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혁명가, 나사렛 예수를 만나다 [젤롯]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가거나 여행을 떠나 보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파노라마로 이어진 연속의 풍경들을 보게 되는데 그 곳에서 꼭 만나게
되는 표식이 있다. (뭐, 굳이 떠나지 않더라도 우리 아파트 내에서 고개만 돌려도 벌써 몇 개가 보인다. )
바로
십자가이다. 낮에는 그런 대로 건물 틈에 가려져 있거나 세상을 공평히 비추는 백색의 햇빛 아래 묻혀 있기 십상이지만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이나
흑색의 어둠이 지배하는 밤이 되면 어김없이 붉은 빛을 발하는 열십자의 표식. 특히 어두운 밤에 휘 둘러보면 검은 색을 배경으로 봉긋이 떠올라
있는 붉은 네온의 빛은 그로테스크한 공동묘지를 방불케 하며 갑자기 소름이 오소소 돋게 만든다.
신을
섬기는 성전임을 알리는 십자가가 이 나라 도시며 시골 할 것 없이 구석구석을 잠식해 들어가 있는 것을 집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 보면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경주의 양동민속마을로 가족 나들이를 떠났다고 하자. 시대적 배경이 과거인 드라마나 영화의 세트에서 한 번씩 현대적 감각의
건물이나 간판들이 보이면 옥의 티라고 짚어내듯이, 민속마을의 정겨움이나 시간을 거슬러오르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찾아간 그 곳에서 십자가를
발견한 순간 왠지 모르게 김이 팍 새버리는 느낌적 느낌. 아는 이는 아실 터~~.
눈만
돌리면 시야에 걸리는 거대한 십자가의 공동묘지 속에 우리가 사는 아파트가 덩그러니 들어서 있다고 생각하면, 참, 굳이 발버둥치며 크고 비싸고
좋은 곳을 골라 집을 마련해 본들 무덤 한가운데일 뿐이라는...어쩔 수 없는 허무함의 촉수들이 나를 발끝에서부터 나를 감싸돌아 올라온다.
무신론자이기에
성전의 표시에다 대고 이런 날려차기를 함부로 해대는지도 모르겠다.
절박함이
없어서 절대자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훗날,
정말로 내가 세상에 기댈 데 없고 붙잡을 끈 하나 없는 혼자라는 것을 느낄 때, 영혼의 구원을 위해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날을 맞이할지도
모르겠지만...전지전능한 예수!, 우리를 구원할 예수!라는 등의 선전구호는 아직 내 귀에 와서 제대로 꽂히지 않고 빠른 속도로 귓등으로 사라지고
만다.
“나사렛
예수”는 역사적 인물에 중점을 둔 이름이고, “그리스도 예수”는 신앙의 대상으로 받드는 이름이다. [젤롯]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었다면, 몇 장 읽지 않고 미련없이 이 책을 덮어버렸을 것이다.
교회에
대한 알 수 없는 반감만이 남아 있는 나에게도 어린 시절, 교회의 지하 예배당에서 또래 아이들과 기다란 벤치에 주루룩 앉아 손뼉을 치며 성가
합창을 해대던 기억이 남아 있다. 어떻게 그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사랑하는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붉은 피를 흘리시면서 사흘 만에 돌아가셨네”
뜻도
모른 채 흥얼거리던 이 노래가 아직도 리듬, 박자, 가락 하나 잊히지 않고 되살아난다. (역시 조기교육의 힘이란, 어린 세포들의 생기왕성한
활동이란~~)
이
노래가 갑자기 생각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나사렛 예수”로서의 삶을 짧고 강렬하게 표현한 가사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로 예수를 연구하는 갈래도 여럿이어서 윤리적 교사, 사회 개혁가, 정치적 혁명가, 심지어 마술사나 퇴마사로 보는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정치적 의식이 투철한 유대 혁명가’로서의 예수에 보다 집중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보도 가운데 확실한 역사적 사건은 두 가지.
첫째,
예수가 기원후 1세기 전반에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민중 운동을 일으킨 유대인이었다는 사실.
둘째,
예수를 로마 당국이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다는 사실.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의 예수, 정치의식이 투철한 유대 혁명가로서의 예수. 그는 2000년 전 갈릴리 시골 지역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아다닌 인물이며,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메시아 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결국,
처형당했으니 실패로 끝난 그의 활동으로 예수는 잊혀졌는가? 오늘날 수많은 성전과 ‘십자가의 무덤’을 우리나라, 아니 전세계에 퍼뜨린 “그리스도
예수”로서의 인물상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이
책은 혁명가 예수를 말함과 동시에, 이 땅 위에 하느님의 통치를 이루려는 예수의 운동이 실패한 뒤에, 그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활동과 정체 뿐 아니라 유대교 메시아의 본성과 정의를 어떻게 재해석했는지에 대해 다룬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었는데, 예수의 추종자들이 만든 세력들과 예수 제자들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헬라파’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길거리에 모여 성가를 부른다거나 자신의 놀라운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포교활동에 나선 사람들이 ‘회개하십시오’라고 울부짖으며 집집마다 거리마다
다니는 행동을 볼 때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어쩌면 저 모습이 내 미래에 있을 한 장면을 아닐까 싶어 지레 겁을 먹으면서 때때로
정신줄을 바짝 조여매는 계기로 삼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나사렛 예수의 간략한 일생이나마 혁명가로 소개된 글을 접하고 보니 예수에 대한 막연한 반감, 뚜렷한 이유를 제시하지도 못한
채 눈살만 찌푸렸던 그 반감-아마도 광신도들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인해 파생된 거부감이지 않을까-이 약간은 사그라 들게 되었다.
어쨌거나
예수는 실존했던 인물이며, 나름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목숨까지 바치며 온 생을 다해 전력투구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한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마가복음이니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 계시록 등 머리가 다 아파지려고 하는 수많은 복음서들에 얼마만큼의 역사적 진실이 들어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고, 예수 사후의 “신앙화”와 관련된 작업은 오직 신앙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는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