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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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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 '세계공화국'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선 가라타니 고진의 출사표!

 

 현재 한국맑스주의학계에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들도 있으리라. ‘맑스주의학계’가 아니라 ‘문학계’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논문이 2004년 『문학동네』겨울호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을 때 당시에도 그 파장이 만만찮았지만, 그 글이 다시 작년 4월에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이라는 책의 표제작으로 실려 출간되면서, 대부분의 문학잡지들이 ‘문학의 종언’ 테제를 특집 타이틀의 일부로 삼거나 ‘소설’과 ‘비평’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담은 기획들을 경쟁하듯 실었던 점을 볼 때, 일본 출신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한국 문단의 위기논쟁을 더욱 가열시킨 주범이라 할만하다. 가라타니 자신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것이 바로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히 영향력을 잃어갔기 때문”이라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넘쳐나던 한국문학계에 그의 존재와 언설이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근대문학의 기원을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밝혀낸 그 근대문학의 종말까지도 선언해버린 가라타니가 문학을 그렇게 떠나 버린 후, 몰두해왔던 작업이 점점 실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2005년에 『트랜스크리틱』(한길사)이 출간되었을 때부터 이미 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 책의 번역 출간 후 얼마 못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가 문단에서 워낙 강렬한 논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정작 그의 새로운 혁명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제4의 교환양식으로서 ‘어소시에이션’의 구상은 상대적으로 담론의 장(場)에서 묻혀 버린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근대문학의 종언’이 문단에서 일으켰던 파문만큼, ‘세계공화국’도 맑스주의학계에서 논쟁의 불씨를 지필 수 있기를 바래본다.

 자, 그럼 이제 가라타니 자신의 말대로 『트랜스크리틱2』의 압축판으로서 “고등학생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썼다”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좀 살펴보자. (그런데! 과연 어떤 고등학생이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가라타니의 책을 지속적으로 읽어온 대학생인 나도 그 내용의 이해가 만만찮아 수도 없이 그의 전작(前作)들을 다시 읽어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 책에서, 가라타니는 국가를 수탈(약탈)과 재분배라는 교환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 나아가 국가는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니 국가 없이 자본주의는 없으며, 자본주의 없이 국가는 없다고 까지 말한다. 이를테면 아메리카의 기업은 다국적 기업이지만 배후의 아메리카라는 국가 없이는 기업행위를 해나갈 수 없다. 따라서 자본, 네이션(=민족=국민), 국가(state), 어소시에이션의 구조가 그려지는데 이는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규정적이다. 바로 어소시에이션 X는 자본, 네이션, 국가의 연관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어소시에이션 X는 무엇인가.

 가라타니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세 가지 형태의 교환이 있는데 이는 상품교환, 호수제(reciprocity), 수탈(재분배)이라고 말한다. X란 유토피아이다. 그것이 제일 처음 나타난 것은 보편종교이다. 그것은 공동체를 부정하고, 또 시장사회를 부정하는 것에서 나왔다. 물론 그것이 발전함에 따라 반드시 공동체나 국가의 종교가 되어버리지만 X는 국가와 자본의 ‘지양’이라는 측면에서 나타나는 초월론적 가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X는 종교적인 또는 이념적인 것에 매우 가깝다. 전술한 바와 같이 X는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에 대한 대항 속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자본제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제 안에서 그것을 만들 계기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소비자로서의 노동자 투쟁’이나 그가 실제로 벌였던 NAM(New Association Movement)과 그 속에서 실험되었던 ‘지역통화(LETS)’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지금 생산과정에서가 아니라 유통과정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시민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추상적인 ‘시민’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소비만 하는 소비자는 어디에도 없으며 시민이나 소비자도 노동자로서는 스스로 환경을 파괴하는 물건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원론적인 의미에서 잉여가치가 늘 서로 다른 가치체계의 차액에서 발생한다면, 노동자의 입장에서 진정한 잉여가치는 소비의 과정에서 나타난다. 즉 자본가의 입장에서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구매한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자가 실제로 생산한 생산물의 가치 사이의 차액에 있다면, 노동자의 입장에서도 총체로서의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것을 스스로 다시 살 때, 그 차액이 총자본의 잉여가치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진정한 계급의식은 생산지점에서는 무리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를테면 노동자로서의 국제적 연대는 곤란하지만, 소비자로서의 연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컨대 X란 제4의 교환형태의 공간으로서 상품교환, 호수제, 수탈-재분배라는 자본주의의 교환형태를 교란하고 이에 대항하여 결국 이것들을 ‘지양’하는 새로운 ‘교통공간’인 것이다.

