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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평점 :
눈물 떨군 돋을새김, 사랑.
[너를 봤어]

뽀득뽀득한 삶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12

‘휴~ 그래, 나도 그렇다는 것은 안다.’
소설의 초반부터 공감이 이루어지고 마음이 저절로 열리는 문장을 읽었다. 그러나 왠지 마뜩찮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너무도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들었을 때의 헛헛한 느낌이랄까...
그래, 그래, 그래. 하고 결국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한 문장. 이 한 문장이 <너를 봤어>의 깊은 수렁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 정수현’은 작가이다. 스물 여섯에 등단한 작가.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은 흥미 없어 하는, 어지간한 가정사는 문학판에 명함도 못내민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작가.
정수현이 찾아 헤맨 ‘너’는 누구이며 과연 ‘너를 봤어’는 무슨 의미일까를 찾기 위해서 문장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다가 촘촘히 짜여진 행간에서 “戀歌(연가)”를 발견했다.
사랑의 노래.
눈물 떨군 돋을새김으로 한 자 한 자 새겨진 사랑의 노래, 연가.
정수현의 어둡고 팍팍한 삶에 동화되어 한숨을 떨구고, 곧이어 무거운 돌덩이를 묶어 저 밑바닥으로 천천히 내리는 중노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힘겨워져서 길고긴 탄식을 내뱉을 때, 한구석에서는 조용히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소설이 끝날 무렵에는 촛불이 흘린 눈물처럼 두껍고 무겁게 덩어리진, 투명하지 않은 탁한 회색빛의 물줄기가 내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꺼억 꺽 소리조차 조용히 삼키게 만드는 비통한 울음이었다.
작가의 말마따나 죽이고 죽이고 죽인 끝에 겨우 탄생한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오래 동안 내 가슴을 치게 만들 줄이야...
진실을 알고 싶은가? 알고 싶지 않은가?
미리 말해두지만 삶의 진실은 아름답지 않다. 불친절하다.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속내에는 어둡고 깊은 구멍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누구나의 마음 속에 하나씩 다 들어차 있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피천득 <수필>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이다...그러나 소설은 꼬부라진 한 조각 연꽃잎을 계속 쳐다보고 있을 것을 강요한다. 계속 쳐다보고 쳐다보고 또 쳐다보면 소설 속의 삶이 내 삶이 되고, 동화된 내 삶은 또 아프고, 결국에는 아픈 내 삶마저 보듬을 마음을 가지게 만든다. 특히나 <너를 봤어>는 울음 끝에 탄생한 장중한 진혼곡이다.
정수현은 뒤늦게 만난 사랑, 영재를 남겨두고 떠났다.
그들은 왜 끝까지 함께일 수 없었을까.
첫 번째는 정수현의 아내 때문이고, 두 번째는 정수현을 서서히 가라앉게 만드는 가족 때문이다.
아니다, 무엇보다도 정수현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꿀렁꿀렁 흘러가게 내버려둔 또다른 자아 정수현,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 앞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이리 보아도 예쁘고 저리 보아도 예쁜, 도저히 흠을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는 예쁜 서영재를 놓아버려야 했을 정수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차갑고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아내와의 일상 속에서 정수현은 아내를 떠나 삶의 끝으로 치달아도 좋을 여자를 기다리기는 했다. 아내와 살 때에는 일렁이지 않던 죄책감의 잔물결이 왜 하필이면 영재를 만났을 때 출렁출렁 흔들리기 시작했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 시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정수현의 관심 없음에, 혹은 자기오만의 끝에서 아내는 자살을 택했고, 정수현은 끈질긴 아내의 반격에 고개를 떨구었다.
만날 때마다, 어이구 나 죽네를 입에 달고 다니는, 궁상맞고 초라하긴 하나 입심 하나만은 팔팔하기 그지없는 어머니는 만날 누군가에게 돈을 뜯겼다. 정수현은 언제나 돈을 해 주었지만, 어느 순간, 정수현의 상상 속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방에 쳐들어와 돈 내놓으라고 어머니를 독촉하는 지랄맞고 빙충맞은 그 놈팡이는, 수현과 함께 아버지의 죽음에 동조했으면서도 그걸 빌미로 어머니의 피를 빠는 흡혈귀가 되어버린 그의 형의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 악악거리며 돈을 구걸하고 있었다. “자식인데도 겁나더라. 안다고 하면 나도 죽일까봐......”(127)
이런 형이라면 차라리 죽어...
