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강의 [노랑무늬 영원]

 

이 소설집은 여러 인생들을 보여 주고 있는 단막극이라서인지 내가 기대하던 드라마의 초반부에 꼭 있어왔던 “설렘”의 코드가 없다.

중반과 후반으로 그냥 치닫는다. 칼로 스-윽 베어진 각자의 인생 단면에서 그간의 사연들이 스르륵 빠져나온다. 쌓이고 쌓인 감정의 다발들이 꾸역꾸역 비어져 나온다.

그 물결에 손을 얹으면 그들의 삶에 같이 몸을 싣게 되고 책을 읽는 잠시 동안 그들의 인생을 함께 호흡하게 된다. 그들은 무언가로부터 상처 입었고 회복하는 중이다.

TV 드라마에서 보여 지는 반짝반짝 하는 설렘이 보이지 않아서 심드렁했을까? 아니다. 비록 상처입고 회복하는 중인 우중충한 내용들뿐이어도, 나는 한강이 그려내는 언어의 유희 속에서 행복했다.

 

표제작인 <노랑무늬 영원>의 한 부분을 볼까.

 

빛이 화면 뒤에서 비쳐 나온다. 구원의 -떠오르는-잠잠한-승화된 눈물의 빛. 서로 다른 빛깔의 동그라미들이 겹쳐져 더 진해지고 어두워져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떠오른, 물을 섞은 유채꽃 빛깔의 노랑. 간혹 그보다 강렬한 주황. 멀리서 보면 이 그림들은 결코 위력적이지 않다. 가까이 갈수록 착시처럼 더 밝아지는, 실제로 튀어나오며 확장되는, 눈과 혼을 홀리는 노란 빛방울들.-260

나무와 하늘, 빛을 받은 잎사귀들, 내가 찍은 그의 프로필, 내 사진 석 장. 얼음 덮인 바위틈의 연둣빛 싹. 거기 겹쳐진다.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그의 목덜미, 흰 피부의 잔 솜털들. 거기 입술을 누르고 싶었던 순간의 아득함.-296

 

화면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보다 더욱더 상상력을 자극하는 선명한 색채의 어른거림 속에서 각각의 삶들은 무늬를 뽐내었고 비록 짧은 꿈을 꾼 후에 남는 단속적인 기억과 아련함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말 감정의 들쑤심들은 잠시나마 남들의 인생을 엿보는 짜릿함과 연결되고 있었다.

 

활짝 열린 결말. 진행 중인 이야기들로 인해 장면 하나를 나의 삶 어딘가에 이어 붙여 보기도 하고, 더욱 더 나은 결말로 만들어 보기도 한다.

특히 [노랑무늬 영원]의 가장 처음 작품인 <회복하는 인간>은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했다.

언니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그 비밀로 인해 언니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급기야 언니의 죽음을 맞게 되는 한 여자. 남겨진 여자는 상처 입었다. 그러나 발목에 난 화상의 상처가 회복되는 것이 의사조차 놀랄 만큼 심하게 늦게 회복되는 케이스였어도 여자의 상처는 회복 중이었다. 천천히...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32 <회복하는 인간> 中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당신과 언니, 둘 가운데 누가 더 차가운 사람이었는지.-18 <회복하는 인간> 中

 

갈등과 반목 후에 언제나 풀어지고 결국은 화해를 이루고 마는 것이 드라마의 법칙이다.

첫 만남의 설렘은 싹둑 잘려진 상태로 진행되는 진지한 인생 한가운데서 동생과 나의 띄엄띄엄한 사이가 회복되는 일. 나의 짧은 드라마는 이제 엔딩을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 하나가 남았다.

누가 더 차가운 사람이었는지...따지지 말고 손을 내밀어야겠다. 뒤늦은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소설 속의 여자는 결국 언니를 잃고 말았지만, 그러면서도 회복되기 시작하는 자신의 상처를 보며 후회를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으려 한다.

현실의 나도 상처 입은 인간이고, 나의 동생도 상처 입은 인간이라면,

그럼, 이제 나는 회복하는 인간인가? 하고 자문하면서 책을 덮는다.

지치지만 견디는 것 뿐이야...라는 책 속의 말이 울림을 준다.

“어디가, 아팠니?”라는 말로 다가가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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