 여기서 가라타니가 제시하는 ‘교통’의 개념은 자신의 출세작인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부터 『탐구』1, 2와 『은유로서의 건축』을 지나 『윤리21』에서 그 맹아를 드러내고, 마침내 『트랜스크리틱』과 『세계공화국으로』에 이르러 만개한 개념으로서, 그간 맑스주의자 내부에서도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맑스의 'Verkehr'라는 단어에 새롭게 의미부여를 하고 이를 바흐친,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칸트, 스피노자, 홉스, 들뢰즈&가타리 등이 이룩한 사유의 성과들과 결합시켜 마침내 “교환=교통=커뮤니케이션=진정한 공동체(사회적 공간)=어소시에이션”의 등식으로까지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하는 바, 종래의 ‘생산자=노동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소비자=노동자=시민’의 입장에서, 곧 유통과정의 입장에서 국가와 자본을 지양하는 어소시에이션의 혁명 전략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그 판단은 책을 다 읽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대안을 창출하는 적극적인 비전에 목말라 있는 자들은 거두절미하고 일단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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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와 시장 그리고 신학
성정보 지음, 홍인식 옮김 / 일월서각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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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신학과 경제: 서론을 대신하여

인류 역사에 있어서 승리자 내지는 권력자 혹은 정복자들은 하느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승리한다는 신학, 만약 그런 신학이 올바르다면 우리는 현재도 되풀이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그 수많은 학살과 침략, 약탈로 성취된 승리와 정복도 하느님이 그들의 편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신화에서 보듯, 승리가 반드시 정의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다른 말로 정의로운 자가, 하느님이 함께 하는 자가 항상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비약하면 차라리 하느님이 함께 하는 역사는 세속사에서는 철저한 패배의 역사에 불과할 것이다. 세상의 논리에 따른 그런 승리를 주관하는 신이 정말 신이라면 그 신은 하느님이라기 보다는 악마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전지전능과 같은 신의 속성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신적 존재인 하느님의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악마의 속성이다. 그리스도교적 신앙, 예수적 신앙이 증거하는 신은 패배의 신인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신담론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 승리와 정복, 권력, 경쟁의 윤리를 신의 속성으로 선전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신의 영광의 충만한 성육신은 우리가 잘 아는 바 죽음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로서 자본이 만들어내는 아우라, 곧 물신을 통해 절정에 달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메시아에 대한 개념에 아주 큰 변화를 요구한다.

Jose Comblin은 말했다. "그리스도교는 메시아니즘이 아니다. 다른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메시아니즘의 주제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의 승리로 인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을 선포하고 그 신실함의 이름으로 제국의 우상숭배적 권력에 대항하는 하느님의 사역에 대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절대적인 충성심 때문에 예수 그를 메시아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의 그 하느님이 예수에게 주지 못한 승리를 우리에게는 주실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 때문이 아니다. 세상이 변하리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현존하는 세상의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것, 그 무모한 용기를 나는 차라리 신앙이라고 부르고 싶다. 마치 죽음이 뻔히 보이는, 패배가 자명한 그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예수가 무모한 입성을 한 것처럼 말이다.]


희생자의 자유 가운데 실천하는 사랑을 억압하는 신성화된 법칙(초월적 법칙)의 이름으로 부여된 외부적 강압의 논리인 '희생'이 아닌 연대감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사랑의 실천으로서 '드림의 은사'는 분명 다른 것이다. 단적으로 후자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제2장. 모방적 욕구와 사회적 소외 앞에 선 기독교

1. 욕구 대 필요, 그리고 소득과 부의 재분배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와 욕구의 개념 사이에 생겨나는 개념의 혼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다. ... 여기서 우리는 필요성이 너무나도 쉽게 욕구로 변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만약 우리가 더욱 정의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우리의 투쟁을 전개시키길 원한다면 필요와욕구의 차이,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욕구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과제이다. 부의 재분배에 대한 요구는 빈곤과 궁핍의 수준이 매우 심각하여 그로 인한 해결책이 시급하다는 것에 의하여 정당화된다. 경제성장 자체가 반드시 부의 최적 분배를 의미하지 않는데 그것은 부의 축적을 목적으로 한 경제 모델은 빈곤 퇴치를 위한 경제 모델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부를 증가시키기 위한 생산이 빈곤을 감소시키기 위한 생산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간과했다. ... 필요는 구매력의해 가능해진 욕망인 수요로 대체되고, 생산과정의 목적은 기본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소비를 부추기기 위함이며, 효율성은 섭식을 향상시키기 위함이 아닌 수출을 위한 생산으로 여겨졌다.”


더 나은 분배와 경제ㆍ사회적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대화를 심각한 사회적 불의라고 전제하고 과다하게 필요 이상으로 가진 사람들에게 시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비대중들 대다수는 사회가 좀 더 평등해져야 한다는데 공감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빈자들에게, 특히 시장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자신의 소득이나 부를 감소시키는 경제 정책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요컨대, ‘필요 이상으로 가지고 있는 것’과 ‘필요 이하로 가지고 있는 것’의 차이는 소득 재분배와 사회적 구조 조정을 옹호하는 자들과 시장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들을 가르는 분계선으로서, 필요성과 욕망에 관한 서로 상이한 인식의 차이이다. 전자가 가진 생각은 인간의 필요성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고 후자는 (당연히) 제한이 없는 욕구의 자유로운 행사 권리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와 욕구의 개념의 혼동이다. 먼저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경제 이론과 개인 기업들의 생산은 소비자들의 욕구 만족에 목적을 두고 있다. 다만 그 욕구들이 때때로 필요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그로 인하여 혼동을 빚어낸다. 필요와 욕구를 구분 짓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위한 대화의 시도는 난점에 빠진다.

