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좀 하십니까
노성진 지음 / 멘토프레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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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좀 하십니까>

 

우스개 소리 하나가 떠오른다.

상과대학 한 강의실에 엄숙함이 감돈다. 중간 고사 당일, 조교가 바야흐로 시험 문제를 칠판에 적으려는 순간이다.

학생들은 이른바 “족보”에서 콕 집어 공부했던 그 문제가 나오길 간절히 빌고 또 빌고 있다. 그 문제는 바로,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모두들 레이저를 쏘듯이 강렬한 눈빛으로 염원을 모아 조교의 손 끝에 초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조교가 쓴 첫 글자는...“도..”

잇새로 장탄식이 튀어나온다. “아...망했다.”

그렇지만, 포기하기엔 이르다.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 학생들은 끈기 있게 쳐다보고 있다.

그러더니, 곧바로 눈썹 휘날리며 답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문제는? <도! 대! 체!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 나는 물음의 명제가 나오면 그 물음에 “도!대!체!”를 붙여 읽는 습관이 들었다.

<디자인 좀 하십니까?> 이 책의 제목도 물음표이기에 붙여 읽어 봤다.

<도!대!체!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디자인 전공의 대학에서 한 번쯤은 시험에 나왔을 법한 문제이지만, 대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다.

디자인 박사학위까지 받고 실무 경험도 다양한 백전노장 작가가 어느 날 대면하게 된 이 문제. 날카로운 비수의 날을 품은 그 질문 앞에서 우리의 작가는 성실함을 다해 답변해 주었다. 힐긋 던진 질문에 대한 답으로 책 한 권이면 성실함을 넘어 우직함을 보여 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특별한 사람을 경원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미술 전공자들은 색채 감각, 균형감, 통찰력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옷차림 하나만 보아도 대번에 표가 난다. 내 친구 중에 다리가 유달리 짧은 미술 선생이 하나 있는데, 그녀는 너덜너덜한 청바지를 단을 접어 입어도 다리 짧은게 표가 안나고 ‘나도 저렇게 입어봤으면...’싶을 정도로 남다른 패션 감각을 자랑한다. 내가 하면 촌스러울, 아방가르드하게 천연 염색된 물빛 머플러도 그녀가 색깔 맞춰 입은 티셔츠에 척 하고 두른 모습은 패션 화보의 정석, 바로 그것이다. 그녀의 노하우가 궁금해서 물어보면 그녀은 “그냥 되는 대로 입는 건데.”하고 쏘~쿨 하게 대답한다.

아~ 부러워라.

 

그런데, 이 책의 저자가 풀어놓은 술술 잘 읽히는 수필 형식의 글들을 읽어 보면 그들-미술 전공자들-의 노하우는 분명, 있긴 있는가 보다, 하게 된다.

이 책에서 작가가 쓴 단어 중에 특히 마음에 드는 말-풍윤함과 허허로움.

대조적인 뜻을 가진 단어들임에도 괜시리 묘하게 어울리면서 한 줄 안에 아울러 쓰이면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공간 디자이너 노성진.

그의 글에서는 풍윤함과 허허로움, 그리고 인문학의 향기가 느껴진다.

세련되고 자로 잰 듯 반듯한 이미지가 느껴지는 디자이너 라는 이름을 달았는데도 그의 이미지는 풍윤함과 허허로움의 사이에 있다.

 

광나루 한강변 작업실에서 양말을 벗어 맨발로 바닥을 밟고, 격식을 차린 거추장스러운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주위를 말끔하게 치웁니다. 그리고 유리작업대 앞에 앉습니다. 이 방식은 나의 아주 오래된 버릇입니다.-36

 

테헤란로 부근의 대치동 뒷골목에 있던 오래된 양옥집을 카페‘하우’로 재탄생시킨 그가 감성노트에 남긴 글을 읽었을 때는 그가 건축 디자이너인지, 문인인지 헷갈릴 정도였으니, 그는 참으로 감수성이 대단한 사람이다. 꽁지머리 늘어뜨린 이외수만 감수성 있는 사람인가, 어디.

처갓집이 있는 여주 용담리에 몸 담았던 시절이 그대로 그에게로 와 안겨 체화되어서인지 시골 사람들의 순박한 모습을 흙을 품은 연필로 크로키를 그릴 줄 아는 그 사람,

 컴퓨터 작업은 안하고 종이 위에 결과물을 내놓는 그 사람,

 재능기부 프로젝트 ‘팀 10그룹’의 일원인 그 사람.

나는 그 사람의 ‘인간다움’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의 디자인에는 人이 들어 있다.

 

반질거리고 매끄러워야 디자인의 산물인 양 소비자를 현혹하고, 손재주나 쇼맨십이 재물로 연결되는 것이 예술가나 디자이너의 길인 듯 고착화되어 있는 현 풍토에서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181

라는 자기고백은 그의 겸손함이 지나친 대목이다.

 

국민 고향 하동과 에코뮤지엄의 본보기 담양에서부터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강남까지.

도시와 관련해서는 그의 인문학적 글쓰기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그는 박학하다.

그의 집 개울 건너에 살고 있다는 전설적인 인물, 논객 중의 논객, 김년오 선생을 그는 부러운 듯 말하지만, 내게는 그가 바로 김년오 선생 같이 매력 넘치는 이다.

칸딘스키, 아이웨이웨이, 매염방 같은 인텔리겐차를 소개하고, 장예모 감독이 이루어낸 인상 시리즈에서 컬처파워의 중요성을 말하는 그는 현재 우리 디자이너가 서 있는 위치를 정확히 직시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미래를 내다보고 집안·건의하며, 지속 가능한 프로젝트에 모두의 목소리와 에너지를 모으고, 그것들이 현실화되도록 지켜나가는 초석이 되는 디자이너가 되라고 조언한다.

 

풍윤함과 허허로움의 사이에서 균형을 지켜나가는 그 사람.

사람 냄새 나는 글을 쓰고 제자랑에 요란 떨지 않는 그 사람.

도시와 인문학의 소통에 힘쓰는 그 사람.

그가 남긴 명언을 전한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예술과 디자인은 하나이고,

그것들이 인간의 가치와 풍요를 위해

의도되었거나 상호 보완되었을 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배웠습니다.-70

 

디자인 좀 하십니까?

그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기에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즉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 책을 내기까지 고민을 계속했다.

나는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쉽게 대답하고,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헉~’하고 급습을 당한 듯 당황하게 될까?

‘당신의 집은 안녕하십니까?’ 같은 쉬운 질문에 당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전공을 살린 삶은 못 살더라도 집안 하나만큼은 당당하게 지켜내는 주부가 되겠다.

디자인 좀 하십니까? 작가는 디자인을 생각하고, 나는 그 중에서 人을 생각하겠다.

사람답게 사는 법.

혹시 또 알겠는가?

나도 책 한 권 내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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