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오의 하늘 1 -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 다큐멘터리 만화 요시오의 하늘 1
air dive 지음, 이지현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요시오의 하늘> 1-6권

 

9살 채원이는 다 읽더니 한 마디 한다. “재밌네, 엄마?”

38살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대꾸한다. “그게 다야? 엄마는 너무 슬퍼서 말도 못하겠는데.” 눈물이 방울져 턱까지 흐르다가 말라붙었다. 눈물이 내 얼굴의 온기마저 빼앗아 갔나 보다. 두 뺨이 선득하다.

 

 

요시오는 절망의 ‘하늘’을 희망의 ‘하늘’로 바꾸는 소아뇌신경와과의사다.

 

이 책 <요시오의 하늘>은 실존하는 다카하시 요시오라는 의사와 작은 생명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취재해서 쓴 이야기다. 1권 표지에 채집망을 어깨에 멘 채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서 있는 장난스러운 소년의 모습이 있다고 해서 소년명랑만화 쯤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나 역시 1권 표지모델에 속아 잠깐 시간 때우기 용으로 볼까 하며 집어 들었지만, 곧 깨달았다. 가벼운 책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2권 읽을 때엔 안 울어야지. 빨리 책을 다 읽으려면 말이야.’ 하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 결심은 금세 무너지고 만다. 내가 마음이 약해선가 싶어서 이미 책을 다 읽은 사람에게 물어봐도 역시 “너무 슬프지?”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1권을 보고 안 운 건 우리 남편 뿐이다. “왜 우는데? 뭐가 슬프다고?” 그렇지만 우리 남편 강한 척 하는 걸 거다. EBS명의 할 때는 아픈 애들 링거 맞거나 혹이 부푼 모습 보면 마음 아프다면서 다른 채널로 옮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각 권마다 1화부터 7화까지의 이야기들이 있는데, 1화부터 4화까지는 <어느 한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각각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5화부터 7화까지는 의사 요시오의 <탄생편><소년편><청년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가족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야말로 눈과 코에 고춧가루를 뿌린 듯 얼얼하고 쓰라린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요시오의 이야기로 넘어가서는 빙그레 웃거나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그 과정의 반복이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될 것이다. “책을 보더니 완전 맛이 갔구만. 눈물 콧물 비오듯 쏟아내더니 이젠 또 실실 웃네?” 그러나 마음을 다해 읽다 보면 왜 그런 ‘정신 나간 ’ 사람이 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공감하게 될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특히나 아이가 있는 엄마나 아빠라면 누구나.

 

 

이 책을 본 후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누구에게? 내 아이들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들. ‘건강하게 자라 주어서 고맙다.’ 아이들의 뇌에 다가오는 그 무시무시한 병은 예고되는 것이 아니기에 나라고 마음 푹 놓고 지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9살, 6살 이만큼이나 자라도록 큰 이상 없이 자신들의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내 주고 있는 아이들이 대견하지 않을 수 없다.

 

6권까지 읽는 동안 여러 아이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이 내 가족의 일인 양 몰입해서 읽었다.

 

내 아이가 뇌수종이라면? 작고 가녀린 팔뚝에, 혹은 손등에 주사 바늘을 꽂고 하루종일 병상에 누워 있다면? 너무 어려서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작은 아이가 눈으로 말하며 ‘힘들어요’ 신호를 보낸다면? 아님.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컸는데도 온몸의 힘이 빠져, 아니면 병 때문에 말을 못하고 힘없이 쳐져 있다면? 부모인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남편은 일하러 나가 있겠지. 아이가 둘이니, 다른 건강한 아이에게는 신경 쓸 여력도 없겠지. 무수히 많은 가정과 상상 속에서 나는 그저 힘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며 앉아 있는 엄마였다.

 

 

그러나 요시오의 환자들은 씩씩했다. 요시오는 아픈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할 수 있다고 북돋워주고 아이의 아픔 앞에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는 부모를 다독이고 격려한다. 그리고 함께 헤쳐 나가자고 얘기해 준다. 그렇다. 아이들은 강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겨내려는 의지가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는 처음엔 마음이 아프고 ‘왜 내게 이런일이?’ 하며 분노하고 울부짖지만 곧 이겨내게 되다. 요시오의 치료를 받으면서 한 줄기 희망을 붙드는 아이가 있는 한 부모는 강해져야만 한다.

