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 사전지식 없이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을 골랐다.

선입견을 갖기 싫어 내용을 훑어 보지도 않았던 것.

장편인 줄 알았는데, 5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일명 ‘미미여사’로도 불리며 ‘사회파’소설이란 좀 낯선 장르의 대가이다. 추리 소설이 기본적으로 개인의 심리를 추적하는 데서 출발해서 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어떤 행동을 낳는가, 그에 대한 결과로서 주변에 어떤 차장을 일으키는가를 묘사하고 관찰하는 것이라면, 그 반대편, 사회가 한 인간을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고자 시도한 작가들이 쓴 소설을 ‘사회파’소설이라고 한다.

시대를 달리 해서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쓴 <외딴 집>이나,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화차>, <모방범> 등, 양손에 꼽기도 버거울 정도로 그녀의 작품은 많고도 다양하다. 사회적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문장화해서 펼쳐나가는 그녀의 필력은 한마디로 대단하달 수밖에 없다.

 

이번 최근작, <눈의 아이>는 그녀의 전작들이 따랐던 이른바 사회파소설의 공식과는 좀더 다른 차원으로 읽어 내려가야 할 것 같다. 정치 시스템, 경제적 환경, 도쿄와 에도, 살인사건은 말 그대로 배경일 뿐. 미야베 미유키가 이번 단편소설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좀 더 세세한 풍경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거대한 모습들이 아닌 세세한 ‘사회’의 진짜 모습. 그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와, 나를 포함해 나와 같이 생활하고 살아가는 다양한 주변인물.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소설 속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나의 이야기같이 여겨지며, 어느새 훅-하고 빨려 들어가고 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간단한 작품 소개와 더불어 작품 속 나를 깨운 한 마디를 덧붙여본다.

 

표제작 <눈의 아이>-추운 겨울, 빨간 파카에 빨간 장화, 빨간 머플러를 한 하얀 피부의 유키코. 하얀 눈에 파묻힌 채 발견되었다. 12살의 나이로 죽은 유키코를 떠올리며 20년 만에 모인 네 사람. 그리고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충격적인 결말.

아이의 마음속에 깃든 질투심이 부른 비극. 뒤돌아보지 마라. 거기에 네 얼굴이 겹쳐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건과는 별개로 사람의 마음을 교묘히 헤집는 미미여사의 한마디.

유키코를 죽인 범인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다. 그에 대한 불안보다도, 딸을 잃어버린 이웃의 비탄에 젖은 얼굴을 가까이서 봐야 한다는 사실이 더 꺼림칙하다. 제삼자의 본심이란 그런 것임을 엄마로부터 배웠다. -13

 

<장난감>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구미코 아버지의 미쓰오 삼촌. 완구점을 하던 부인과 재혼하면서 데릴사위로 들어가 다케다로 성을 바꾸고 살았다. 완구점의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상점의 재개발을 노리고 악의에 찬 유언비어가 떠돈다. 완구점 이층에 교수형 밧줄이 걸려 있다나...

“숙부님,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53

가족관계에서 소원해진 삼촌의 비극적 결말. 현대판 고려장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지요코>

풍선 나눠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핑크색 토끼 탈을 쓰자, 나의 눈에 이상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봉제인형들의 행진. 점장님은 건담, 나는 내가 어릴 때 지독히 아꼈던 토끼 인형 지요코, 심지어 나이 지긋한 여성은 바비 인형으로 보인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겼던 추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추억이 겹쳐져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추억이 없는 사람들은 어떡하지?

사람 모양 그대로 그녀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손처럼 생겼다.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돋은 여윈 손이다. 손끝이 소년과 어머니의 어깨를 붙잡고 있다. 거기다 굼실굼실 움직이고 있다. 등에 거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 -73

 

<돌베개>

추운 겨울. 한 소녀가 마을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사인과 범인은 밝혀졌다. 하지만, 억울한 소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이 난무한다. 소녀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에는 급기야 7가지 버전의 유령 소문이 나타나게 되는데...

사춘기에 접어든 딸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은 아버지. 어리기만 한 딸인줄 알았는데, 제법 관찰력도 있고, 딸이 설명하는 사건 개요도 탄탄하다. 게다가, 하~, 딸의 남자친구라...인정해줘야 하나...

사람은 변한다. 변하지 않으려고 결심해도 변한다. 그래서 인생은 우스꽝스럽고, 슬프고, 묘미가 있다.

 -101

 

<성흔>

다섯 편의 단편 중 가장 길면서

읽고 나면 오싹해지는 작품이다.

나는 그를 알고 있다.

십이년 전 사월의 어느 아침, 사이타마 시내의 자택에서 자고 있던 생모와 그녀의 내연남을 군용칼로 찔러 죽인 후 사체의 목을 절단, 태연히 교복을 갈아 입고 등교해 같은 흉기로 담임이었던 여선생에게 상처를 입히고 인질로 붙잡아 경찰과 두 시간 넘게 교실에서 대처했던 열 네 살 소년을. -137

끔찍한 사건이다. 거기에 더해 인터넷에서 같이 악플을 달던 익명과의 만남. 이라는 구조를 겹쳐 묘하면서도 섬뜩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다섯 편의 이야기 모두 나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이 더욱 오싹하고 섬뜩하게 다가온다. 책을 잡으면 손을 놓지 못할 정도로 흡입력이 있어서 새벽까지 읽게 되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는 후닥닥,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던 아이의 곁을 파고들고 말았다.

아이들의 온기가 그리웠다.

바짝 곤두선 내 신경을, 혼곤히 잠든 아이들의 입에서 내뿜어져 나오는 숨소리와 작은 잠꼬대, 코 끝에 감도는 옅은 살내음 같은 것들이 누그러뜨려 주었다.

살과 살을 맞대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서로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하는 일상의 소중함이 다시금 떠올랐다.

내가 지키지 않으면 이 소중한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자칫 한 발 잘못 디뎌, 사건의 ‘단초’를 만들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아이들의 품은 아직도 따뜻하다.

나도 곤히 잠에 빠져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