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내면을 가진 여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길 [라스트 런어웨이]

금강석
같은 내면의 그녀, 아너 브라이트.
그녀의
길은 영국의 완성도 높은 베들레헴의 별 모양 퀼트에서 시작해 미국의 화려한 아플리케를 만나고 곧바로 흑인의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퀼트로 연결되는
길이다.
죽은
언니의 드레스에서 잘라낸 갈색 천, 모자 상점 주인 벨의 노란 천, 애덤 콕스의 포목점에서 일하다 얻은 아이보리색에 마름모꼴 무늬의 자투리 천,
흑인 여자 버지니의 붉은 두건 한 조각. 등등 그녀가 스쳐가며 만난 사람들에게서 얻은 천들은 아너의 인생을 담은 퀼트로 다시 탄생하게 될
것이다. 색색의 조각천이 기억하는 삶의 한 귀퉁이 이야기들은 아너의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그녀의 손은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조각천들을 퀼팅하며 진정한 가족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라스트
런어웨이]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결은 여러 갈래다. 인생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만든 것 같은 퀼트 이야기, 미국의 노예제도로 대변되는 신생국
미국의 명암, 그리고 아너 자신의 사랑과 가족을 모두 담고 있는데도 전혀 버겁지 않고 오히려 이야기가 짧다고 여겨질 정도다. 1850년대 미국의
이야기가 사실감 있게 펼쳐지며 영국에서 퀘이커 교도로 자라 엄격한 성정을 지닌 내성적인 아가씨가 미국에 정착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여러 가지들을
명료하면서도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무심한 듯 간결한 문체와 군데군데 이어지는 아너의 편지 때문에 책의 첫머리에서 덥석 잡았던 아너의 손을
놓을 수 없었고, 계속해서 그녀와 걸음을 함께 옮기게 되었다. 그녀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촘촘하고 비뚤어지지 않은 그녀의 바느질 솜씨를
닮아서 섬세하고 단정하게 꿰매어진 퀼트 이불 위를 함께 거니는 듯한 황홀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후욱~
참았던 숨을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에서야 내쉴 수 있었을 정도로 깊이 몰입해서 읽었던 책이었다. 이토록 강렬한 몰입의
경험이라니...
퀘이커
교도인 아너처럼 얌전한 보닛을 쓰지도, 기다랗게 끌리는 드레스를 입은 것도, 혼수로 이불을 일고여덟 채는 준비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옥수수밭에
서서 ‘내면의 빛’을 가진 도망 노예들이 기다란 옥수수 줄기를 사각거리며 헤치고 오는 건 아닌지, 어디를 다쳐 피를 흘리며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왜 내가 이렇게 신경이 곤두선 채로 있어야 하는가 말이다. 어째서 항상 아너의 주위를 맴도는 도노반의 어딘가 상처 입은
듯한 어둡고 삐딱한 눈빛을 따갑게 느껴야 하는가 말이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탄생시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말괄량이 여전사 스칼렛 오하라 같은 독특한 캐릭터와는 정반대의 인물.
한마디로 요조숙녀랄 수 있는 영국인 아너 브라이트의 삶을 잠깐 엿보자.
언니
그레이스가 영국에서 알고 지내던 애덤 콕스와의 결혼을 위해 미국 오하이오 주로 간다고 했을 때, 마침 연인 새뮤얼과의 실연으로 상처를 입었던
아너는 언니와 함께 미국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당찬 새출발을 위해서였는데, 친구들 친척들로부터 선물받은 퀼트 이불에 과거의 흔적들을 꿰매고
이어붙인 채 ‘어드벤처러’라는 배에 몸을 실었지만, 미국 땅을 밟기도 전에 황열병으로 언니 그레이스가 죽고 만다. 낯선 미국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녀는 벨의 모자 상점에서 언니의 약혼자였던 애덤 콕스가 데리러 올 때까지 머무는 동안 앞으로 많이 의지하게 될 벨과 함께 벨의 모자
상점에서 바느질 솜씨를 뽐낸다. 한편, 배에서 내려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도노반이라는 노예 사냥꾼으로부터 혹시 노예를 숨겨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고, 도노반은 마차를 뒤지기 시작하는데, 도노반은 어머니와의 추억을 들먹이며 이불에 새겨진 퀼트에서 ‘베들레헴의 별’문양에 관심을
둔다. 억세고 사나운 남자가 이불의 문양에 관심을 보이며 갈색의 차가운 눈빛을 누그러뜨리니 내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이다. 이거..시작부터
로맨스야? 어쩜~ 이 둘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끌리는 거야?
