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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ㅣ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평점 :
<64 육사-정치냐, 정의냐...>
64를 육사라 읽는 순간 지옥행 열차는 달리기 시작한다.
소리칠 수도, 탈출할 수도 없다. 그저 몸을 맡길 뿐.
그렇다면, “같은 개라도 맹견이 되어 주마.” 조직 안은 지옥이니까. D현경의 홍보담당관 미카미는 과연 ‘정치’를 택할 것인가, ‘정의’를 택할 것인가.
피라미드의 밑바닥에서, 중간층에서, 꼭대기에서 오늘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 가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각각의 사람들 눈에 비치는 것은 똑같이 되비치는 하늘과 구름일 뿐이데, 사람들의 삶은 어찌 이리도 다를까.
그리고 각자가 품고 사는 생각은 어찌 이리도 다른 획을 그리고 있을까.
착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면 안되는 건가.
책장을 덮는 순간 무수히 날아드는 생각, 생각, 생각들.
사건이 끝나고 소설이 끝났다고 안심해선 안된다.
이 소설은 읽기를 마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신체 추형 장애를 앓고 있는 딸아이 아유미의 가출로 정신 빠진 나날을 보내고 있던 D현경의 홍보담당관 미카미.
형사 생활 3년차에 홍보실로 발령받아 잔뜩 낙담했던 미카미는 1년만에 다시 형사부로 복귀했지만 올봄, 홍보실로 돌아가게 되어 잔뜩 심란해 있던 참이다. 형사부에서는 ‘전과’가 있는 자신을 내친 것이라 여겼지만 형사부로 그럴듯하게 복귀하기 위해서는 홍보담당관으로서의 역할을 잘 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기고, 홍보실 ‘자치’를 과제로 삼고 열심히 뛴다. 그러던 그에게 내려진 경무부장의 명령. “청장이 시찰하러 온다. 목적은 ‘64’ 같은 강력 범죄는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의사 표현. 피해자 가족 위문 순서도 있으니 ‘64’유족의 동의를 얻으라는 것.”
‘64’ - 14년 전 그 날. 쇼와 64년(1989년) 1월 5일. ‘아마미야 쇼코 유괴 살인사건’을 가리키는 기호로, D현경 관내에서 처음 일어난 강력 범죄사건이었다. 몸값 2천만 엔을 고스란히 빼앗겼고, 납치된 일곱 살배기 소녀는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직 범인은 붙잡히지 않았다.
청장의 64시찰을 기점으로 현경 내부에서 형사부와 경무부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시작된 것을 미카미는 직감했다.
딸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답시고 미카미를 틀어쥐고 있는 경무과장의 명령대로 움직일 것인가, 아직 미카미가 마음속으로 기대고 있는 고향같은 곳, 형사부의 편에 설 것인가. 미카미는 갈팡질팡한다.
형사부는 왜 반란을 일으킨 것이며, 64의 유족 아마미야는 청장의 위문방문을 왜 거절한 것이냐. 청장 시찰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뛰는 미카미 앞에 항상 걸림돌이 되는 한 사나이. 경무과 조사관 후타와타리. 그는 무엇을 위해서 미카미의 앞을 가로막으며 사건의 핵에 다가가려는 미카미를 자극하는가.
형사부와 경무부의 관계가 악화된 지금, 미카미는 누구의 눈에도 절대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비쳐질 것이 틀림 없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독자적으로 정보를 찾기 시작한 미카미. 그 과정에서 나온 ‘고다 메모’라는 단서에 천착하기 시작한 미카미는 결국 64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고, 청장 시찰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아내기에 이른다.
여기서 큰 사건 한 줄기는 일단락 되지만 64사건의 진실과 청장 시찰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된 미카미는 커다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과제는 바로 미카미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
특종을 잡아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기자들과의 사투에서 미카미는 자기 자신이 설 ‘자리’라는 것이 어디인지를 깨닫게 된다. 경무부의 개도 아니고 ‘전과’라 낙인찍힌 전 형사부의 형사도 아닌 오직 홍보담당관으로서의 자기 자신.
경무부와 형사부의 대치 과정 중에도 홍보담당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려던 그 순간, 형사부에서 날아든 소식은 ‘64’와 유사한 상황의 유괴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 이 사건이 벌어지면서 미카미는 더 이상 청장시찰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청장이 64시찰을 하러 내려오기로 되어 있던 이 시점에 64와 유사한 범죄라니. 미카미는 사건의 진위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기자단과 보도협정 체결을 하고 이 사건에 대한 취재 및 보도를 당분간 자제하기로 한 대신, 기자단에게 보낼 정보를 얻으러 사건 현장에 동행하게 된 미카미. 홍보담당관으로서 사건을 ‘은폐’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와 마음을 같이 하는 그의 홍보 담당 동료들이 보도진들 앞에서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 주는 동안, 미카미는 ‘정의’를 위해 열심히 뛰어야 한다.
사건 발생 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하는 그 순간까지 미카미는 홍보담당관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정의를 지키지만, 난데없이 날아드는 의문 하나. '정말로 정의는 존재하는가'.
정치를 위해 64사건의 치부를 덮어두고 사건 관련자인 고다를 비롯하여 여러 인물들을 사회의 밝은 빛으로부터 격리시켰던 경찰청 간부들.
미카미가 형사가 아닌 홍보담당관으로서 참여한 헤이세이 14년 12월 11일의 유괴 사건의 진실은 자작 사건도, 모방 범죄도 아니었다.
64의 망령에서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스스로 죄책감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64의 진범을 찾아 경찰 앞에 내놓아 준 것이었다. 진범을 찾는 열쇠는 바로 미카미의 집에도 걸려오곤 했던 장난전화. 가출한 딸아이의 전화인줄 알고 희망을 걸고 있던 미카미는 그 집요한 전화가 64진범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알고 아연실색한다. 그리고 딸아이를 찾으려는 마음을 놓아버린다. 64유족인 아마미야와 딸아이를 찾고 있는 자신의 마음이 묘하게 겹치는 순간이었다.
근속기간 12년의 베테랑 기자 출신인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치열한 기자 정신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
미카미가 과연 맹견이 될지 손에 땀을 쥐며 읽어야 했던 전반부에서 새로운 유괴 사건이 일어나는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글을 한시도 눈에서 떼지 않게 만드는 굉장한 흡입력.
조직 사회에 몸 담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조직 내에서의 밀고 당기기가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잘 이해가 안 간다면 요즘 한창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직장의 신>을 참고해도 좋겠다. 라인을 잘 타야 출세한다는 말. 자신을 포함한 가족의 미래를 직장에 고스란히 투자하여 헌신해 온 직장인이라면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내용이다.
정치를 할 것인지, 정의를 지킬 것인지. ‘어차피 개가 될 거라면 맹견이 되어주마’ 라고 부르짖던 미카미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이라면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것. 인간성.
64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것부터 청장 시찰의 어두운 내막까지 미카미가 가려는 곳에 한 발 먼저 도착하여 캐묻고 캐묻던 미카미의 동기이자 경무과 조사관 후타와타리라는 사나이. 마지막 장면은 미카미와 후타마타리의 알 수 없는, 그러나 모든 것을 내포한 대화로 묘한 여운을 남기며 끝맺는다.
미카미도 걸음을 내디뎠다. 구두는 비등비등했다. 양보할 수 없는 것의 무게 역시 그러하리라.
완벽한 시나리오에 걸맞는 완벽한 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