 

만일 우리가 부의 소유에 관하여 무한한 욕구의 개념으로부터 접근하면 한계는 사라지고 무한정으로 그 척도의 수위는 올라간다. 당연히 그들의 소득과 부에 대하여 재분배를 문제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우리가 더욱 정의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우리의 투쟁을 전개시키길 원한다면 필요와 욕구의 차이,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욕구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과제이다.


2. 경제발전과 모방적 욕구

소득의 분배 혹은 소득의 편중은 대부분 이미 재화의 생산 과정에서 아니 대중의 성장 과정에서 아니 대중의 출생과 동시에 결정된다. (formal subsumption, real subsumption, virtual subsumption)


1970년대까지 채택된 경제 발전 모델인 ‘수입 대체 산업’의 모델. “공업혁명을 주도한 국가들에 의해 실행되어 온 경제 발전은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실상은 부유한 국가의 소수 부유층의 소비 패턴이 제3세계 국가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식되는 것. 이러한 소비 패턴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의식 속에 확산시켜 놓은 소비에 대한 열망과 정신 분열적으로 가속화된 소비 추구성향에 의해 조건지어졌으며, 소비가 경제 활동 자체와 문명화 과정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소득의 불평등한 분배와 증가해 가는 사회적 소외 현상은 주변 사회에 기술적 진보가 이 같은 형태로 도입되면서 빚어낸 잘못된 결과이다. 선진국과의 노동 평균 생산성의 차이로 인해 후진국에서 생겨나는 소득의 불공평한 분배는 이 사회 내의 엘리트 계층들을 먹여 살리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껏 소비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선진국의 소비문화를 모방한 것이 결국은 소득의 편중적인 분배와 사회적ㆍ경제적 이원화(20 대 80 사회)를 초래했다. 문제는 소비의 모방 욕구가 근대성의 중심부에 있다는 것이다. 근대성의 중심 이데올로기는 진보와 유토피아에 대한 낙관적 희망이다. 물론 그러한 희망은 기독교적 종말론에서와 같이 피안적 세계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술의 진보를 통해 현세의 가까운 미래에 달성될 그 무엇인 것이다. 그 가까운 미래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은 오직 기술발전을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기술개발 논리의 핵심이 바로 이 모방 욕구에 있다. 원시 인류에서 모방 욕구가 차이의 상실을 가져왔고 결국은 폭력을 초래했다는 지라르의 점유의 모방 욕구 가설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들에게 끊임없는 소비의 모방 욕구를 작동시키며 소비문화 자체를 그 자신(자본주의)의 내적 실재로 삼아버렸다.


[지라르의 이론을 경제제도에만 옮겨놓는 것은 현실을 너무 간단하게 보는 것일 수 있다. 탈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추동하는 소비의 욕망은 단순히 재화를 소유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재화의 소유는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로 확장되었고, 유행은 트렌드의 차원으로 진화되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소비문화의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소비를 향유하는 자본주의적 미학적 삶의 주인공 곧 고객으로 호명당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고객은 근대 자본주의적 권력, 즉 생명관리-권력의 관리 대상일 뿐이다.]


오늘의 사치품이 내일의 필수품이 되는 사회, 욕구가 필요로 변해가는 신비로운 전이가 발생하는 사회, 그러므로 하이에크에게 있어 모방 욕구는 이 세계가 더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로 진보하기 위한 촉진제이다. “그래서 발전의 단계에 있는 모든 사회는 배움과 모방의 과정 여하에 따라서 모방 심리의 자극을 낳는 욕구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이 각 개인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방 욕구에 대한 자극물은 시장의 전쟁에 투입되기 위해 시장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장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욕구와 그렇지 못한 욕구를 구별한다.


지라르의 가설에서와 같이 모방 욕구의 기본적 구조는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인 결과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필연적인 결과 위에 기초해 있다. 필요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모방의 욕구에서 시작한 소비문화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무한대로 확장될 욕구를 충족시켜줄 재화의 지속적인 공급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모방의 욕구를 능력에 따른 성과, 자유로운 경쟁의 원리 등과 같은 논리로 용납하고 이를 자본주의 발전의 촉진제로 활용한다. 자본주의에서 연대 의식 혹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물 등의 개념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항상 욕구의 대상이 되는 새로운 상품이 생산되어 나오는 자본주의 경제적 역동성은 부족(항상 욕구와 비례해서)이라는 개념을 매번 확대 재생산하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부족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라이벌 의식과 폭력이 발생할 것이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현실이 빚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욕구를 덜 만족시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에 관하여 소수의 리더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로 답변을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아니더라도 이 사회가 많은 이들의 절망을 불가피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굳이 진보ㆍ모방 욕구의 역동성을 유지해야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지극히 합리적인 그러나 동시에 지극히 신비적인 논리로 답변을 한다. “이미 우리는 근대성의 진보라는 신화 속에서 기술 진보가 우리에게 지상 낙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살아간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대세이다. 세계 대중의 욕망의 좌절로 인한 심각한 국제적 분쟁이나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오로지 빠른 물질적 진보를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한다. 세계 평화와 인류 문명의 생존이 빠른 속도의 진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엘리트들은 바로 이러한 시온으로 대중들을 인도하는 예언자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지금 가나안을 향한 고난의 행군을 계속 하고 있으며 이 행군의 대로에서 발생하는 생태계의 파괴나 능력의 부족으로 낙오하고 소외되는 자는 진보를 향한 필연적 희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시장을 절대화시킬 때, 그리고 그 논리가 초인적 결과를 나타내며 그 논리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저항을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그 어떤 전능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종국에는 신자유주의자들조차도 시장 체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무력함을 고백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축적의 논리, 원가와 이윤의 합리성이 인간의 삶보다 우선적이라는 가치관을 이끌어내는 이 전능함은 우리가 시장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만들어낸다. 시장의 전능함이 만들어내는 우리의 무력함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사람들의 사회로의 통합이나 소외당한 자들의 생존, 인간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생태계의 보전을 위한 그 어떤 시도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전능함의 무력함”이다.


