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간신히 깨지지 않고 존재하는 어떤 것, 인간.[무게]

 

 

가만히 둘러보면 인간은 기실

간신히 깨지지 않고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시방 같은 봄 저녁

황혼이 어둠에 막 몸 내주기 전 어느 일순

홀린 듯 물기 맺힌 눈 아니고는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슈베르트를 깨뜨리다>-황동규 시 中

 

여기 담담하게 어느 은둔자의 고백을 써놓은 소설이 있다.

그 은둔자는 키 190, 몸무게 250, 쉰여덟의 전직 대학교수 아서 오프이다. 10년간 브루클린에 있는 집에서 거울조차 제대로 보지 않고 살아간다. 해가 지고 나면 밖은 어둡고 안은 환할 때 창문을 거울 삼아 제 모습을 겨우 비춰보곤 한다. 심미적인 이유 때문에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니다. 치수를 파악해서 어느 날 아침 일어났는데 걷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아아! 일상의 무심한 언어들에서 길어올린 한 사람의 은둔생활이 이토록 가슴에 와닿을 수 있는 것은, 젊디젊은 작가 리즈 무어의 세심한 관찰에서 나온 순수한 글들이 제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전직 대학교수였던 아서는 한 때의 설렘을 가져다 주었던 여인 샬린과 편지를 주고 받았었다. 그러면서 이제 샬린에게 자신의 현재 모습을 고백해야 하나...하고 망설이던 찰나, 샬린에게서 아들의 사진이 담긴 편지가 왔고, 이어서는 느닷없는 전화가 걸려온다. 샬린에게는 어떤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은 켈 켈러라고 했다.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똑똑한 사람인 아서에게 아들을 부탁하기 위해 전화한다고 했다. “아이가 야구를 해요. 머릿속에 야구밖에 없어요.”

샬린의 전화를 받은 아서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우울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한 것처럼 조금 흥분해서는 샬린이 도착했을 때를 대비해서 자기 나름의 최대한 “무시무시한”일을 시작했다. ‘홈메이드’를 부르는 것. 7년 만에 이 집에 사람을 부르는 것이었다. 유니폼을 입은 작고 가녀린 “소녀”처럼 보이는 홈메이드 욜란다가 도착했을 때, 아서의 심정을 보라.

욜란다가 집에 들어서는 순간 어떤 마법이 풀렸다. 내 맥박이 빨라졌다. 마음속에서 뭔가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부끄러워졌다.-49

 

샬린을 만날 첫걸음을 내딛은 다음은 아서의 한층 용감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서는 2주가 지나도 연락이 없는 샬린에게 전화를 먼저 하는데, “전화를 잘못 걸었어요.”라고 대답한 사람이 샬린임을 깨닫고는 그녀가 술을 먹었거나 약을 먹었거나 아무튼 그 비슷한 상태라는 걸 이번에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가슴이 저렸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요란스럽지도 호들갑스럽지도 않은 감정의 서술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내 마음을 건너왔다.

그랬다. 샬린과 아서, 아서와 샬린은 서로 닮은 꼴이었다. 서로 가진 삶의 무게는 달랐을지언정, 그것을 견뎌내는 방식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속으로 삭이고, 한없이 안으로 안으로 꺼져들어가는 것이 닮았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한편, 샬린의 아들 켈은 잘생기고 멋졌지만, 약물에 의존하는 약하디 약한 엄마를 가진 탓에 자신있게 꿈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가 없다면...”이라는 생각도 가끔 하긴 했지만, 엄마에게 못된 말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는 엄마. 엄마가 최고라고 생각한 부자 동네의 학교 펠린에 진학하여 멋진 여학생 린지와 사귀기도 하지만 상대적 박탈감은 어찌할 수 없다. 야구천재 켈 켈러. 야구로 성공하려는 원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아이.

켈의 엄마 샬린은 죽음으로 마침내 외로움에 중독되어 있던 아서와 야구라는 희망에 중독되어 있는 아들 켈을 이어주게 된다.

 

켈은 아서에게, 아서는 켈에게 편지를 쓰며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암시하는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가족은 선택할 수 없는 거라는 말을 늘 듣고 살면서, 그 사실이 분명 진리라 해도 부당하다며 한탄했지. 하지만 얼마든지 상황을 달리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그들을 또 다른 가족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어. 내 얘기를 하자면, 내게는 오랫동안 누이처럼 지내던 사람이 있었어. 그녀의 이름은 마르티야. 그리고 딸로 삼을 만한 사람도 찾은 것 같아. 그녀의 이름은 욜란다. 언젠가 너도 욜란다를 만났으면 좋겠다.

(...)

현관문을 열고 편지를 우편함에 넣고 그 사랑스러운 붉은색 깃발을 세워놓았다.-384

 

아서는 아마 이제 조금쯤은 행복해질 것이다. 문을 닫아걸고 바깥 출입을 하지 않던 그가, 이제는 산책을 하고, 누군가를 초대하기에 이르렀다. 20년만에 연락을 하게 된 샬린과의 기이한 인연을 통해 외롭던 삶이 살짝 부산스러워졌다. 식사초대 준비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욜란다와 함께 욜란다의 아기를 기다리는 일상적인 삶.

우편함 옆의 붉은색 깃발을 지나서 켈과 린지가 들어서면 아서의 집은 생기를 띠게 되리라. 외로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도 한 통의 편지와 전화로 희망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된다.

간신히 깨지지 않고 견디고 있다고 말한 시인의 말처럼, 모두들 각자의 무게를 지고 있으면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편함 옆에 붉은색 깃발을 세운 아서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서 우편함에 답장이 오기를 기다려 볼까나...

편지랑, 깨지기 쉬운 인생을 붙들어주는 힘으로 삼기에 적당한 장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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