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욕구와 시장 그리고 신학
성정보 지음, 홍인식 옮김 / 일월서각 / 2000년 12월
평점 :
품절
제1장 신학과 경제: 서론을 대신하여
인류 역사에 있어서 승리자 내지는 권력자 혹은 정복자들은 하느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승리한다는 신학, 만약 그런 신학이 올바르다면 우리는 현재도 되풀이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그 수많은 학살과 침략, 약탈로 성취된 승리와 정복도 하느님이 그들의 편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신화에서 보듯, 승리가 반드시 정의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다른 말로 정의로운 자가, 하느님이 함께 하는 자가 항상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비약하면 차라리 하느님이 함께 하는 역사는 세속사에서는 철저한 패배의 역사에 불과할 것이다. 세상의 논리에 따른 그런 승리를 주관하는 신이 정말 신이라면 그 신은 하느님이라기 보다는 악마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전지전능과 같은 신의 속성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신적 존재인 하느님의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악마의 속성이다. 그리스도교적 신앙, 예수적 신앙이 증거하는 신은 패배의 신인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신담론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 승리와 정복, 권력, 경쟁의 윤리를 신의 속성으로 선전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신의 영광의 충만한 성육신은 우리가 잘 아는 바 죽음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로서 자본이 만들어내는 아우라, 곧 물신을 통해 절정에 달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메시아에 대한 개념에 아주 큰 변화를 요구한다.
Jose Comblin은 말했다. "그리스도교는 메시아니즘이 아니다. 다른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메시아니즘의 주제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의 승리로 인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을 선포하고 그 신실함의 이름으로 제국의 우상숭배적 권력에 대항하는 하느님의 사역에 대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절대적인 충성심 때문에 예수 그를 메시아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의 그 하느님이 예수에게 주지 못한 승리를 우리에게는 주실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 때문이 아니다. 세상이 변하리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현존하는 세상의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것, 그 무모한 용기를 나는 차라리 신앙이라고 부르고 싶다. 마치 죽음이 뻔히 보이는, 패배가 자명한 그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예수가 무모한 입성을 한 것처럼 말이다.]
희생자의 자유 가운데 실천하는 사랑을 억압하는 신성화된 법칙(초월적 법칙)의 이름으로 부여된 외부적 강압의 논리인 '희생'이 아닌 연대감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사랑의 실천으로서 '드림의 은사'는 분명 다른 것이다. 단적으로 후자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제2장. 모방적 욕구와 사회적 소외 앞에 선 기독교
1. 욕구 대 필요, 그리고 소득과 부의 재분배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와 욕구의 개념 사이에 생겨나는 개념의 혼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다. ... 여기서 우리는 필요성이 너무나도 쉽게 욕구로 변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만약 우리가 더욱 정의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우리의 투쟁을 전개시키길 원한다면 필요와욕구의 차이,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욕구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과제이다. 부의 재분배에 대한 요구는 빈곤과 궁핍의 수준이 매우 심각하여 그로 인한 해결책이 시급하다는 것에 의하여 정당화된다. 경제성장 자체가 반드시 부의 최적 분배를 의미하지 않는데 그것은 부의 축적을 목적으로 한 경제 모델은 빈곤 퇴치를 위한 경제 모델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부를 증가시키기 위한 생산이 빈곤을 감소시키기 위한 생산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간과했다. ... 필요는 구매력의해 가능해진 욕망인 수요로 대체되고, 생산과정의 목적은 기본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소비를 부추기기 위함이며, 효율성은 섭식을 향상시키기 위함이 아닌 수출을 위한 생산으로 여겨졌다.”
더 나은 분배와 경제ㆍ사회적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대화를 심각한 사회적 불의라고 전제하고 과다하게 필요 이상으로 가진 사람들에게 시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비대중들 대다수는 사회가 좀 더 평등해져야 한다는데 공감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빈자들에게, 특히 시장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자신의 소득이나 부를 감소시키는 경제 정책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요컨대, ‘필요 이상으로 가지고 있는 것’과 ‘필요 이하로 가지고 있는 것’의 차이는 소득 재분배와 사회적 구조 조정을 옹호하는 자들과 시장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들을 가르는 분계선으로서, 필요성과 욕망에 관한 서로 상이한 인식의 차이이다. 전자가 가진 생각은 인간의 필요성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고 후자는 (당연히) 제한이 없는 욕구의 자유로운 행사 권리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와 욕구의 개념의 혼동이다. 먼저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경제 이론과 개인 기업들의 생산은 소비자들의 욕구 만족에 목적을 두고 있다. 다만 그 욕구들이 때때로 필요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그로 인하여 혼동을 빚어낸다. 필요와 욕구를 구분 짓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위한 대화의 시도는 난점에 빠진다.