사회의 이원화와 위기를 조장하는 시장의 비극적 폭력이 없는 발전의 개념을 거부하고, 현실의 불평등한 상황을 온몸으로 감수해나가며 여전히 모방성의 욕구에 근거한 경쟁의 발전모델을 지지하는 대중들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3. 낙원의 약속과 필연적 희생

세 가지 가설

1) 경제 성장의 역동성과 관계하여, 대중의 필요성으로 변화된 욕구를 충족시키게 되리라는 약속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는 징후의 가시화. 그러나 이것 또한 기만적인 신화의 일부이다.

 

2) 모방 욕구와 결부된 근대성의 특성과 연관된 가설. 전근대 사회에서는 무분별한 욕구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사태를 막고자 제도적 방법을 통해 합법적으로(공권력의 권위로) 그리고 무의적으로 개인의 불만과 의태적 욕구를 잠재우는 재산 분배의 메커니즘을 생성, 작동시켜 왔다. 그러나 근대 사회 대중들의 욕구는 진보의 신화와 함께 이러한 억압과 금기마저 뛰어넘기에 이른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장벽이 무너져야 자신들의 욕구영역이 더 넓어지고, 욕구 자체의 결백함도 인정받으리라 믿는다. 제도나 법을 통한 강제적인 욕구의 억압 대신에 기술 진보를 통한 재화의 생산에 승부를 건 것이다. (이는 마치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분석한바, ‘성’을 전략으로 삼아 생명의 강화를 떠맡음으로써 행사되는 권력의 형태, 즉 ‘생명권력’(bio-power)이 <감시와 처벌>에서 묘사한 바, 판옵티콘을 중심으로 운위된 병과 죽음을 담보로 한 억압적 규율권력을 대체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문화적 금기 사항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실현시키지 못한 좌절한 이들, 곧 가난한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자본주의 사회의 죄인이자 패배자로 인식한다. 그는 자신의 현재 궁핍한 상황을 사회가 받아들인 발전 모델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저지를 잘못의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 그는 이 발전의 모델에 대한 저항마저도 포기한다.


그러나 사회의 상당수가 유토피아로의 약속 이행의 지연과 가난한 자들의 자책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진보가 가져단 준 혜택에 대한 참여와 욕구와 필요의 즉각적인 만족을 요구하면서 문제에 대하여 보다 ‘계급적인’ 관점을 제기하는 것에 이르면 자본주의적 강제의 합법화는 한계에 다다른다. 물론 자본주의는 국가권력으로 숨어들어가고, 국가는 자본주의를 지키고자 폭력을 사용한다.


3) 만약 발전이 모방 욕구의 역동성 안에서 가장 유능한 자들의 생존과 경쟁 법칙의 결실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능력이 떨어지는 자들의 희생이 그 발전 과정의 역동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변한다는 논리를 추정해낼 수 있다. 필연적인 희생의 논리는 모방 논리의 모순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게 되고, 빈민층은 가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생각을 내면화하기에 이르고, 자신들이 필연적 희생의 제물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당연히 이 메커니즘 내에서 혜택을 누리는 이들은 그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된다. 이미 자신들에게 주어진 혜택이 정당한 공로라고 생각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강요되는 희생이 공정한 것이라는 논리를 갖고 있는 것기 때문이다.    

 

[세속화에 관한 새로운 정의: 전통의 종교가 이미 사회 질서의 기반이 아니라는 사실이 꼭 새로운 기반이 예전에 종교계에 부여되었던 특성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전에 신성시된 교회의 중재 역할을 통한 신의 개입을 필요로 했던 천국의 실현이 이제는 발전의 결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구원적 발전은 시장 안에서, 그리고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사회의 새로운 기반이 된 시장은 종교적 성스러움을 회복한 것이다. 결국 현대적 의미의 세속화란 사회가 신성함 혹은 종교성을 배제하는 것-막스 베버의 'Entzauberung', 불트만의 'Entmythologisierung'-만이 아니라, 종교와 신성함 혹은 성스러움을 담지하는 영역이 교회에서 시장으로-맑스의 ‘fetishism’-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로-지젝의 디지털 이단-이동한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 논리의 주장이 (필연적) 희생을 진정한 종교적인 희생의 개념으로 변화시키는 종교적 논리와 용어로 가득 차 있다.(힌켈라메르트, 물신:죽음의 이데올로기적 무기)

