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하는 동안 읽는 모든 텍스트는 두근거림으로 바뀌었고, 섣불리 읽기 어렵다는 책을 내 멋대로 바꿔 생각하며 책이라는 바다를 여행했다. 오독의 즐거움.
연애를 하며 내 안에 어떤 감정들이 있는지 들여다보기 시작했던 사람들은 그제야 책 속에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바다를 만난다. 아마도 그 학자나 작가를 연구하거나 좀 안다 싶은 선생님들의 눈에는 큰일 날 독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낸 물길과는 영 딴판인 어느 곳에 독자가 멈춰 서 있으니. 그러나 때때로 오독은 진실이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을 통해서 국가 권력을 이야기하려 하든 말든 나는 가끔 그 파놉티콘 안의 감시자가 내 안의 다른 누군가가 아닐까 생각했고, 프로이트가 내 어린 시절을 성적 욕망으로 해부하려 리비도를 들이밀어도 ‘그딴 건 모르겠고, 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꿈의 해석이 꽤 마음에 드는데?
읽다보면 결국 자살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은 쇼펜하우어는 내게 좀 더 그럴듯하게 자신을 믿어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일단 사랑하기 전에 사랑의 고통을 먼저 알아야 한다며, 그는 내게 너네가 말하는 사랑은 없다며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인다. 쇼펜하우어를 읽으면서 저 거지 같은 조언들(결국 남자는 큰 가슴과 자신과 섹스하지 않은 여자에게 반하는 동물에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으니까)이 지금도 자주 듣는 말이라는 것에 경악했다.
“감히 나의 뫼르소를 연애로 쓰다니 너 미친 거 아니냐? 라는 말을 이 글을 쓰면서 세 번은 들은 것 같다.(...)
뫼르소가 알제리인을 죽였을 때의 감정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감옥과 재판소를 오가며 자신은 쏙 빠진 채 자신의 삶을 쥐고 이리저리 흔드는 검사와 변호사를 보는 뫼르소의 모습은 마치 짝사랑의 ‘권태’에 빠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쯤이면 짝사랑에도 권태가 있다는 사실을 사랑받고 있는 오만방자한 사람들이 알아차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