만일 우리가 부의 소유에 관하여 무한한 욕구의 개념으로부터 접근하면 한계는 사라지고 무한정으로 그 척도의 수위는 올라간다. 당연히 그들의 소득과 부에 대하여 재분배를 문제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우리가 더욱 정의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우리의 투쟁을 전개시키길 원한다면 필요와 욕구의 차이,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욕구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과제이다.
2. 경제발전과 모방적 욕구
소득의 분배 혹은 소득의 편중은 대부분 이미 재화의 생산 과정에서 아니 대중의 성장 과정에서 아니 대중의 출생과 동시에 결정된다. (formal subsumption, real subsumption, virtual subsumption)
1970년대까지 채택된 경제 발전 모델인 ‘수입 대체 산업’의 모델. “공업혁명을 주도한 국가들에 의해 실행되어 온 경제 발전은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실상은 부유한 국가의 소수 부유층의 소비 패턴이 제3세계 국가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식되는 것. 이러한 소비 패턴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의식 속에 확산시켜 놓은 소비에 대한 열망과 정신 분열적으로 가속화된 소비 추구성향에 의해 조건지어졌으며, 소비가 경제 활동 자체와 문명화 과정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소득의 불평등한 분배와 증가해 가는 사회적 소외 현상은 주변 사회에 기술적 진보가 이 같은 형태로 도입되면서 빚어낸 잘못된 결과이다. 선진국과의 노동 평균 생산성의 차이로 인해 후진국에서 생겨나는 소득의 불공평한 분배는 이 사회 내의 엘리트 계층들을 먹여 살리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껏 소비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선진국의 소비문화를 모방한 것이 결국은 소득의 편중적인 분배와 사회적ㆍ경제적 이원화(20 대 80 사회)를 초래했다. 문제는 소비의 모방 욕구가 근대성의 중심부에 있다는 것이다. 근대성의 중심 이데올로기는 진보와 유토피아에 대한 낙관적 희망이다. 물론 그러한 희망은 기독교적 종말론에서와 같이 피안적 세계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술의 진보를 통해 현세의 가까운 미래에 달성될 그 무엇인 것이다. 그 가까운 미래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은 오직 기술발전을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기술개발 논리의 핵심이 바로 이 모방 욕구에 있다. 원시 인류에서 모방 욕구가 차이의 상실을 가져왔고 결국은 폭력을 초래했다는 지라르의 점유의 모방 욕구 가설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들에게 끊임없는 소비의 모방 욕구를 작동시키며 소비문화 자체를 그 자신(자본주의)의 내적 실재로 삼아버렸다.
[지라르의 이론을 경제제도에만 옮겨놓는 것은 현실을 너무 간단하게 보는 것일 수 있다. 탈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추동하는 소비의 욕망은 단순히 재화를 소유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재화의 소유는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로 확장되었고, 유행은 트렌드의 차원으로 진화되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소비문화의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소비를 향유하는 자본주의적 미학적 삶의 주인공 곧 고객으로 호명당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고객은 근대 자본주의적 권력, 즉 생명관리-권력의 관리 대상일 뿐이다.]
오늘의 사치품이 내일의 필수품이 되는 사회, 욕구가 필요로 변해가는 신비로운 전이가 발생하는 사회, 그러므로 하이에크에게 있어 모방 욕구는 이 세계가 더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로 진보하기 위한 촉진제이다. “그래서 발전의 단계에 있는 모든 사회는 배움과 모방의 과정 여하에 따라서 모방 심리의 자극을 낳는 욕구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이 각 개인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방 욕구에 대한 자극물은 시장의 전쟁에 투입되기 위해 시장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장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욕구와 그렇지 못한 욕구를 구별한다.
