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라 문서
파울로 코엘료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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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따르라! 보이지 않는 칼을 들고 [아크라 문서]

 

 

       

 

 

자정을 넘긴 밤하늘은 깜깜하기만 하다. 온통 검은 장막으로만 둘러쳐진 드넓은 세계에서 칼로 도려낸 듯 예쁘장한 반원 모양의 달만이 은근한 빛을 발하고 있다. 온전한 만월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아도, 겨우 반토막의 달이라도 ‘나,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알리는 월광. 화안한 대낮에 과시하듯 이글거리는 태양보다도 더 마음을 끈다.

자비로운 불상의 뒤에 둘려진 광배처럼 모든 것을 감싸안아주고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어둑신한 배경에 오직 한 군데 눈 둘 곳은, 보는 이가 눈부셔하지 않게 상냥하면서도 부드러운 빛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달, 저 달이 박혀 있는 곳 뿐이다.

 

                                    

<아크라 문서>는 달빛을 닮았다.

은근하면서도 강한 빛을 가졌고, 은연중에 달빛을 좇아 따르게 만든다.

빛을 따르라! 보이지 않는 칼을 들고.

 

 

                                       

 

 

여름의 강렬한 열기를 먹고 자라는 태풍은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우리나라를 지났다. 때늦은 태풍은 세찬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버린 도토리를 남겼다. 아이들과 함께 시골집 마당에 한가득 떨어진 도토리를 주웠다. 예년에는 그저 놀이삼아 몇 개 주워다 도토리가 쓴 모자며, 쌍둥이처럼 붙어있는 형제 도토리의 모습을 즐기면서 이리저리 굴리다 버렸을 도토리를, 올해는 태풍의 힘으로 수월하게 많이 모을 수 있었기에 도토리묵 만들기 프로젝트에 돌입을 했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도토리는 껍질 까기가 힘들어서 며칠 바싹 말려두었다. 그리고선 어제 비로소 한 놈씩 탁탁 때려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경쾌하게 ‘콰작’ 도토리 껍질 깨지는 소리에 아이들은 즐거워하며 서로서로 누가 많이 까나 경쟁에 들어갔다. 잠잠한 몰입의 과정 중에, 가끔씩 나의 “에구구, 허리야.”하는 소리도 있었고, 아들놈이 껍질에 살이 베어 “엄마~우엥~”하고 우는 소리도 섞여 들었다. 허리 굽혀 도토리를 하나씩 주워 올릴 때의 기쁨도 잠시, “이걸로 도토리 만들어먹을까?”하던 남편의 철없는 소리에 ‘이 인간이 정말?’ 확 짜증이 밀려왔었지만 어쨌거나 간에 주워놓은 도토리를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금 이렇게 도토리를 까고 있는 것이다. 호박 속처럼 노랗게 티 없는 알맹이를 보면 절로 신기한 마음에 “우와~”소리가 절로 나왔고, 가끔 벌레 먹은 거무튀튀한 것들이 나오면 시무룩해졌다. 껍질 까는 과정에 익숙해지자 다람쥐나 청설모가 된 듯 손가락을 움직이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까르르 웃기도 했고 바싹 마른 껍질이 내는 경쾌한 소리에 가끔 장단을 맞추며 어깨를 들썩이기도 했다. 다 까놓은 다음에는 어떻게 하나, 과정을 여쭤보려 갑작스레 드린 전화에 “그거 해 먹을라꼬? 힘들낀데...”하시던 시어머니의 말씀에서 걱정반, 뿌듯함 반의 어머님 마음을 자연스레 읽어내기도 ...

이제 겨우 전체 과정의 반의 반도 못 거쳤지만, 내가 겪은 감정의 일렁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요동쳤다. <아크라 문서>을 읽으며 인생을 관조하는 나의 관점이 조금쯤은 바뀌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시큰둥하고 일상의 권태에 찌들어 있어서,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고 지겨워하기 일쑤이던 내가 <아크라 문서>의 한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 젊은이가 청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려 주십시오.

이에 그가 대답하였다.

우리 모두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 바로 죽음의 방문이다. -159

 

너무도 단순하고 명쾌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미래에 다가올 “죽음”을 기정사실화 해놓고 산다면...

하루하루를 지겹게 버텨나갈 이유가 없는 게 아닌가.

나의 미래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죽음”이라면, 한 순간이라도 즐겁게,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감정의 사치를 다 누리고 가야지. 그래서 도토리를 까는 순간 느끼는 내 모든 감정을 세세하게 하나하나 다 느끼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단순한 진리는,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도 아니었건만, 파울로 코엘료는 현자의 거룩한 울림으로 다시 한 번 말해줌으로써 나를 깨우쳤다.

생활의 무게와 지루한 민무늬의 나날들 속에서 무심하게 살아가던 나를 일깨워준 <아크라 문서>.

 

강력하고 날카로운 무기들로 무장한 프랑스의 ‘십자군’이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인들이 모여 살고 있던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다. 교황의 이름으로 내일 아침이면 ‘이 도시의 해방’과 ‘신의 뜻’을 위해 공격을 시작할 터인데, 콥트인을 중심으로 광장에 모여든 이들은 결전의 순간을 앞두고 천 년을 내려올 지혜를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미지의 신이자, 만일 어길 경우 세상의 종말을 불러올 단 하나의 법을 수호하는 ‘신성한 힘’ 모이라를 받드는 콥트인. 사람들을 조용히 결집시킨 콥트인의 한마디는 이러하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 대해, 그 안에서 우리가 직면해야 했던 어려움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후손들은 바로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천 년 후에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테니.-25

 

그리하여 그들은 광장에서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네 가지 세력, 즉 사랑, 죽음, 힘, 시간과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밤부터 우리는 편협과 몰이해의 악령들과 싸우기 위해 보이지 않는 칼을 들고 세상을 돌아다녀야 한다.

-193

 

혹은 듣고, 혹은 기록하고...

콥트인의 가르침은 보이는 칼 앞에 무너지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칼을 든 이들에 의해 아랍어, 히브리어, 라틴어가 섞인 <아크라 문서>로 남아 이렇게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모든 것이 파괴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인생의 지혜를 가득 담은 채.

 

천 년의 지혜를 담고 있는 <아크라 문서>를 내 것으로 만들 때쯤에는 지금 까고 있는 도토리가 묵이 되어 있을 거다.

알맹이가 된 도토리를 드르륵 갈아서 베보자기에 몇 번을 거른다. 내려진 도토리 물을 뭉근한 불에 두어 시간 저어가며 끓인 다음 차게 굳히면 쫀득하고 차지면서 슬쩍 떫은 맛을 내는 도토리묵이 완성될 것이다.

알싸하고 떨떠름한 도토리의 향내를 간직한 도토리묵을 조근조근 씹어먹으며, 도토리묵 만들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게 만들어준, 달빛을 닮은 <아크라 문서>를 떠올리겠지.

인생이 지구와 같이 단단한 물체인 척, 손가락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인 척 해보자. 평범하고 이성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듯이...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파도]에서 말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좌절하고 끝내 절망하여 포기하고 만 “인생”이라는 것을 건너가는 지혜가 <아크라 문서>에 들어 있다. 나는 어두운 밤하늘을 반조각의 몸으로도 은근히 밝혀주는 달빛같은 존재에 의지하여 인생을 걸어갈 것이다. 언제고 다가올 죽음이라면, 힘껏 사랑하고 실패해보고 또다시 도전할 것이다. 어쨌거나 천년을 거슬러 살아남은 지혜라면 그 빛을 따를 가치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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