 

4. 금기와 인간의 존엄성

모방욕구가 형태를 달리하여 현대 자본주의에 기생하듯이 희생양 메커니즘의 금기 또한 다른 형태로 이 사회에 잔존하고 있다. 물론 이미 푸코가 잘 분석한 바대로, 금지나 억압이 아닌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욕망을 말하게 하고, 그것의 고백과 실천에 극도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하여 마침내 시장의 원칙대로 규격화된 소비대중이 되어 가게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상품은 상품 자체의 사용가치로서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상품은 그 상품을 사용하는 자의 삶의 스타일을 표상하는 대리인이 된다. 어떤 상품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의 신분과 삶의 스타일이 달라지는 것이다. 상품의 미신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5. 기독교를 위한 도전

1)과거 전근대 사회에서는 순결한 사회에 위험을 가져올지 모르는 모방 욕구를 길들이고자, 종교적 금기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권리마저 통제하려 했다. 물론 이 길은 잘못된 길이다.


2)사회적 소외를 극복하면서 이러한 과정에 맞서기 위한 가능한 방법 중 하나는 우리의 과장된 소비문화 안에 숨어 있는 희생 메커니즘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윤리적 정치학의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물론 이런다고 해서 이미 끝없는 질주를 시작한 대중의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빈곤한 자들과 자연과 단결된 회합과 공감 속에서 소유의 본능으로부터 탈피를 경험한 이를 모범적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전략이 있다. (아사시의 성 프란시스, 예수, 바울 같은 이들)


[물론 이러한 전략도 명백히 한계를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현재의 빈자가 반드시 욕구의 시장의 희생자라고 단정 짓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희생자라고해서 욕구가 없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질문과 제안.

1. 과연 저자의 논지대로 욕구와 필요성은 명백히 구분될 수 있는가? 그가 말하는 필요성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보편타당한 척도나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인가? 과연 나의 욕망을 욕구인지 필요성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초월적 권력자는 누구인가? 혹시 그것은 판옵티콘의 눈은 아닌가?


2. 성정모의 말인즉슨, 자본주의의 대중들이 자신의 욕구가 필요성인지 욕망인지를 점검하고, 마치 중세시대와 같이 욕망을 강제로 제거하거나 쾌락의 강도를 감소시키는 규격화된 성인의 모델을 모방하는 그런 수동적인 주체의 삶을 우리는 또 반복하란 말인가? 이 무슨 망발인가?    


3. 차라리 우리는 푸코가 제안하듯이 개인으로 하여금 쾌락을 활용할 줄 알고 자기를 배려할줄 아는, 그래서 자기와 타자를 그리고 공동체를 시의적절하게 통치할 수 있는 실존의 미학적 삶을 구축하도록 윤리적 정치학을 기획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자-되기”의 정치학을 심화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여성-되기, 남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 …)


4. 성정모는 지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푸코가 그토록 비판한 사제권력을 통한 대중의 욕망통제를 기획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말한다면 그건 나의 오버일까? 우리는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바람직한 윤리학을 기획하고, 어떤 특정한 코드에의 복종으로서 실현되는 윤리가 아닌 개인 삶의 개별적 형성을 목표로 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윤리학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동시에 그러한 개인의 자유로운 삶이 동일화의 논리로 포섭당하면서 그 안에서의 생존경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소수자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공적 구조와 제도를 보완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성정모 역시 후자에는 분명 동의할 것이라 믿는다. 문제는 그의 신학적 윤리학의 이론적 기반이 이미 푸코에 의해 그 기만성이 철저히 폭로된 기독교적 주체의 윤리학, 곧 생명관리권력으로서 개인에 관한 정치의 테크놀로지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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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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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왠지 생각에 잠겨보지도 않은 채 덜컥 이런 곳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

의 도리가 아니라는 말투였다. 듣는 사람에 따라, 또 새겨듣기에 따라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러움이 복받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런

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감정에 사로잡혔

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럽지 않고, 대신

 

 

(페이지 넘김)

 

 

외로웠다.

 

 

 

 

: 박민규,「갑을고시원 체류기」(『카스테라』문학동네2005, pp.281~282) 

 

 

 

 

