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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딱 한 개만 더 ㅣ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가가 형사의 눈이 번뜩이면, 사건은 해결되지만, 우리의 가슴은 뻥 뚫린다.
그가 파헤치는 사건은 모두 우리 중의 누군가가 한 번쯤은 품었음직한 마음 속의 어둠이 표출된 사건이기 때문에 가가 형사가 정곡을 콕 찌르면 움찔하게 된다.
여기, 이번 책은 5개의 사건 파일이 모인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가 구성을 달리 하면서, 범인을 압박해가는 가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가가 형사다.
1.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잠자는 숲>의 한 부분이 확대되어 이 이야기가 탄생된 듯 싶다. “발레에 관심이 있다.”는 가가 형사의 말을 그냥 흘려 듣게 되지 않는 것은, <잠자는 숲>에서 있었던 발레리나와의 로맨스 때문이 아닌가 한다.
유게 발레단의 사무국 직원 하야카와 히로코가 맨션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 가가는 처음부터 범인을 15년전 <아라비안 나이트>의 댄싱 히로인이었던 데라니시 미츠요로 점을 찍고 그녀를 압박해나간다. 가가가 어디까지 알고 질문하는지 모르는 미츠요는 결정적인 한 마디로 쌓아올린 알리바이를 허물어뜨리게 된다.
“당신의 범행은 완벽했어요. 공연한 말을 지어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최대한 거짓말을 줄이려고 했지요. 당신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거짓말을 딱 한 개만 더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48
완벽한 추리에 더해서 마지막 한 마디를 유도해 내는 가가의 냉철함.
무릎을 ‘딱’ 하고 안 칠 수가 없는 깔끔한 사건 처리가 아닌가.
2. <차가운 작열>
이 사건은 엄마인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사건이다.
주부 우울증. 산후 우울증.
남편이 무관심과 육아의 스트레스로 인해 파친코에 빠진 여성의 비참한 이야기다.
거기다, 남편의 직업이 공작기계 회사원이라는 점이 이 사건을 한층 그로테스크하게 만든다.
찌는 듯이 작열하는 여름날. 돌이 채 안 된 아이를 혼자 눕혀 두고, 엄마가 파친코에 다녀 온 사이, 아이는 그만 질식사하고 만다. 망연자실하고 있던 아내를 발견한 남편은 분노하여 목을 조르게 되고, 도둑의 소행으로 가장한 채, 죽은 아이를 숨길 도리를 강구하다, 회사로 가져간다. 열 경화성 수지를 사용하여, 아이의 정수리에서부터 몇 번을 부어 가며 굳힌다.
어떤 정신 상태로 자신의 아이에게, 아내에게...
차가운 작열이라는 제목이 으스스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사건이다.
3. <제 2지망>
자신이 잃어버린 꿈을 아이에게 투사하여, 아이의 스케줄을 철저히 점검하며 아이에 매달려 살던 엄마. 남편과 이혼까지 불사하며 말이다.
“당신한테는 졌다. 하지만 리사를 불행하게 만들면 당신 용서 안 해.”-141
이제 궤도에 올라 올림픽에 대한 기대도 해 볼만할 때. 엄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버렸고, 남편 아닌, 다른 남자에게 틈을 허용해 버렸다. 그런데, 그 남자가 그녀의 집에서 목이 졸려 죽은 사건. 여자는 강도의 짓으로 몰다가, 자신에게로 포위망이 좁혀 들어오자, 자신이 한 일이라고 자백한다.
그러나, 진실 앞에 그녀가 할 수 있었던 한 마디 말.
“저애만은..., 꼭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는데.”
자녀교육에 유달리 집착하는 우리나라 엄마들이 읽었다면 흠칫 했을 내용인 것만 같다.
4. <어그러진 계산>
부부란 뭘까?
마음을 완전히 터놓는다고 생각하는데도 다른 한쪽이 마음을 닫으면, 그것은 완전한 일방통행이 되고 만다.
비극적인 사건의 씨앗은 의사소통의 부재가 아닐까.
남편은 아내를 하인 부리듯 하고,
“살살 봐주면 기어오르니까 평소에 바짝 조여야 돼. 너희도 마누라 얻으면 절대로 만만하게 대해서는 안 돼. 여자라는 건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거라고.”-190
라며 시동생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토하는 남자였다. 점점 잘못한 결혼이라며 후회하는 마음이 들 무렵 알게 된 남자와 불륜에 빠진 여자. 여자는 불륜남과 함께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지만, 계산이 어그러져, 남편이 그 계획을 알게 된다. 결국, 그녀의 침대 밑 나무 틀에 얼음과 보냉제와 함께 몇날 며칠 얼려져 있어야 했던 것은, 잠시나마 ‘마음에 감춰둔 사랑’을 꺼내 보여준 불륜남의 시체. 국화와 마거리트로 그의 가는 길을 밝혀주려고 했던 그녀는, 그러니까. 두 남자의 사랑을 같이 받았던 것이겠지. 그녀가 원했던 사랑과, 벗어나고 싶어했으나,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랑.
5. <친구의 조언>
가가의 친구네 집 이야기.
대학에서 같은 사회학부였던 하기와라라는 친구.
운전 도중 졸음이 밀려와 교통사고를 낸 친구를 문병 온 가가. 우정이라는 이름을 걸고, 쓴소리를 해야만 했다.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 것은 하기와라의 아들 다이치의 물고기 그림.
“내가 말했었지. 다이치는 순수한 아이야. 자기가 본 대로 그렸거든.”-253
사회적 편견을 받고 있는 ‘게이’라는 특이한 소재가 나온다. 내 아내가 게이라니...
마지막 장까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추리가 쉴새없이 연결된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동시대를 살고 있어서 나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본격적인 추리소설부터, 지금의 사회성 짙은 소재를 다룬 사건들까지. 어디까지가 그의 한계인지, 내가 지켜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