지라르의 가설에서와 같이 모방 욕구의 기본적 구조는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인 결과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필연적인 결과 위에 기초해 있다. 필요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모방의 욕구에서 시작한 소비문화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무한대로 확장될 욕구를 충족시켜줄 재화의 지속적인 공급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모방의 욕구를 능력에 따른 성과, 자유로운 경쟁의 원리 등과 같은 논리로 용납하고 이를 자본주의 발전의 촉진제로 활용한다. 자본주의에서 연대 의식 혹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물 등의 개념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항상 욕구의 대상이 되는 새로운 상품이 생산되어 나오는 자본주의 경제적 역동성은 부족(항상 욕구와 비례해서)이라는 개념을 매번 확대 재생산하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부족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라이벌 의식과 폭력이 발생할 것이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현실이 빚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욕구를 덜 만족시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에 관하여 소수의 리더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로 답변을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아니더라도 이 사회가 많은 이들의 절망을 불가피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굳이 진보ㆍ모방 욕구의 역동성을 유지해야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지극히 합리적인 그러나 동시에 지극히 신비적인 논리로 답변을 한다. “이미 우리는 근대성의 진보라는 신화 속에서 기술 진보가 우리에게 지상 낙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살아간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대세이다. 세계 대중의 욕망의 좌절로 인한 심각한 국제적 분쟁이나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오로지 빠른 물질적 진보를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한다. 세계 평화와 인류 문명의 생존이 빠른 속도의 진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엘리트들은 바로 이러한 시온으로 대중들을 인도하는 예언자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지금 가나안을 향한 고난의 행군을 계속 하고 있으며 이 행군의 대로에서 발생하는 생태계의 파괴나 능력의 부족으로 낙오하고 소외되는 자는 진보를 향한 필연적 희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시장을 절대화시킬 때, 그리고 그 논리가 초인적 결과를 나타내며 그 논리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저항을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그 어떤 전능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종국에는 신자유주의자들조차도 시장 체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무력함을 고백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축적의 논리, 원가와 이윤의 합리성이 인간의 삶보다 우선적이라는 가치관을 이끌어내는 이 전능함은 우리가 시장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만들어낸다. 시장의 전능함이 만들어내는 우리의 무력함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사람들의 사회로의 통합이나 소외당한 자들의 생존, 인간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생태계의 보전을 위한 그 어떤 시도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전능함의 무력함”이다.
사회의 이원화와 위기를 조장하는 시장의 비극적 폭력이 없는 발전의 개념을 거부하고, 현실의 불평등한 상황을 온몸으로 감수해나가며 여전히 모방성의 욕구에 근거한 경쟁의 발전모델을 지지하는 대중들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3. 낙원의 약속과 필연적 희생
세 가지 가설
1) 경제 성장의 역동성과 관계하여, 대중의 필요성으로 변화된 욕구를 충족시키게 되리라는 약속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는 징후의 가시화. 그러나 이것 또한 기만적인 신화의 일부이다.
2) 모방 욕구와 결부된 근대성의 특성과 연관된 가설. 전근대 사회에서는 무분별한 욕구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사태를 막고자 제도적 방법을 통해 합법적으로(공권력의 권위로) 그리고 무의적으로 개인의 불만과 의태적 욕구를 잠재우는 재산 분배의 메커니즘을 생성, 작동시켜 왔다. 그러나 근대 사회 대중들의 욕구는 진보의 신화와 함께 이러한 억압과 금기마저 뛰어넘기에 이른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장벽이 무너져야 자신들의 욕구영역이 더 넓어지고, 욕구 자체의 결백함도 인정받으리라 믿는다. 제도나 법을 통한 강제적인 욕구의 억압 대신에 기술 진보를 통한 재화의 생산에 승부를 건 것이다. (이는 마치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분석한바, ‘성’을 전략으로 삼아 생명의 강화를 떠맡음으로써 행사되는 권력의 형태, 즉 ‘생명권력’(bio-power)이 <감시와 처벌>에서 묘사한 바, 판옵티콘을 중심으로 운위된 병과 죽음을 담보로 한 억압적 규율권력을 대체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문화적 금기 사항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실현시키지 못한 좌절한 이들, 곧 가난한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자본주의 사회의 죄인이자 패배자로 인식한다. 그는 자신의 현재 궁핍한 상황을 사회가 받아들인 발전 모델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저지를 잘못의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 그는 이 발전의 모델에 대한 저항마저도 포기한다.
그러나 사회의 상당수가 유토피아로의 약속 이행의 지연과 가난한 자들의 자책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진보가 가져단 준 혜택에 대한 참여와 욕구와 필요의 즉각적인 만족을 요구하면서 문제에 대하여 보다 ‘계급적인’ 관점을 제기하는 것에 이르면 자본주의적 강제의 합법화는 한계에 다다른다. 물론 자본주의는 국가권력으로 숨어들어가고, 국가는 자본주의를 지키고자 폭력을 사용한다.
3) 만약 발전이 모방 욕구의 역동성 안에서 가장 유능한 자들의 생존과 경쟁 법칙의 결실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능력이 떨어지는 자들의 희생이 그 발전 과정의 역동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변한다는 논리를 추정해낼 수 있다. 필연적인 희생의 논리는 모방 논리의 모순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게 되고, 빈민층은 가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생각을 내면화하기에 이르고, 자신들이 필연적 희생의 제물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당연히 이 메커니즘 내에서 혜택을 누리는 이들은 그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된다. 이미 자신들에게 주어진 혜택이 정당한 공로라고 생각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강요되는 희생이 공정한 것이라는 논리를 갖고 있는 것기 때문이다.
