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
내 나이 30대 후반. 나는 청춘을 되돌아 보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면, 100세 시대라는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한 번쯤 과거와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프고 시리지만, 꾹꾹 담아둔 내 아픈 청춘을 다시 헤집고 싶지 않지만, 불편하더라도 용기를 내어 부딪쳐 보련다. 짧은 내 언어 탓에 형상화 되지 못하고 빙빙 돌기만 했던 마음을, 이응준이라는 천재적인 작가가 풀어놓은 청춘 이야기에 얹어 읽고서 흘려보내고 싶다. 마흔이 되기 전에 꼭 해야만 할 일.
읽은 후-
이렇게 스산한 청춘 소설을 스물여섯의 나이에 썼다니.
나도 묻어버리고 싶고 흘려버리고 싶은 청춘이 있었지만, 지금 되돌아 보니, 그러했구나. 하고 깨달을 뿐. 그 때는 청춘인지도 몰랐던 그 시절.
내 스물여섯은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급급했던 하루살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용서하지 않겠어, 영원히!”
이 말이 주문이 되어 내 과거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행복했던 날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단테<신곡>에서
라는 글이 소설 시작하기에 앞서 나타난다.
나는 이제 행복했던 날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행복했던 날은 아예 있지도 않았던 듯. 그저 지금과 앞으로의 날들만 생각하며 산다. 그렇지만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있었던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과거에 행복했던 날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그저, 기억의 강에 흘려보내고 새로운 행복을 찾아 떠나고 싶다는 것일 뿐.
형은 나를 사랑했다. 나도 형을 사랑했다.-31
충격적인 울림을 주는 문장이다.
배다른 형제로 만난 주인공 서문하와 네 살 터울의 형 서인하. 둘의 관계가 어떻기에 이런 말이 나오지? 갸웃.
살짝 천박한 매력의 엄마 손을 붙잡고 장미정원의 성에 입성한 주인공 서문하. 지적인 외양의 형 서인하와 도무지 무서워 말도 못붙이겠는 근엄한 아버지를 만나 가족이 되었다.
그렇다.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것이 아니라, 싹둑 잘린 종이를 풀로 이어 붙이듯이 만들어진 가족.
그것도 반듯하게 붙여진 종이가 아니라 살짝 어긋나게 이어 붙여진 가족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완벽하게 예의바르고 착한 아들이었던 형 인하는 아버지가 안 계실 땐, 엄마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건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커튼이 내려지기 전까진 무대에 충실한 표정 없는 배우들.
형 인하는 어쩐 일인지 문하를 동생으로 받아들인 듯했고, 함께 별자리도 보고 정원도 누비며 멋지고 완벽한 형을 연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은 동생의 얼굴을 할퀴고 만 고양이를 정원의 사과나무에 목매달아 죽인 후 그 나무 밑에 파묻는다. “널 위해서”라고 말하며.
문하는 형의 두 얼굴을 목격한 그날부터 방문을 잠그고 잔다.
“네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그 때 말해줄게.”라며 한사코 동물원의 파충류 우리에서 본 것을 말하지 않았던 형의 그 비밀스런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될 무렵. 그 때가 바로 인하가 어른이 된 시기이며, 고뇌하고 거부하며 한사코 즐기기를 거부하던 청춘의 시작점인 듯싶다.
“나는 사실은 파충류의 먹이로 키워진 흰쥐였다. 넓은 우리에 놓여 졌지만, 곧 시작될 파충류들의 식사 시간에 투입된 사냥감으로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불안과 두려움에 눈만 굴릴 수밖에 없는 불쌍한 흰쥐. 눈은 더 이상 튀어나올 수 없을 만큼 튀어나와 있으며,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듯이 세차게 뛰어대고, 숨은... 가쁜...죽음을 눈앞에 둔 흰 쥐.”라는 고백을 인하는 문하에게 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사업의 확장에 정치판 가세까지. 아버지는 승승장구 내달렸고, 그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국립대 법학부 입학 까지 한 형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었고 인하는 백에 가려진 흑의 세계를 지배하는 어둠의 마왕으로도 살아가고 있었다. 문하에게 잠깐 비춘 적이 있는 인하의 친엄마와 앓는 모습이 닮았던 여자친구-하얀 하여-가 죽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집안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 때. 아버지를 미워하게 만들었던 형은, 문하 어머니와의 충격적인 정사씬을 선물로 남기고, 두 팔을 활짝 편채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로부터 시작된 방황의 나날들. 과거와 쉽사리 화해하지 못하던 문하는 가합동의 카페<하늘밥도둑>에서 산타 페를 만나고 산타 페의 미친 이모를 이야기 속에서 만나고, 수인을 만나고, 물귀신, 미저리 등등 평범함의 언저리를 맴돌던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무렵에는 이미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고,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문하는 과거의 강을 건너 왔다.
하~아.
찌는 듯한 여름내내 태양에서 가장 가깝던 옥탑방에서 스물여섯 작가의 손에 의해 탄생하게 된, <설국과 장미정원>으로부터 시작하는 청춘의 기억.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가족이라는 굴레는 문하의,그리고 우리의 생애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시금 행복한 현재와 미래를 설계하려면 그 시커멓고 어두운 과거라는 터널에 억지로라도 걸어 들어갔다 빠져나와야 한다.
청춘, 혹은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데 이 책은 훌륭한 안내자의 역할을 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내 과거와 만났고, 인사했고, 잘 돌려보내주었다.
시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언어로, 하얗게 뱉어내는 숨이 눈앞에서 입김이 되어 사라질 듯 그 차갑고 청명한 겨울 공기까지 환상적으로 묘사된 설국.
그 설국을 거닐다 빠져나온 곳에서 만나게 된 느릅나무. 그 아래 천국이 숨어 있었다. 한동안 아무 나무라도 나무 그늘 아래 서면, 이 책이 생각날 것 같다.
하얀 목련이 툭툭 잎을 떨구고, 이제 화안한 벚꽃이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 계절이다.
봄바람이 날리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어느날 후두둑 떨어지고 말 일이다.
청춘도 계절처럼 , 봄날의 벚꽃처럼 왔다 가는 것.
혹독한 청춘을 보냈다고 우울해 할 일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도 내 느릅나무를 찾아 그 아래 천국을 숨겨놓아야지.
내 아이들의 유년 시절엔 더 이상 어두운 그림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