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오독(誤讀 誤讀) 책 씹어먹기의 즐거움
책 먹는 여우는 책이 맛있는 음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리지 않고 아무 책이나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어치웠다. 처음엔 책을 사서 먹어치우다가 그걸론 모자라 도서관의 책에까지 손을 뻗다가 급기야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감옥에서 할 일이 없어진 여우는 이제까지 먹었던 책들을 토대로 자기의 글을 쓴다. 여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책 먹는 여우처럼 작가가 될 만큼 많은 책을 먹어치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독서인이라 자칭하며 책을 조금씩 조금씩 씹어왔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맛을 느끼며 책을 읽는다.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 저자는 사적인 연애와 사적인 책 읽기의 만남을 시도하면서 오독(誤讀)의 즐거움을 말했다. “아마도 그 학자나 작가를 연구하거나 좀 안다 싶은 선생님들의 눈에는 큰일 날 독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낸 물길과는 영 딴판인 어느 곳에 독자가 멈춰 서 있으니. 그러나 때때로 오독은 진실이다.” 라는 말에서 나는 큰 용기를 얻었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을 통해서 국가 권력을 이야기하려 하든 말든 그 파놉티콘 안의 감시자가 자기 안의 다른 누군가가 아닐까 생각했고, 프로이트가 어린 시절을 성적 욕망으로 해부하려 리비도를 들이밀어도 “그딴 건 모르겠고, 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꿈의 해석이 꽤 마음에 드는데?“라고 말하며 감히 <이방인>의 뫼르소를 지인들의 강력한 질타에도 불구하고 연애와 결부시키려 드는 그 배짱.
이렇게 당당하게 스스로의 책읽기를 할 수도 있구나.
나는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고 나서 많이 부끄러워 했었다.
작가의 메이킹 스토리를 죽 읽고나니 이미 진이 다 빠져버렸다고 할까. 책에 무슨 엑기스가 더 이상 남아 있을까...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없다.” 작가의 확고한 선전포고에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이만큼 으름장을 놨으니 소설은 정말 어려울 거야. 읽어봐야 내가 이해나 할 수 있겠어?
늙은 살인자, 그것도 치매에 걸린 살인자의 회고담이라는데...그 세계에 들어가서 헤엄치다가 내가 정신을 차리고 빠져나올 수 있을까? 물귀신처럼 뭔가가 내 발을 죽 잡아당겨서 ,나, 다시 숨도 못쉬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서둘러 읽을 생각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조용한 새벽 시간 잠을 쫓으며 읽기를 1시간 남짓. ‘어서 어서 이리로~’하는 소리에 이끌려 걸어 들어간 그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거닐었다. 생각한 것만큼 어렵지 않네? 술술 읽히잖아.
시인이자 살인자, 치매환자라는 묘한 조합 속에서 살인자는 유유히 살아 있었다. 철학자 니체와 반야심경, 금강경을 읽는 살인자.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누가 말했건 간에 이 구절을 보게 되자, 책이 “어이구~바보야.”하고 나를 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약이 화~악 올랐다. 기껏 잠도 양보해가면서 읽었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치매에 걸린 살인자의 회고라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면서 툭 툭 내뱉는 말들을 그냥 저냥 흘려보냈더니 내가 바보가 되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공포체험에 관한 기록이다.-157
라고 해설자가 말했다.
그래서, 뭐?
나는 금강경과 니체를 읽는다는 살인자가 신기했을 따름이고 더불어 감성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설정이 신선했다. 다만, 쾌감을 위해서 살인을 한다는 그의 말에서 ‘기괴함’과 ‘섬뜩함’이 아닌 ‘연민’을 읽을 수 있었다. 살인자의 첫 살인이 존속살인, 즉 그의 아버지에 대하여 행해진 것이었다는 점이 턱 걸렸다. 계륵(鷄肋)인가...그 한 군데가 심장을 콕콕 찔렀다. 나 또한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만큼 강한 증오의 감정을 품은 때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았어도,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었는데...