나도 다시 고시원에 들어가게 되었던 작년 가을 그때, 나의 짐을 날라주던 친구들 앞에서 바로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던 그곳에서 앞으로 살아가야할 나를 위해 친구들은 진심으로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10개월이 되어 간다. 고시원에 들어온지 말이다. 이젠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옆방에서는 밤마다 방안에서 영화를 보는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나를 극도의 분노 상태로 몰아가고, 앞방에서는 헛기침 소리와 체중을 다해 내딛는 발자욱 소리로 나의 휴식을 방해한다. 벗어나고 싶지만, 내가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이 서울 하늘 아래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우울하게 한다. 여기보다 좀 더 시설이 좋은 고시원으로 옮겨볼까를 수도 없이 고민했다. 웃지 마시라, 그래봐야 고시원이니까. 갈 데가 없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당신은 웃겠지만, 쓰는 나는 지금 울고 싶으니까. 공부를 위해서 잠시 집 놔두고 들어온 인간들이랑 정말 갈 데가 없어 이곳으로 들어온 인간의 차이가 뭔지 아는가? 잠깐 들어온 이들은 절대 이불을 빨지 않는다. 왜? 잠깐 덮고 지내다가 그냥 버리고 가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계속 살아야 이에게 그 이불은 영원히 내 이불이다. 그래서 자꾸 자꾸 빤다. 고시원에서 이불 빠는 사람은 오래 있을 사람이다. 제기랄! 그저께 나도 이불을 빨고 말았다. 그랬던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은 가볍다. 아니 발랄하다. 그의 서사세계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이 숨막히는 지구-세계로부터 가볍게 도약하여 우주로 날아가버릴 수 있다. 박민규의 소설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그의 상상과 모험이 그 자체로서 신선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반복되면 이제 지겨워진다. 떠나는 건 좋다. 그렇게 오리배를 타고 기린이 되어 지구를 날아다니며 너구리나 대왕오징어와 노닐고 야쿠르트 아줌마를 통해 세상사는 법 아니 세상 비트는 법에 대해 한 수 배울 수 있다. 박민규는 정말 그렇게 무규칙 이종격투기하듯 세상의 논리와 공식을 뒤집고 무너뜨린다. 박민규의 소설이 갖는 힘이다. 너무나 엄숙하고 너무나 진지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는, 근데 그래봐야 결국 개복치일 수 밖에 없는 이 세상 안에서 그런 상상의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우리는 내일을 또 살아갈 것 아닌가? 박민규의 소설이 가장 힘을 발하는 그 지점에서 박민규의 소설은 가장 무기력해진다. 마치 계기판이 제 멋대로 작동하며 날개없이 추락하는 비행기마냥 박민규 소설은 가장 높이 올라간 지점에서 가장 멋지게 곤두박질친다. 현실의 바닥으로 말이다. 그나마 박민규의 소설 가운데 덜 환상적인 그래서 가장 리얼한 소설이 있다면 바로 저 위에 그리고 이 아래에 인용한「갑을고시원 체류기」일지 모른다. 너무 잔인하게 리얼해서 고시원의 일상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것도 지금 고시원 방에 틀어박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리얼하다. 

 

 

 

어쨌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

 

 

: 박민규,「갑을고시원 체류기」(『카스테라』문학동네2005, p.304) 

 

 

 

 

하릴없이 컴터를 켜서 메신져에 로그인을 한다. 그리고 접속한 사람 아무나 붙잡고 취중진담하듯 아무 얘기나 지껄인다.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고시원에서는 정숙해야 하니까. 누구랑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고시원 관리하는 총무랑, 저 방값 좀 늦게 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세요 그럼. 죄송합니다. 자, 누구랑 무슨 얘기를 또 할까.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나도 언젠가 말할 수 있을 날이 오겠지. 설마 여기서 평생 살지는 않겠지. 그래 나도 나의 방식으로 이 고시원같은 세상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를 맛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맛, 바로 그런 맛을 느끼며 이상하게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런 날이, 「신일고시원 체류기」쓸 수 있는 그런 날이 정말 올까? 고시원을 벗어나 살게 되는 그런 날이 정말 온다면, 난 체류기 따위는 쓰지 않으리라. 한국 땅에 고시원이란 고시원은 모두 사라져 버려 누군가가 그에 대한 증언을 해야만 상황이 아니라면 난 절대 체류기 따위를 쓰지 않겠다. 근데 고시원이 사라질까, 이름을 다른 것으로 바꾸었으면 바꾸었지 불 한 번 나면 모두 그 안에서 통구이되는 그런 곳이 계속 이 땅에는 존재하겠지. 시골에서 막 상경한 청년 구직자들, 신용불량자와 수배자, 도망자, 잠수탄 자, 막노동판 인부, 기러기아빠, 고시생, 나가요 언니들이 계속 존재하는 한, 그런 하류인생들도 웅크린 채로 잠잘 수 있는 그렇게 그들을 받아줄 수 있는 공간이 이 세상에 하나쯤은 함께 존재해야 할테니.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니까.

 

 

근데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차라리 박민규에게 나도 당신의 그 냉장고에 넣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는 나 역시 당신이 당신의 냉장고에 넣어버린 세상의 두 종류의 것들, 유일하여 가장 소중한 것이거나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 해악인 그런 것들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라고 하면서. 아무래도 난 후자겠지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에게 나를 카스테라로 만들어달라고 애원해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쪽이 내가 야쿠르트 아줌마로부터 야쿠르트를 공짜로 선물받는 것보다 혹은 외계인들로부터 KS라고 인정받는 것보다 좀 더 수월할 듯 싶다.

