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뱀이 보인다면? [구렁이 족보]
내 눈에만 뱀이 보인다면...그건 재앙이 아닐 것인가.
미끌미끌하고 축축할 것만 같은 피부.
길다랗고 길다란 몸이 똬리를 틀고 있다가 쭉 펼친 다음 구불구불, 꿈틀꿈틀 기어가는 모양새.
쉿쉿거리며 날름거리는 기분 나쁜 혓바닥.
뱀에 대한 대부분의 느낌은 "으악~ 징그러워"이다.
그런 뱀이 가족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데, 오직 내 눈에만 보인다면,,,나는 심각하게 내 멘탈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이들의 환상 세계에서는 허용된다.
얼마든지.
좋은 쪽으로^^
반들반들 유리알 같은~ 이 아니라, 번들번들.
매끈매끈이 아니라 미끌미끌 축축
밝고 예쁜 이미지보다는 어둡고 사악한 이미지의 말들을 갖다 붙였을 때 더 어울리는 특이한 동물, 뱀.
그 뱀이 한 소년의 눈에 보였고, 그뿐만 아니라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심지어 그 말을 소년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악몽이지!! 라고 한 마디로 딱 잘라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새끼들을 잃고 정신을 놓은 어미 구렁이가 벌판 한가운데 있다가 말똥가리(아마도 맹금류의 일종인듯. 나는 ...해삼, 말미잘 같은 바다
생물의 이름인 줄 알고 있었다^^)의 습격을 받을 뻔했는데, 소년이 달그락 소리를 내는 바람에 몸을 피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어미 구렁이는 은혜를 갚으려는 것인지 어느 틈엔가 소년의 집에 따라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자신의 눈에만 구렁이가 보인다는 사실을 안 소년은 처음엔 혼비백산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사태를 해결해 나가려고 지혜를 짜낸다.
구렁이의 요구 조건은 구렁이의 족보를 소년의 언어로 써서 남겨달라는 것.
"구렁이가 이 땅에 살았다는 기록만이라도 남기는 것"이 구렁이가 바라는 것의 전부였다.
구렁이에게 스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소년은 어서 스스를 내보내기 위해 구렁이 족보 만들기에 돌입하고, 그 첫 단계로 도서관에 찾아가 관련
책을 찾아본다.
그리고 스스에게 옛 이야기를 듣기도 하면서 내용을 충실히 담아나간다.
"반은 구렁이, 반은 인간의 모습을 한 어른이 계셨지. 그 분은 낮과 밤은 물론이고, 계절을 뜻대로 조종할 수 있었어. 그 분이 눈을 뜨면
낮이고 감으면 밤이 찾아왔지. 그 분이 입김을 내쉬면 추운 겨울이 오고, 들이쉬면 여름이 왔단다. 그런데 영겁의 시간이 흐르고 그 신통력이 점점
약해졌어. "-54
엄마가 벗어놓은 알록달록한 옷들을 뱀 허물이라 생각하고 이 집에 자기 아닌 다른 뱀이 있다며 온 집을 헤집어 놓기도 하는 스스 때문에
소년은 맘 놓을 새가 없었지만 어느새 변온 동물이라 체온이 쉽게 변하는 스스를 걱정해줄 정도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소년의 족보 쓰기는 계속되었다.
"백구렁이님은 인간의 수명이 적힌 적패지를 꿀꺽 삼켰단다. 지혜로운 그 분 덕에 구렁이들은 아홉 번 죽고도 아홉 번을 살아남게 되었지.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니."-79
이무기 신화를 차용한 듯, 구렁이들의 소원은 용이 되는 것이고, 스스 또한 용이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허물을 벗으며 변신의
과정을 기다리고 있는 스스가 무엇으로 변신하고 싶어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구렁이 족보를 써내려가는 동안 구렁이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들으며 구렁이에 대해서는 많이 알게 됐지만 정작 스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
뭔가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 순간에 스스는 사라져 버렸다.
이상하게도 집 안에서 큰 구멍을 발견한 후 그것을 막아놓자 마자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소년은 스스를 그리워하며 "구렁이 족보"를 마무리 한다.
구렁이 스스와 소년의 기묘한 동거를 읽는 동안, 뱀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어들었다.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 등에서 항상 나쁜 편에 위치했던 구렁이를 거꾸로 "구렁이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게도 되었고, 저도
모르게 스스의 이야기에 빠져 들어서 과연 스스는 무엇으로 변신하고 싶었을까...하는 궁금증을 품게도 되었다.
소년이 스스에게 보여주지 못한 채 완성되어버린 구렁이 족보에는 스스의 놀라운 변신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스스가 무엇으로 변신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구렁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고, 으스스하지만 특별한 뱀과의 동거를 꿈꿀 수 있게 하는 멋진 이야기.
구렁이를 무서워하는 여자 아이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아마 책이 끝날 무렵에는 아이가 "우리 집에도 구렁이 스스가 찾아왔으면..."하고 조용히 빌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