고독한 자유의 왕국에 틀어박혀서 다음번에는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로 쾌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만의 감옥 속에 갇혀 살아왔던 김병수. 그는 악마적 자율성을 제로로 수렴시키는 세계, 그 곳이 바로 감옥방이고 징벌방이라 말했다. 김병수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잠시 수런수런 겨울바람에 갈대가 울어대듯 내 마음 속에서 조그마한 동요가 일었다고 해도, 그는 응당의 징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작가는 끝내 김병수를 치매 속에 가두어버림으로써 관대한 처분을 내린 듯하다. 나의 숨겨졌던 잔인함이 발휘된 부분일까? 유황불과 뜨거운 기름이 들끓는 무간지옥에서 팔다리가 끊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고 혀가 뽑혀 나가며 손톱발톱이 빠져나가는 괴로움을 맛보여주어야 마땅한 살인자에게 치매는...약과다.
아, 나는 잔인한 여자...
이제라도 곧 허물어져 버릴 것 같은, 어떤 날은 정신이 또렷하고 어떤 날은 그저 멍한 70세 치매 노인에게조차 30년간의 살인의 책임을 물어 마땅한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냉정한 여자...
니체와 금강경, 반야심경을 읽고 작가처럼 자비의 마음을 베풀지어다...
맞선 자리에서 만난 남자와 여자. 은근히 주고받는 기싸움 중에도 거리낌 없이 쏘아지는 남자의 속사포 랩과 같은 대사를 따라가느라, 내 40 좀 못 미치는 평생의 독서력에서 기를 써가며 키워온 속독의 내공을 첫 단편을 읽는 데 소진해버렸다. 허탈~무슨 놈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도 없으며 , 적당히 웃을 타이밍도 주지 않고 그렇게 주욱~ 이어나가느냔 말이다. 이 인간은 정말~~^^그러다 마지막에서 빵 터질 시간을 주신다.
“됐다, 새끼야. 제발 그만 좀 해라.”
과연 실시간으로 그 자리의 믿기지 않는 상황을 눈앞에서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실감나는 대화와 그 대화를 한 방에 종결짓는 센 “마무리”가 아니었나 한다. 좀 부드럽게 다루었다면 달달한 연애드라마에 약방의 감초처럼 한 번씩 나오곤 하던 재벌의 아들과 돈을 보고 선자리에 나온 여자의 에피소드 같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성석제식의 필터를 거치고 나면 이렇게 신랄하면서도 함부로 웃지 못할 포스를 갖게 된다.
자동차 사고와 보험 처리의 상황을 다룬 <론도>, 특이한 사기꾼 동창생 이주선의 모습을 그린 <홀린 영혼>, 어린 시절 부잣집 딸로 찬미의 대상이었으나 고아로 전락한 민주가 살아온 인생편력이 소설의 화자 서정우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서술한 <찬미>, 라오스 여행길에서 만난 자칭 사업가 박씨의 이야기 <남방>, 어쭙잖은 한문 지식으로 무장하고 자랑스러운 조상의 역사를 떠벌리고 다니다 누군가 진실을 지적하면 발끈해버리고 마는 엉터리 해설가 <해설자>, 아버지의 외투에 관한 이야기 <외투>, 임진왜란의 와중에 나랏일에 소홀한 복수장 기원에게 바른말을 했다하여 억울한 죽음을 하게 된 유희의 억울한 사정을 밝힌 <유희>,그리고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 인간이 정말>
하나하나 해부하기엔 능력이 부족하여 성석제 소설의 미덕을 자세히 다루지는 못하지만, 정신없이 읽기를 밀어붙이는 통에 이야기의 줄거리조차 읽을 당시에는 머리에 제대로 입력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읽고 나면 “그래, 맞다. 살아간다는 건...”하며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제자리에 돌려보내주는 예의 있는 작가. 성석제.
밀려오는 글자의 파도에 정신없이 떠밀려 후다닥 읽게 만들어도, 읽는 중간에 나의 삶과 비교해보고 나의 상황에 대입해볼 수 있게 쉬어갈 수 있는 섬 하나는 만들어주는 사려 깊은 작가. 성석제.
그는 이번에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 인간이 정말...>
안~주면 가나봐라~, 그~칸다고 주나 봐라~
한동안, 이 책을 읽고 내 입에서 시도 때도 없이 중얼거려진 말이다.
키들키들 거리면서 한 번씩 소리죽여 그 구절을 읊조릴 때마다 즐거움이 퐁퐁 솟아오른다.
