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김정남 지음 / 작가정신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래도 살아가는 비루한 인간 [여행의 기술]

 

“지금 어딘데?”

“7번 국도”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받는다.

“여행 중이야? 겸이도 같이?”-64

 

아버지와 아들은 7번 국도 위로 여행 중이다. 전화를 건 그녀는 아버지와 아들의 아내 혹은 어머니가 아니다. “송희”라는 여자. 남자 주인공 승호의 동창생이자 내연녀.

뜬금없는 여행길의 기술(記述)에서 아버지와 아들 외에 나란히 서 있어야 할 엄마의 존재가 비어 있고, 그 부재를 대신 채우고 있는 사람이 내연녀라니...뭔가 잘못되었다.

 

음료수 사 주세요. 여기서 어떻게 사? 조금만 기다려. 왜요? 왜요? 음료수 사주세요. 저기 편의점 있어요. 음료수, 음료수, 왜 안 돼요? 여기서 뛰어내릴래요, 뛰어내릴래요, 겸아, 그만하자. 조금만 기다려. 왜요? 왜요? 왜요? 왜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조차 정상적이지 않다. 신경질적이고, 맥락이 닿지 않는 아이와의 대화. 참 진이 빠지겠구나. 힘들겠구나...

 

승호는 자폐아인 아들과 함께 자살 여행을 떠난다. 삶에 지치고 더 이상 위안을 얻지 못한 자들이 선택하는 자살 여행이란 이런 모습이겠구나가 눈에 선하다.

길 위에서 승호는 시시때때로 자신의 지나온 삶을 마주 대하게 된다.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한 승호는 시간강사가 되어 서울, 경기, 강원 지역의 대학을 돌아다닌다. 문예지로 버젓이 등단을 한 작가이지만 생활에 쫓겨 글쓰기는 먼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버렸고, 어렵게 교수가 되었지만 , 실제로는 연봉 이천사백만원밖에 되지 않는 무늬만 교수.

승호가 대학원 시절 학원에서 만난 수학 강사였던 아내 역시 일찍 부모를 잃고, 언니와 살아왔는데 서로를 보듬어주리란 희망을 안고 시작한 결혼 생활에서 얻은 것은 자폐아인 아들 겸이 뿐. 생활비, 아이 병원비, 약값, 교육비를 모두 카드 돌려막기를 해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여 이년여만에 사천만 원의 연체금이 칠천만원이 되는 기막힌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 아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갔고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대학을 졸업했고 가정이 있고 직업이 있고, 자식까지 두었는데도 승호의 삶은 점점 나락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급기야는 7번 국도 위에서 생을 마감할 결심을 하고 자살 여행까지 떠나야 했을 정도로 이렇게까지 삶의 희망이 없는 상태로 오게 된 것은...

승호는 거슬러 올라가 본다.

속초에서 제대로 정착해 살던 아버지가 단골 주물럭집 주인 여자와 바람을 피우다 여자의 남편에게 살해당한 때부터였나?

포목점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어머니가 화재로 사망하면서였나?

하나 남은 누나는 영어 선생에게 시집 갔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는 몸이라 하여 구박을 받았는데, 매형은 휴거론에 심취하여 변사체로 발견되었고...이후 분식집을 운영하다 이혼남과 재혼을 해서도 여전히 불쌍한 누나...

주변에 득시글한 불행의 인자들이 승호에게 전파된 것인지...승호 자신도 가정에 소홀해지기 시작하면서 아내인 명옥이 “아이와 함께 피를 토하는 시간”에 송희라는 옛 추억의 여인을 만나 불륜 관계에 빠져든다.

 

승호는 이렇게 무너져 버리고 마는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리는 스스로를 쓸어담지 못한채, 아내를 원망하고, 죽어가는 아내와의 마지막 통화에서조차 아내에게 험한 말을 마구 쏟아내며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승호. 아무 것도 자신에게서 구하려 하지 않고 바깥에 “죄”를 물으려 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식당 어디를 가든 우리는 다정한 부자로 보일 수 있다, 보일 것이다, 보여야 한다.

 

죽기를 각오한 마당에 무엇이 그리 신경쓰여서 남의 눈을 의식하는가.

못났다. 비루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그는 조금이라도 반성의 기미를 보일 것인가...기대하며 책장을 넘기지만, 승호는 끝까지 못났다. 그리고 꾸역꾸역 살아가게 될 것 같다.

그렇지만, 나의 모습과 하등 다를 것 없는 못난 그의 모습이라 감히 손가락질하지 못하겠다. 만약 나였더라도, 지금의 학벌 사회에서 평균에 조금 못 미치는 아이를 키우면서, 생활고에 시달린다면 별반 나은 선택을 했을 것 같지 않기에...가슴 답답함을 부여잡고, 책장을 덮었다.

답답하고 어두워 어디 하나 시원한 구석이 없는 책읽기 였지만, 약간의 반짝임을 가지고 있는 내 삶을 구태여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현재에 조금은 만족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