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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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향기 물씬~[안녕, 긴 잠이여.]

 

늦깎이 작가로 문단에 데뷔하여 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하드보일드물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발표한 하라 료. 사와자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로 돌아왔다. 평소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 역시 그가 경애하는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과 [빅 슬립]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하잘것없는 사랑의 증거다.-니체

(그의 유고에서, 다만 니체가 나중에 스스로 지웠다.

책의 앞머리...

 

‘낭만 마초’로 이미 인기를 끌고 있었던 탐정 사와자키를 나만 모르고 있었나 보다. 시리즈 전편을 읽지 못해서 앞 편과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했지만, 400여 일만에 탐정 사무실에 다시 나타난 사와자키는 그야말로 남자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는 사나이다.

 

‘자네 이 세상에 뭣하러 왔나?’ 딴에는 멋을 부린 모양이지만 시주를 받아 끼니를 잇는 처지에 입에 올릴 소리는 아니다. 무엇보다 말투에 품격이 없다.-105

결국에는 그래봐야 ‘공원묘지’라 불리지만, 무덤을 ‘유택’이니 ‘분영’이니 하는 말로 바꾸어 불러가며 사람의 죽음을 저울에 재는 고풍스러운 비즈니스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106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은 뒤, 집으로 돌아가 잤다. 그곳은 가정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212

 

나는 누군가와 작별하며 ‘잘 가’란 말을 제대로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말을 적절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427

 

몇 구절을 뽑아 보았는데, 그는 괜시리 고독하고 외로운 사나이이며, 시니컬한 사람이다.

550여 페이지에 달하는 꽤 두툼한 분량에서 작가는 꽤 많은 곳을 ‘사와자키’라는 인물 탐구에 할애했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탐정임에도 마치 많은 것을 공유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의 사립탐정 사와자키는 한때 파트너였던 와타나베의 흔적을 따라다니느라 그동안 사무실을 비웠었다. 오랜 기간 부재 후에 다시 등장한 그를 기다리는 것은 한 의뢰인의 심부름꾼인 마스다 게이조. 그리고 와타나베와의 일로 얽힌 폭력단 ‘세이와카이’의 간부 하시즈메와 그의 보디가드인 사가라, 마지막으로 신주쿠 경찰서 간부인 니시고리 등이다. 사와자키가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기까지 아주 긴 페이지가 지나갔다. 177페이지에서 의뢰인 우오즈미 아키라는 정식으로 사건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후아~ 기나긴 시간을 기다려왔다. 그 이후 진짜 탐정이란 무엇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우리의 하드보일드 낭만 마초 사와자키.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질문을 하고, 인터뷰를 한 사람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며, 노숙자라도 허투루 대하지 않고 그들의 다음 행로까지 챙겨봐주는, 철저하면서도 속깊은 면모를 보여준다.

전직 야구선수였으나 승부조작 혐의로 야구인생을 잃게 되고만 의뢰인 우오즈미 아키라. 탐정에게 사건 의뢰를 함과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습격을 당해 머리를 크게 다친다. 우오즈미는 탐정에게 사건을 의뢰하면서 어머니 명의의 통장을 맡기는데 그 통장에서 나온 한 장의 노공연 티켓.

우오즈미가 의뢰한 사건은 승부조작 혐의를 받을 즈음 일어난 의붓누나 유키의 자살 사건이다. 그 후로 사와자키는 부지런히 일했다. 아버지인 우오즈미 효를 찾아가 병원으로 데려오고, 시의회 의원인 구사나기 이치로의 도움으로 사건 당시에 작성된 경찰 조서를 읽었고, 세 증인을 차례차례 만났고, 오쓰키류의 노 공연을 대신 관람하고 고문변호사와 오쓰키카이 이사장을 만났고, 누나가 살던 오쿠자와 TK맨션에 드나들던 오토바이 탄 인물에 대해 조사하고, 유키의 고모인 신조 게이코 부부를 만났고, 스낵바 더그아웃에서 후지사키 부인을 비롯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와자키가 그렇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하자 자신의 숨통이 죄어져 오는 것을 느낀 범인은 사와자키를 죽이려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한 사와자키를 아웅다웅하는 사이인 폭력단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와 사가라가 구해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결국 밝혀지게 된 유키 자살 사건의 비밀.

부지런히 발품 팔며 조사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범인은 있었다!

전직 야구선수와 연결된 인맥이 이렇게 넓어지기도 하나...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메모를 해 가며 읽어야 했을 정도다. 사건의 비밀이 밝혀지는 결말 부분을 읽으려 나는 또 새벽을 꼬박 지새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결국, 제 의뢰가 꼭 필요한 일이었는지 어떤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네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뢰인이 조사 결과에 실망하는 일에는 익숙했다.

“ 그 후 만나는 모든 사람이 작은 돌을 옮기려다가 큰 산사태를 일으킨 멍청한 남자를 보는 듯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어요.”-553

 

의뢰인에게는 후련하지 않은 결말, 오히려 더 큰 질문을 껴안게 된 형국이 되었지만, 사와자키는 말없이 담배를 피워문다. 홍콩 느와르 영화의 결말을 보는 듯하다. ^^

담배 연기는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실려 문에서 복도 쪽으로 흘러갔다. 사라진 우오즈미 아키라를 뒤쫓는 듯했다.

크~ 역시, 남자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는 우리의 사와자키 탐정님이시다.

 

와타나베와 연결된 이야기도 호기심을 부추기더니 끝내는 마무리를 짓는다.

아, 머리가 띵하다.

너무 열심히 읽었나 보다.

무뚝뚝하고 정확하게 일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닌 남자, 사와자키.

또 하나의 새로운 탐정상이 내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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