 

 

나는 무기력하게 회피하고 외면하는 부모여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아이들은 강하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이를 믿고 함께 헤쳐 나가는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설사 아이가 잘못되어 이제는 다시 만나볼 수 없는 저쪽 세상으로 건너갔다고 하더라도 살아있는 부모와 나머지 가족은 살아 내야 한다고 요시오는 말했다.

 

특히, 몇 권에서였던가.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아이가, 조금만 더 견뎌내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생활 할 수 있었을 아이가 끝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말이다. 젊은 어머니는 오열하며 쓰러진다. 요시오는 “괜찮아. (가족이 올 때까지)내가 같이 있어줄게.”하고 무뚝뚝한 위로를 하며 제단에 향을 피운다. 요시오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을까. 잠시후 바다가 보이는 작은 방에 혼자 남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이 나온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와 계속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젊은 어머니는 이제야 아이를 마음 놓고 안아 본다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피에타.

얼마나 성스럽고 거룩한 장면일 것인가.

순식간에 가슴은 먹먹해져 오고, 꺽꺽 내 숨을 막으면서까지 치받쳐 올라오는 오열 때문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 얼굴은 일그러지고 눈물에 범벅이 되어 차마 쳐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을 것이다. 휩쓸리지 않으려는 듯 꼭꼭 구석에 숨어 있던 내 마음의 불순물, 찌꺼기가 다 떠내려 갈 때까지.

마침내 눈물이 그치고 다시 그 장면을 바라보았을 때, 요시오라는 의사는 정녕 한 줄기 빛이었다.

충분히 애도의 마음을 다하고 아이를 떠나보낸 후에는 남은 가족들끼리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시로라는 의사는 실존 인물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고 그걸 실어 나르는 의사가 되었을까?

이쯤에서 요시오라는 의사의 일생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각 권에서 요시오의 탄생기, 소년기, 청년기가 펼쳐지지만 정작 중요한 장면은 1권에 나와 있다. 요시오가 다카시 가족의 차남 코스케에게 수술을 하러 들어가면서 떠올리는 인물-마음 약해지지 않게 기운을 북돋워 주는 인물-들은 바로 그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 큰누나, 작은 누나. 그렇다. 요시오는 바로 가족의 힘으로 매 순간을 사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이렇게도 중요하고 큰 역할을 하는 둥지다. 나는 부모로서 내 아이들에게 어떤 둥지를 만들어 주고 있나? 든든하고 의지할 수 있는 울타리 역할을 해 주고 있나?

 

 문득 내 결혼 생활을 돌이켜 본다. 내 육아 방식도 뒤돌아 본다.

 

 

1권 표지 모델로 활약한 개구쟁이 꼬마 소년. 그 소년은 무지무지 뛰어 놀기 좋아하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소년이었지만 심성만은 곧고 따뜻했다. 그리고 곤충 관찰을 좋아해서 한동안은 땅속에서 기어나온 매미 새끼들을 잡아 집 커튼에 붙여 놓고 ‘나와라, 나와라’하면서 탈피하는 모습을 기다리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한밤중에 매미가 부들부들 떨면서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다가 매미를 쑥 잡아당겼더니 그만 매미가 거기서 탈피를 중단해버리는 일이 일어난다. 거기서 요시오는 “자연은 있는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어릴 때부터 자연 속에서 고운 심성을 기르고 곤충에게서 교훈을 얻고 그렇게 소년기를 보낸 요시오는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기본기를 갖추게 된 것이라고 본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 반장이었던 소년은 의사가 장래희망이라고 하면서 공부하고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데 반해서 요시오는 의적-우리나라로 치면 홍길동이나 을지매 정도?-이 꿈이라는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이름처럼 義男이 되고자 했던 것인지도.

그래서 반장보다 더 정이 가는 情이 넘치는 아이로 자라나게 된다.