[세속화에 관한 새로운 정의: 전통의 종교가 이미 사회 질서의 기반이 아니라는 사실이 꼭 새로운 기반이 예전에 종교계에 부여되었던 특성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전에 신성시된 교회의 중재 역할을 통한 신의 개입을 필요로 했던 천국의 실현이 이제는 발전의 결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구원적 발전은 시장 안에서, 그리고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사회의 새로운 기반이 된 시장은 종교적 성스러움을 회복한 것이다. 결국 현대적 의미의 세속화란 사회가 신성함 혹은 종교성을 배제하는 것-막스 베버의 'Entzauberung', 불트만의 'Entmythologisierung'-만이 아니라, 종교와 신성함 혹은 성스러움을 담지하는 영역이 교회에서 시장으로-맑스의 ‘fetishism’-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로-지젝의 디지털 이단-이동한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 논리의 주장이 (필연적) 희생을 진정한 종교적인 희생의 개념으로 변화시키는 종교적 논리와 용어로 가득 차 있다.(힌켈라메르트, 물신:죽음의 이데올로기적 무기)
4. 금기와 인간의 존엄성
모방욕구가 형태를 달리하여 현대 자본주의에 기생하듯이 희생양 메커니즘의 금기 또한 다른 형태로 이 사회에 잔존하고 있다. 물론 이미 푸코가 잘 분석한 바대로, 금지나 억압이 아닌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욕망을 말하게 하고, 그것의 고백과 실천에 극도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하여 마침내 시장의 원칙대로 규격화된 소비대중이 되어 가게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상품은 상품 자체의 사용가치로서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상품은 그 상품을 사용하는 자의 삶의 스타일을 표상하는 대리인이 된다. 어떤 상품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의 신분과 삶의 스타일이 달라지는 것이다. 상품의 미신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5. 기독교를 위한 도전
1)과거 전근대 사회에서는 순결한 사회에 위험을 가져올지 모르는 모방 욕구를 길들이고자, 종교적 금기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권리마저 통제하려 했다. 물론 이 길은 잘못된 길이다.
2)사회적 소외를 극복하면서 이러한 과정에 맞서기 위한 가능한 방법 중 하나는 우리의 과장된 소비문화 안에 숨어 있는 희생 메커니즘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윤리적 정치학의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물론 이런다고 해서 이미 끝없는 질주를 시작한 대중의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빈곤한 자들과 자연과 단결된 회합과 공감 속에서 소유의 본능으로부터 탈피를 경험한 이를 모범적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전략이 있다. (아사시의 성 프란시스, 예수, 바울 같은 이들)
[물론 이러한 전략도 명백히 한계를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현재의 빈자가 반드시 욕구의 시장의 희생자라고 단정 짓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희생자라고해서 욕구가 없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질문과 제안.
1. 과연 저자의 논지대로 욕구와 필요성은 명백히 구분될 수 있는가? 그가 말하는 필요성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보편타당한 척도나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인가? 과연 나의 욕망을 욕구인지 필요성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초월적 권력자는 누구인가? 혹시 그것은 판옵티콘의 눈은 아닌가?
2. 성정모의 말인즉슨, 자본주의의 대중들이 자신의 욕구가 필요성인지 욕망인지를 점검하고, 마치 중세시대와 같이 욕망을 강제로 제거하거나 쾌락의 강도를 감소시키는 규격화된 성인의 모델을 모방하는 그런 수동적인 주체의 삶을 우리는 또 반복하란 말인가? 이 무슨 망발인가?
3. 차라리 우리는 푸코가 제안하듯이 개인으로 하여금 쾌락을 활용할 줄 알고 자기를 배려할줄 아는, 그래서 자기와 타자를 그리고 공동체를 시의적절하게 통치할 수 있는 실존의 미학적 삶을 구축하도록 윤리적 정치학을 기획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자-되기”의 정치학을 심화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여성-되기, 남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 …)
4. 성정모는 지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푸코가 그토록 비판한 사제권력을 통한 대중의 욕망통제를 기획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말한다면 그건 나의 오버일까? 우리는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바람직한 윤리학을 기획하고, 어떤 특정한 코드에의 복종으로서 실현되는 윤리가 아닌 개인 삶의 개별적 형성을 목표로 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윤리학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동시에 그러한 개인의 자유로운 삶이 동일화의 논리로 포섭당하면서 그 안에서의 생존경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소수자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공적 구조와 제도를 보완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성정모 역시 후자에는 분명 동의할 것이라 믿는다. 문제는 그의 신학적 윤리학의 이론적 기반이 이미 푸코에 의해 그 기만성이 철저히 폭로된 기독교적 주체의 윤리학, 곧 생명관리권력으로서 개인에 관한 정치의 테크놀로지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