가족 때문이든 자기 자신 때문이든, 남에게 떠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가진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기가 무섭다.
정수현이 꽃 같은 영재를 두고 그런 선택을 한 것을 나는 이해한다.
마음 속에 진 짐은 쉽사리 떨쳐버리기 힘든 법이다.
젊음이 아무 대가 없이 획득한 전리품이라 할지라도 누구나의 젊음이 다 찬란하게 빛나지는 않는다. 나의 젊음...그 때는 내가 지고 있는 짐이 너무나 무거워서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볼 힘조차 없었다. 짐을 진 사람들은 그렇다...
갓 스물은 순수함과 호기심, 발랄함들이 필요한 시기였다. 내게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연기라도 해야 했을 터. 그러나 오기 섞인 자존심과 감정에 대한 결벽증 때문에 “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정적으로 나에겐 “밝음”이 없었다. 어두움을 미리 보아버린 젊음은 회색빛이 되어 도무지 투명한 화이트로 빛나지를 않았다.
대학교 1학년이 되면 무조건 누리리라 결심했던 그 자유라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창살이 하나 둘러쳐져 있는 감옥 속에서 손짓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고, 풋풋하고 아름다운 첫사랑도 나쁘거나 용감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니면 감히 손도 내밀어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의 어두움을 호기 있게 감싸주고 보듬어 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도 전에 갑옷 속에 꽁꽁 몸을 숨긴 아르마딜로처럼 무쇠옷으로 치장한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모든 것을 눈아래 깔고 보았다. 속으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팔팔한 청춘들이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으면서...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로 교정을 누비며 환하게 웃는, 지배쫑 지지배쫑 지저귀는 지지배들을 나는 마음 속으로 저주하고 있었다.
제발 내 앞에서 그렇게 밝고 환하게 웃지 말아 줄래?
누구는 부모를 잘 만나서 예쁜 옷 입고, 수업료 걱정 없이 남자애들과 팔짱 끼고 다니고...
시간 날 때마다 세련된 인테리어의 커피숍에서 우아하게 커피잔을 들고 홀짝이며 패션과 스타일을 논하는 것들...다 사라져 버려랏!
정수현의 아내는 그러한 (나의 이야기지만 결국에는 같은 종류의 것이었을) 열등감을 오만으로 대체했을 것이고, 성공을 이룬 뒤엔 사랑을 주문했고, 결국엔 패배했다.
나는...그녀처럼 그렇게 지독하게 오만하지는 않았기에 지금 그럭저럭 살고 있다.
그러나 한 걸음만 잘못 내딛었어도 정수현처럼 평생 마음 속에 그늘을 가지고 살고 있었을 수도 있고, 그의 아내처럼 독하게 살 수도 있었다.
정수현은...너무 여렸던 걸까?
아니면 너무도 독했던 걸까?
분명히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모든 걸 미화시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사랑엔 응원을 보내주고 싶었는데...
“누구든 서영재 건드리면 나한테 죽는다, 이게 그냥 뿜어져 나왔어. 둘이 떨어져 앉아 있어도, 형이 니 어깨를 꼭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고. 모든 신경이 너한테 열려 있는 거야. 나 좀 아프기도 했다. (...) 형이 한 사랑 의심하지 마. 군더더기 없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곧장 꽂히는 사랑 했으니까. 죽어서도 그럴 거다.”-197
진부하고 틀에 박힌 사랑의 되새김질. 그러나 이런 대사만큼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직설적인 말이 또 있을까...너는 내 꺼. 라는 말.
팍팍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삶에 단 하나 등대가 되어 주는 말. 사랑.
다행히 정수현의 사랑을 이어받은 서영재는 밝고, 힘이 있다.
내면의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힘.
끝내 어둡고 칙칙하게 끝날 수도 있었을 소설을 환하게 밝힌 서영재가 있어서 좋았다.
세상 참 어두워도 그래도, 한줄기 희망의 빛은 남아 있는 것이지...
말라붙어 버린 눈물자국을 물기 축축한 손바닥으로 쓸어내며 쓸쓸히 웃어본다.
한없이 한없이 물 밑바닥으로 침잠하려는 나를 ‘너’ 서영재가 끌어올렸다.
정수현의 사랑이, 그의 인생이 애달프다. 책 한 권을 읽는 동안 나는 정수현의 눈물 떨군 사랑을 심하게도 앓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아이들이 놀고 있다.
새삼 내 주위를 뛰어다니며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아이들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엄마, 울어?”
^^
정수현의 사랑 때문에 내가 죽을 순 없어서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