 

 

 

요즘은 아이도 많이 낳지 않아서 한 집에 하나 아니면 둘이다. 부모는 그 아이들에게 모든 정성을 다 기울인다. 그래서 내 아이는 무엇보다 귀중한 존재고 남보다 뒤쳐져서는 안된다. 너무 똑똑한 부모도 많아서  아이들은 일찌감치  '알아서' 똑똑해져야 한다.  일하느라 바쁜 엄마들도 많다. 일하는 엄마들은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어려서부터 선물세례를 퍼붓고, 일하느라 늦는 엄마의 아이들은 하루종일 대여섯 군데의 학원을 순례해야 한다. 물론 <언니의 독설>의 저자 김미경처럼 일에서 성공하고 육아에도 성공해서 아이들이 저마다의 꿈을 찾아 걸어가기 시작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워킹맘도 있다.

그이처럼 몇몇의 성공 사례도 있긴 하지만, 그저 나머지 대부분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현실에서 나는 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나는 전업주부이다. 그래서 일하는 엄마만큼 바쁘지는 않다. 그리고 느긋하게 키우려고 마음도 먹었다. 그렇지만 내 주변은 모두들 너무 앞서가고 빨리 나아간다. 예전같으면 초등학교 1학년에 연필잡고 한글 읽고 쓰고 했다. 1학년에 산수 계산도 손가락 꼽아 가며 천천히 세어서 했다. 그런데 요즘은 만 3세부터인가 <연필잡고> 라는 책이 나온다. 애들은 그 때부터 연필을 잡아야 하는 세상인 것이다. 한글을 일찍 떼고 수를 줄줄 세고 학습지 한 두 개는 기본. 대여섯 살 아이들이 학습지에 코를 박고 손가락 셈을 하며 답을 써내려 가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요시오의 어린 시절 하늘은 높고 푸르고 맑았을 것이다.

지금은 아침이면 도시의 빌딩숲, 아파트 숲 사이로 스모그가 낀다. 하늘, 푸른 하늘, 높고 푸른 하늘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나는 내 아이들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 놀다 놀다 지쳐서, 정신의 명랑함이 무르익고 무르익어서 “이제 뭘하지?” 할 때, 공부라는 걸 시작했으면 좋겠다. 요시오처럼.

문제는 '나는 주변의 부모들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내 자신을 바로 세우고 지탱해 나갈 수 있는가'다. 아이들은 강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부모는 옆에서 거들 뿐. 농구에서 슛을 할 때 왼손은 그저 거들 뿐이라는 명언을 슬램덩크의 강백호는 남겼다. 큭큭.

어려서 크게 앓은 경험이 있거나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 하던 아이들은 철이 빨리 든다. 애어른이 되는 것이다.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고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그렇지만 그런 아이들은 밝게 웃으며 숨겨도 티가 난다. 애처롭고 가엾다.

 나는 내 아이들이 부모를 앞에 두고 애어른이 되는 것이 싫다. 부모 노릇 못한다고 꾸중 듣는 격 아닌가. 아이답게 소리치고 뛰어 놀고 다른 어른들한테 혼도 나보고 했으면 좋겠다. 버릇 없게 키운 거 아니고 나약하게 키운 거 아니면 된다. 그리고 대천천(우리 마을 앞 개천)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늘어지도록 뛰어 놀았으면 좋겠다. 아프지 않으면 당연히 누리고 살아야 할 아이들의 인생 아닌가. 다른 부모 따라잡으려다 애들 망치기 싫다. 어려서 똑똑하면 뭐하나. 다 키워서 세상 저버리는 마음 병든 아이들이 수두룩한데. 다 커서 부모 원망하고 얼굴도 안 보고 사는 아이들이 또 얼마나 많은데.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거다. 아낌 없이 주는 나무가 되는 거다.

 

요시오의 하늘을 읽고 오랜만에 부모 노릇하는 게 어떤 건지 새로이  되새겨 보게 되었다.

7권에서는 요시오와 같은 길을 가는 그의 동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한다.

이젠 좀 덜 울게 될까.

청년기를 지나 창창하게 전개될 그의 앞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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