 준 질문 앞에서, 온 생애의 절반쯤 지나온 것 같은 삶을 꺼내어 펼쳐본다. 나, 참. 다시 꺼내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짚어 볼 날도 오는구나, 싶다.

어지러운 가정사는 아직도 두꺼운 보자기로 푹 눌러 덮어놓고만 싶고, IMF로 허우적거리던 시절도 가히 떠올리기에 좋은 시절은 아니며, 그럭저럭 가정을 이루어 두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의 삶은 뚜렷한 목표도 없이 그저 흘러왔구나, 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초기 자동차의 엔진처럼 내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나직히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직 늦은 건 아니라고. 길은 걸으라고 있는 것이라고...

“나를 따라와, Follow, Follow me" 하고 나를 이끌어 주는 울티모도 여전히 희미하지만 존재감 있는 모습으로 기다려 주고 있다.

이젠 내가 나의 길을 뚜렷이 보고 걸어가는 것만이 남았나.

이제야 알겠다. 길은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 언제든 열려 있다는 것을.

곡선 또한 직선으로 녹아드는 것이 삶이기에 울티모의 뒷모습이 많은 것을 보듬어 안을 수 있었다는 것을.

거창한 꿈, 남에게 보이기 위해 부풀려진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겠다.

착실히 한 걸음씩 걸어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는 길을 걸을 것이다.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은 일찌감치 깨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돌고 도는 길 위를 걸어가고 있을 것만 같은 울티모의 발걸음에서 삶의 비의를, 희망의 흔적을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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