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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 국내 최초의 완벽 주석서
홍자성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평점 :
채근담>
파탈!에 웃음~
아핫!
장장 838페이지에 달하는, 한 손에 들기도 버거운 이 책을 펼쳤는데, 난데없이 웃음이 난다.
목차를 훑어보고 전집의 앞장에 나열되어 있는 여러 개의 제시어 -파탈, 득실, 방원, 회복-중에서 유독 ‘파탈’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 것이다.
한자로 표기라도 되어 있었으면 오해가 덜할 텐데, 어느새 한자보다 한글에 익숙해진 내 눈에 엄숙한 고전과 어울리지 않는 “팜므파탈”같은 단어에나 쓰일 법한 ‘파탈’이 떡하니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으니, 아연 웃음이 나고야 만다.
<채근담>에서의 擺脫(파탈)이란 말은 당연, ‘관행에서 벗어나라’와 같이 묵직한 울림을 주는 뜻을 버젓이 담고 있다.
그런데도 가벼운 외래어에 익숙해진 내 눈은 그 진중한 뜻을 먼저 헤아리지 못하고, 섹시한 요부로 대변되는, <악의 꽃>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 팜므파탈의 뜻으로 미루어 짐작해버리고 말았다.
아아~장탄식으로 나의 태도를 먼저 반성해본다.
진지한 태도로 홍자성의 <채근담>에 완벽 주석을 달아 책을 선보인 역자 신동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난세의 치세 이치를 깨닫고 움직여라.
요즘같이 돈돈돈 하는 세상. 경제논리로 무엇이든 엮어내며 정신이 황폐해져 가는 세태를 일러 난세라 칭하지 아니할 수 있으랴.
나같이 가정 내에만 머무르며 세상 일에 문외한인 가정주부의 눈에도 번연히 보이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 내 마음 하나 다스리기가 가장 큰 화두가 될 줄...명나라 대의 홍자성은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것인가.
쓰디쓴 풀뿌리를 씹으며 견뎌낼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책 이름.
어린 시절, 한자의 뜻을 모르던 시절에는 <채근담>이 뭐지?
“담”이니까 이야기는 이야기인 듯한데...너무 재미있어서 자꾸 읽어달라고 채근한다는 뜻인가?
아님, 잘못했을 때 혼내는 내용의 교훈적인 이야기인가?
하며, 되지도 않는 해석을 나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좀 커서야 처세에 관한 책. 이라는 정도까지 알게 되었지만, 이렇게 해석에다 주석까지 달려 있고, 세상살이의 실례를 들어 설명해주는 책이 눈앞에 떡 디밀어 지니,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이치를 깨달은 다음, 머릿속에 담고만 있지 말고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말 그대로 깨달은 다음, 움직여라!
<채근담>의 체제
일단은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양에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랜 세월동안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판본이 많아졌다 한다. 그래서 체계도 가지각색이었던 것을, 이번 <채근담>에서는 명대에 출간된 명각본을 저본으로 하여 전집과 후집의 체제를 수용했다. 총 359장을 4자성어로 정리한 뒤 25장을 한 묶음으로 하여 모두 14부로 나눴다.
<논어>를 읽기 전, 필수 코스인 <소학>, <명심보감>과 더불어 수신서로 널리 읽혀져 왔다는 말은 <소학>, <명심보감>만큼 읽어내기 수월하다는 뜻이 되겠다.
그러던 것을, 요즘은 <논어>, <맹자>에 비견되는 고전으로 <채근담>을 대한다는 것은 채근담이 전하는 의미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명하고 아름다운 문체를 가진 <채근담>을 역자는 연암 박지원이 쓴 척독에 비견한다.
촌철살인의 단문이란 뜻이다.
각 장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실어 놓은 예화들이 있어, 비록 짧은 문장이지만 가슴에 팍팍 와닿게 된다.
마음에 새기자
방대한 양 속에서 내 마음에 드는 경구를 찾아 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몇 가지 골라 적어 본다.
1부 擺脫-14장 擺脫減除(파탈감제) 속습과 물욕에서 벗어나라
사람으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할지라도 속세의 욕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능히 위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학업의 성취를 이루지 못할지라도 물질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능히 성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58
발상의 전환을 적용한 예화로 조조를 들고 있고, ‘파탈의 미학’을 현재에 적용시켜 스티브 잡스를 ‘기술기업을 넘어선 예술기업’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한다.
8부 公私-199장 煙霞橙橘(연하등귤) 노을과 귤 향기는 저물 때 아름답고 향기롭다
하루의 해가 저물 때 노을은 오히려 더욱 아름답고, 한 해가 저물 때 귤 향기는 더욱 향기롭다. 생애의 만년인 늙마에 군자는 의당 1백배나 더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387
남송 초기의 시인 신기질의 시 <醜奴兒추노아-書博山道中壁서박산도중벽> 까지 끌어와서 북송 패망에 대한 울분과 비분강개를 토로하는 애국자로서의 ‘유종의 미’를 보여준다.
역자의 지식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일까...넓고도 깊다.
<채근담>의 의미
仁을 역설한 공자는 수많은 제자 자공, 자사 , 자유 등에게 직접 가르침을 내렸고, 제자들은 이를 <논어>라는 책으로 남겼다.
<맹자>는 춘추 전국시대라는 난세에 여러 나라를 떠돌며 직접 제후와 패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곤 했다. <맹자>에는 성선설과 그의 정치관이 들어 있다.
<채근담>에는 仁이니, 義처럼 단 한 글자로 저자의 생각을 요약할 수 없을 만큼 처세에 관한 다양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지만 근본을 따지고 들자면, 제목이 뜻하는 바대로 “근검, 검소” 라는 생각을 깔고 있지 않나...한다.
시간 날 때마다, 생각 날 때마다, 한 장씩 들춰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기에 제격인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다보면 내 마음의 때가 하나씩 벗겨지면서, 씹고 씹으면서 거칠고 소박한 풀뿌리와 푸성귀의 참맛이 드러나는 순간처럼, 환하게 밝은 내면이 나타나는 때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고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고전의 독서법도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진정한 내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운 여름에 읽기 시작했으니, 가을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기 전까지는 파릇파릇한 싹을 틔울 씨앗을 꼭 품어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