 

 

오늘도 나는 인간은 누구나 밀실에서 살아간다라는 말에 이하동문이라는 댓글을 반신반의하는 태도로 달면서 이 밀실같은 세상에서 기린이 되지는 말자고 다짐해본다. 차라리 남들의 입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살찌워주고 한 덩어리 똥으로 화할 카스테라가 될지언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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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서.예언서 연구 - 논문집 III
김정준 / 한국신학연구소 / 198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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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의 神學”

―김정준,「신학사상」23(1978)

 

 

I. 요약

 

1. 序論 - 아모스 神學의 根據

아모스 신학의 근거는 아모스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기록해서 후세 사람들에게 전한 자이다. 아모스 예언자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하면 예언자적인 그의 사명이나 활동도 함께 사라진다. 아모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의 형식과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아모스와 그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갖게 될 ‘예언자로서’의 일반적인 요소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①야웨 말씀하신다, ②야웨 이렇게 말씀하신다, ③야웨 주가 말씀하신다, ④만군의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신다, ⑤이는 야웨 말씀이시다, ⑥이은 주 야웨 말씀이시다, ⑦야웨 만군의 하나님이 말씀하다. 이 중에서 ①~④까지는 예언 서두에 나오는 형식이고, ⑤~⑦은 대체로 예언의 대목이 끝났을 때 사용된 형식이다. 이로서 아모스 예언은 그 시작도 끝도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모스는 자기의 일상생활 속에서 돌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언자로서 부름 받은 인물로서(7:15),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강제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저항할 수 없어 대언의 활동을 했던 것이다. 8:11에 하나님이 아모스를 강요하신 이유가 잘 나온다. 기갈상태에 처한 인간에게 양식과 물이 필요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증, 즉 말씀의 기갈을 그 개인과 공동체가 느끼기 때문이라 한다. 야웨 하나님은 자기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아모스를 자신의 예언자(대언자)로 부르신 것이다.

 

2. 하나님 理解

1) 萬民의 하나님

마르시온과 같이 구약의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민족신으로만 보는 것은 구약성서에 대한 전적인 오해이다. 아모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야웨’로 부른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신의 범위를 벗어난 만국(萬國) 백성의 하나님으로서, 만국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 역사에 간섭하시는 분이다. 아모스는 그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에게서 예언자 사명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으로 시작하지 않고 모든 인류의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신념으로 그의 예언을 시작하고 있다. 아모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권은 이스라엘의 역사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역사에까지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주변 여러 나라의 문제를 취급하지 않고, 만국의 하나님 야웨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아모스가 1-2장에서 열거하고 있는 나라들은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의 시리아,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과 같은 작은 나라들이며, 그의 하나님은 이 나라들 하나 하나의 역사적 문제에 관심한다. 이러한 여러 나라들에 대한 관심은 6장 2절 이하에도 나타난다. 또한 6장 14절에도 하나님의 통치권이 이스라엘 밖까지 확대됨을 말한다. 다른 나라를 불러와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겠다는 심판을 선언함으로써 외국의 권력과 그 통치권마자도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의 뜻에 좌우됨을 보여준다. 9장 7절에서도 이스라엘 밖의 여러 나라들이 열거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나라들의 역사 속에서 야웨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사를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체 역사 혹은 보편사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 논의를 펼쳤던 독일의 현대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dt Pannerberg)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아모스의 이스라엘의 야웨는 한국인을 포함한 세계 만민의 구원자 야웨인 것이다.

 

2) 審判의 하나님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하나님의 공의 때문인 것으로 말해진다. 공의는 선과 악, 불의와 의를 판별하는 원칙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의 공의를 세우는 일이다. 심판의 개념은 법정적 용법을 갖는다. 죄를 지은 사람을 심문하고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 판단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의 법에 따라 행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의 실행인데, 인간은 누구나 이 의지 앞에서 그 공과(功過)를 심판받아야 한다. 구약성서의 아담의 실낙원 설화, 노아홍수 설화, 소돔ㆍ고모라의 설화가 구체적으로 이 하나님의 심판 사상을 알려주는 예이다. 아모스 1-2장에 나타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 대한 예언은 그 나라들이 범한 죄를 규탄하는 심판의 하나님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나라들의 죄는 하나님의 공의를 거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이스라엘(남과 북 모두를 포함한 전체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 남유다는 “율법을 거부한 죄”, “거짓 신들에게 미혹당한 죄”로 심판을 받는 것이고, 북이스라엘은 종교적, 사회적, 윤리적으로 온갖 죄를 범했으므로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3:11, 3:14-15, 5:16-17, 5:19, 9:1-3, 9:8 등에 걸쳐 심판의 철저성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아모tm는 '야웨의 날‘(5:18-20, 8:3-9)이 심판의 날이요, 일종의 종말적인 날임을 말하고 있다. 이 날에는 가종 재난, 즉 한발, 기근, 역병, 화재, 전쟁 등이 일어나 곤욕을 치를 것을 알고, 백성들이 이 날을 만날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날은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날인 것이다. 이처럼 아모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 사상은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하지 아니 하고 세계 만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은 선민(選民)으로서 의무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3) 正義의 하나님