그의
표정에서 신중함이 사라지고, 강렬한 관심이 드러나 있었다. 두려움,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아너의 속이 메슥거렸다. 흥분. 너무나
부적절한 느낌이라 아너는 얼굴을 붉혔다. 도너번은 미소를 지었다. -50
사실
도너번은 아너가 신세 졌던 모자 상점 벨의 남동생이었다. 그러나 도노반에 대한 평판이 안 좋았고, 벨 또한 ‘오하이오 최악의 인간’이라며 고개를
내젓는 이였다. 도노반의 관심을 받으며 떨림, 흥분을 느끼지만 낯선 미국에서의 울렁증이라 넘겨버린 아너는 급변하는 미국에서의 생활 때문에
정신없이 상황에 휩쓸리다 보니 어느새 잭 헤이메이커라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
와서 알게 된 실제의 ‘노예제도’를 접한 아너는 흑인 노예들도 ‘내면의 빛’을 지닌 존재임을 인정하고 노예들이 탈출하는 길목에서 도우미 역할을
하게 된다. 노예들이 지하철도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탈출을 돕는 경로가 벨-아너-리드 부인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너의 남편인 잭을 비롯한 헤이메이커 집안 사람들은 현실과 타협하여 노예들을 외면하고 있었고 아너에게도 더 이상 그들을 돕지 말 것을 강요하자
아너는 오로지 ‘침묵’으로 저항한다. 결국 만삭의 몸으로 헤이메이커 집안에서 탈출한 그녀는 딸들을 데리고 자유를 향해 간다는 흑인 버지니를
끝까지 도와주고 벨의 집에서 딸 컴포트를 출산한다. 언제고 꼭 다시 연결되리라는 희망을 안고 책을 읽어나갔는데, 상황은 아너와 도노반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새
삶을 사시면 좋겠어요. ”
“그럼
뭐가 달라지나?”-368
아~
인생극장에서처럼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을 때 두 가지 경우에서 일어날 일을 모두 보고 싶었다. 아너와 도노반이 이루어졌더라면...도노반이 노예
사냥꾼을 접고 아너와 함께라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겠다고 고백을 했을 때, “YES". 라고 답하지 않았던 것이 두고두고 맘에 걸렸다.
그랬더라면...그랬더라면...
조그맣고
조용한 여인 아너의 소리없는 외침은 비록 약했을지언정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만들었다. 섬세한 퀼팅의 한 땀 한
땀처럼 그녀가 걸었던 길은 아름다운 무늬를 아로새기며 소신 있는 원칙주의자의 탄탄한 가정을 만들어내었다. 길바닥에 함부로 침을 뱉는 미국인,
맹렬하게 흥정하는 미국인, 대충대충 화려한 문양을 만들어내고 여럿이서 손을 모아 이불 한 채를 뚝딱 만들어내는 미국인...아너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결국 밝고 풍부하고 즉흥적인 리드 부인의 자유분방한 퀼트처럼 조화를 이루는 법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갓 따낸 옥수수의 달큰한 맛과
끈끈한 메이플 시럽의 맛에도 길들여졌으며 자신의 원칙을 부드럽게 관철시키는 법도 찾아냈다. 작지만 강한 여성 아너의 작고 가녀린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다.
한우리 북카페 서평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