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내게 소설을 묻는다면 - 대학교수, 작가, 예술인 50인이 선정한 최고의 소설
장성수.문순태.김춘섭.송하춘.함한희.이남호.정도상 외 43명 지음 / 소라주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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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삶을 이해하는 거울로서의 소설 읽기 [만약 당신이 내게 소설을 묻는다면]

 

이제 곧 대학교수로서 정년을 맞이하는 장성수 교수의 새로운 출발, 또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글을 보냈다 한다.

[만약 당신이 내게 소설을 묻는다면]은 소설과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같이하는 대학교수, 작가, 예술인 등 50인이 각자가 선정한 최고의 소설에 대해 한 꼭지씩 글을 써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내게 소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정도가 공통된 주제라고 했다.

실로 50인이 꼽은 최고의 소설은 각기 달랐고, (소설가 문순태와 전북대 국문과 교수 윤석민이 [태백산맥]을 각기 다른 관점으로 꼽은 것만이 겹칠 뿐이다.) 다양한 시각에서 각각의 소설을 훑어내고 있었다.

문학사적 가치, 당대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의미,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관계, 작품의 내적구조, 한 편의 작품이 자신의 삶과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 등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뉘어져 있지만, ‘소설이란 무엇인가?’가 던지는 의미가 워낙 커다랗다 보니 이렇게 묶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하겠다.

 

소설에서 작가를 발견했다는 이들은 김승옥의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김원일의 [불의 제전], 홍석중의 [황진이], 최명희의 [혼불],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등을 꼽았다. 나처럼 그저 한가한 독서를 즐기는 이들이 아니라 전문가적인 관점에서 ‘소설’을 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의 독법은 비범했다. 내가 분명 다 읽은 책들인데도, 미처 신경쓰지 못하고 잡아내지 못했던 특별한 점을 그들은 콕콕 집어내었고, 그들의 관점에서 설명된 소설을 보니 내가 읽었던 것이 과연 같은 책 맞나 싶을 정도여서, 소설에 대한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되었고 더하여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문득, 나는 소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있었나...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랬더니 부끄럽게도, 한국단편, 고전들은 교과서에 실린 정형화된 작품들과 작가들만 남부럽지 않게 읽어대었었고, 그 결과 맹꽁맹꽁 맹꽁이 소리만 답습하는 형편없는 소설 독자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김유정의 대표작은 당연히 [동백꽃]이라고 알고 있었으며, 그 동백꽃조차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에 나오는 동백꽃이라 생각했었는데...사실 김유정의 [동백꽃]에 나오는 것은 생강나무를 강원도에서 부르는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뜨허억~ 국어 선생님. 도대체 저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신 건가요...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김유정의 [만무방]이야말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 하다며, ‘만방으로 돌아봐도 생활의 방도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 [만무방]을꼽아준 우한용 교수 때문에 한국 단편 소설을 쉽고 만만하게 보았던 내 자신에게 그만 혀를 쯧쯧 차고 말았다.

 

충실한 학생으로서의 시기를 벗어나 스스로 선택해서 소설 읽기를 할 수 있는 때가 되었을 때는 무엇이 그리도 갈급했던지 길고 긴 장편들을 골라 읽었었다.

김용의 [영웅문]에서부터 [대망], 최명희의 [혼불], 박경리의 [토지], 뜻도 모른 채 유장한 글에 이끌려 읽기 시작한 [태백산맥], [장길산]...그야말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그저 글자 속에서 헤엄치던 시기 였던 것 같다.

충분한 양이 채워졌다 싶은 후에는 겉멋이 들었는지 이상문학상 수상작 등의 작품을 읽다가 그 작품 속에서 몇 몇 작가를 골라 읽기 시작했는데...그것이 출산과 동시에 무로 돌아가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 독서를 멀리하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는 아동도서에 탐닉했고, 차츰 여유가 생긴다 싶자 도서관으로 나들이를 가면서는 서가 한 켠을 꽉 채운 추리소설에 심취했다.

아~ 이리 저리 두서 없고 심지도 없는 책읽기 도중에는 도저히 ‘소설이란 무엇인가?’ 따위 들여다 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저 눈으로 읽고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영양가 없는 독서를 해오던 내가 이 책을 읽다가 소설가 김병용이 [설국]을 읽은 대목에서 흠칫~하고 말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기차가 신호소에 멈췄다.

 

설국의 첫 세 문장이 일상적인 삶의 경험을 단순히 기술해 놓은 것으로만 보였다는 그. 어떤 소설을 나이나 처지에 맞춰 관심 대목만 집중적으로 읽는 ‘덜 읽기(under-reading)의 전형을 보였던 그는 2004년 어느 겨울 아타미 행 야간 기차에 앉아 있다가 틈을 채우는 일, 언어도단을 넘어서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한다. [설국]의 첫 세 문장을 되뇌다가 갑자기, 무언가 녹아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모호함으로 꽝꽝 얼어붙어 있던 그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에 다른 말이 스며드는 느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설국이었다. 별다른 삶의 지향 없이 떠도는 한 사내가 있다. 그가 자신을 둘러싼 낯익은 환경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는 지금 어디로, 왜 가는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면서...질문의 깊이만큼 캄캄한 터널 속으로 쑥-빨려 들어간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그리고 갑자기 환해진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기차는 갑자기 낯설기 짝이 없는, 환한 눈의 나라로 들어선 것이다 섬광처럼 눈빛이 여행자의 눈을 찌른다. 기차가 신호소에 멈췄다. 지금 여기, 갑자기 낯선 곳에...소설의 공간, 혹은 시마무라가 머물러야 할 ‘삶의 자리’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달려오던 기차는 여기, 잠시, 멈춘다. 기차는 곧, 다시, 떠날 것이다. 서둘러 내려야 할 승객이 있다. 나, 내가 내릴 차례다...-173

 

내가 통과하는 삶을 이해하는 거울로서 함께 하는 작품으로 [설국]이라는 소설을 꼽은 김병용의 경험이 무지 부러웠다. 나도 소설을 읽는다면 이런 경험 한 번쯤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바람이 생겼다. 앞으로 내게 꼭 맞는 그 광경을 보여 줄 거울같은 작품을 언제 만나볼 수 있을지 기대하면서 책을 읽게 될 것 같다. 50인이 보여 준 소설의 독법에서 단 하나. 내게 영감을 주는 독법을 드디어 찾았다.

멍청하게 눈으로만 좇는 시간 죽이기의 독서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 건졌으니 이 책은 유익한 독서의 예로 남을 것이다.

각자 50인의 독법에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하나쯤은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소설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생각해 볼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독서 하는 많은 이들에게 독서의 의미를 정립할 수 있게 해 주는 책으로 꼭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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