옛날 옛날~하면서 시작된, 과부와 스님의 어이없는 줄다리기 한 판 이야기이다.
어쩌다 푸르디 푸른 몽골 초원에서 열 두 명이 여섯 명씩 편을 갈라 술병을 두드리며 한 편은 -안~주면 가나봐라~를, 다른 한편은 -그~칸다고 주나봐라~를 주거니받거니 하다가, 점점 염불소리처럼 장중해졌다.
한 외국인 여자의 원더풀, 원더풀 소리와 뭐에 홀린 듯한 얼굴 때문에 일행은 끝없이 반복해야만 했다는 이야기.
그 사이에 초원의 풀꽃들이 입을 다물고, 먼 길을 떠났던 말들이 돌아오고, 해가 저물고, 초원에 살던 몽골 소년은 밥 먹으러 집으로 불려들어가고, 달이 떠오르고 있었대.-160
이야기에 곁들여진 달의 모습은 독자의 양손에 안겨주는 작가의 보너스다.
신경숙은 묘한 매력을 지닌 작가다.
그녀의 글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내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가고, 급기야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이 침잠하고 만다.
내 안에 고치를 틀고 한동안 그 안에서 끙끙대야 한다.
한 뼘 자라고, 또 한 뼘 자라 우화할 때까지 고치 생활이 계속된다.
실로 칭칭 동여매어진 그 속에서 나는 내 영양분을 보충 해야 하고, 스스로 상처를 보듬어 안아보고, 핥아보고, 새살이 돋을 때까지 어루만져야 한다.
신열이 나도 참아야 하고, 온몸이 땀에 젖어도 어찌할 수 없다. 네 활개가 웅크려진 몸속에 가두어져 있어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하다. 날개를 달고 나가야 한다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 하나만을 빛줄기로 삼아 기도한다. ‘어서 빨리 날개를 달고 나가게 해 주세요.’
<엄마를 부탁해>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덜 자란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고, <바이올렛>, <외딴 방>, <깊은 슬픔>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를 찔러 대는 가시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나를 드러내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작가가 한없이 관대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관찰하고 조망해온 삶의 이야기들이 ‘바로 내 이야기’인 듯 잔잔하게 서술되어 있다.
은은한 달빛 아래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한 치 거스름도 없이 달이 차오르고 이지러지는 자연의 섭리에 맞춰, 내 가슴에 부드럽게 스며든다.
“아~하. 그렇구나.”
“그래, 그런 적이 있었지.”
“나라도 아마 그랬을 거야. 그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나라도...”
한없는 수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미소짓는 동안, 어느새 책장은 마지막 장을 남겨두고 있었다.
휘영청 떠오른 밝디 밝은 보름달 아래, 갈색 줄무늬와 어두운 청회색의 잔등을 가진 고양이 두 마리가 담벼락에 서로 기대어 앉아 있다.
신경숙은 두 마리의 고양이가 그러했을 것처럼 부드럽고 영리한 시선으로, 담벼락 아래 인간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고, 소곤소곤 얘기해주고 있다.
나도 모르게, 내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소리 내어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게 말이다.
가족에게도 한 발짝 먼저 다가가 한결 나긋나긋해진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나로 변신시켜주는 마법의 가루가 달빛 속에서 흘러나오기나 한 듯이 말이다.
달에게 먼저 전해진 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이 가능하면 당신을 한번쯤 환하게 웃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작가는 말했다.
마음 먹은 대로, 글을 쓰고 그 글의 의도대로 이루어졌으니...작가님. 마음 놓으세요.
내 마음대로 오독(誤讀)하는 즐거움.
오독오독 씹을수록 입 안에 고소함이 퍼지는 누룽지를 먹는 맛이다. 글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일을 평론가에게 맡기자 책읽기의 재미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오독하리라! 그리고 다시 또 오독하리라! 책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제대로 밟지 않았다고 작가가, 평론가가 나를 위에서 두 눈을 치뜨고 내려다보아도 사적인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단순하고 심플하게 살고 싶을 때 김영하. 미치도록 웃고플 때, 삶의 진실을 울지 않고 들여다보고 싶을 때 성석제. 나는 누구인가, 제대로 살고 있나가 궁금해질 때, 라면의 참맛이 궁금해질 때 신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