아모스가 말하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사상은 아모스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이스라엘의 죄와 불의를 심판하시는 원칙이 하나님의 정의(正義)임을 알려준다. 정의 또는 공의의 문제 역시 심판의 문제와 같이 법정적인 용법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양심과 그의 생활을 살피시고 심판하신다. 이 심판이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이 시편 7편, 9편, 85편 등에 잘 나타나고 있다. 아모스서에서는 주로 5:7, 6:12, 5:24 등에서 정의의 하나님에 대한 강조 및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부패상에 대한 아모스의 비판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세 구절에는 모두 공의(mishpat)와 정의(tsedaqa)가 나란히 언급된다. 백성의 지도자와 일반 백성이 공의와 정의를 불의와 부정으로 만들고(5:7), 국가의 사법 책임자들이 백성을 죽이는 독초와 독약 구실을 하고 있으며(6:12),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의와 정의는 찾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법 자체가 부정과 불의함에 기울어지면, 국가 사회의 공공적인 법질서는 이미 무너진 것이고, 따라서 그런 법이 백성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한 백성들은 독약을 먹는 것과 같이 스스로 그의 삶을 바르게 산다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아모스는 이러한 정의의 질서과 불법의 질서로 뒤바뀐 이스라엘의 현실을 6:12에서 그 백성들과 나라의 책임자들 앞에서 따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가데 하리라”(5:27).

 

4) 自然과 하나님

아모스서에는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리고 인간의 윤리 및 신앙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창조를 나타내는 기본 동사 세 개(4:13의 ‘야차르’와 ‘바라’, 5:8의 ‘아싸’)를 통해 우리는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창조전승을 그대로 전수받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며, 4:9을 통해 아모스에게 있어 하나님만이 자연의 주권적인 지배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문명세계와 관계된 자연 현상과 자연물들 그리고 자연의 이변과 재난마저도 모두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얻을 수도 있다(3:8; 4:7-9; 8:2). 끝으로 자연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우리에게 지시하고 전달해주는 도구이기도 하다(9:13-14).

 

3. 民族共同體에 對한 理解

1) 이스라엘 王國과 民族共同體

대다수의 구약학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한 공동체를 ‘Gemeinschaft'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Monarchy(왕국)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왕국‘의 개념으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적절히 이해하기 어렵다. 왕국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이므로, 왕을 포함한 그 나라의 전체 구성원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나안 정착 이후 초기 지파 동맹에서 보이는 민족공동체의 개념을 왕을 중심으로 한 왕국과 구분해야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항상 왕의 주권이 성장함에 따라 백성들 위에 왕을 두도록 하나님의 주권이 왕권에 의하여 점차 위협을 받았고, 그 반발로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야웨 신앙으로 지파들이 결속된 공동체임을 강조하는 흐름이 나란히 전개되었다.

 

2) 民族共同體에의 關心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왕국 즉 왕이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결사체보다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이 야웨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맺고 그 구원과 은총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는 민족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가 언급되는 대목(2:4; 2:6-8)은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공동체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지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모스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생각보다도 옛 지파동맹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연상시키는 대명사들을 즐겨 사용한 것도 그러한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3:1의 ‘모든 지파들’이나 9:11의 ‘다윗의 천막’ 같은 단어에서 분단된 북왕국 이스라엘 보다는 “분열되지 아니 한 하나의 통일된 왕국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통일된 왕국이라는 것도 정치체제 보다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염두에 둔 말임이 분명하다.



3) 權力의 惡

아모스는 ‘왕국’이 얼마나 부정과 불의를 저지르는 악의 집단인가를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주변 여러 나라의 경우를 들어 보여준다. 아모스는 1-3장에서 ‘궁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왕국(9:8) 또한 이 궁궐과 관련된 ’창고‘ 또는 ’요새‘(3:10), 그리고 권력층과 결탁된 부유층의 ’겨울 집‘, ’여름 집‘, ’상아로 만든 집‘, ’대궐‘(3:15) 등을 말하고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왕권이나 권력 또는 경제권을 가진 사람들이 불의와 죄를 범한 일과 그 심판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궁궐‘은 ’태워버릴 것,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1:4,7,10,12,14; 2:2,5), 또한 ’약탈당할 것‘(3:11),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6:8)이다. ’대궐‘ 역시 ’부숴질 것‘(3:15)이고, 특히 ’왕국‘도 심판당할 것이다(9:8).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이 권력의 책임자들인 왕과 귀족들에게 임할 것이다. 아모스서는 이스라엘의 왕국의 죄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는데, 크게 세 가지의 죄가 지적된다. ①권력자들(왕, 주권자들, 귀족들)의 죄로서 3:10에 잘 나타나있다. ②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죄는 3:15, 5:11, 6:1, 6:11 등에 나타나는 사치와 안일의 생활이 있으며, 이는 결국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소비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6:4-6). ③악덕 상인들의 죄는 8:4-6에서 상세히 묘사된다. 여기서 아모스는 당시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경제권을 독점하고 있던 악독한 부유층 상인들에게 “들으라! 이 말을”로 시작되는 가혹한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 악덕 상인들은 예배를 빙자하여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으며, 월삭제와 안식일 같이 장사가 금지되어 있는 날을 이용하여 부정축재를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4) 가난한 자의 受難

아모스는 그 민족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예언운동을 함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참된 종교는 권력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약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아모스가 변호하고 있는 이런 수난당하는 이들은 ‘궁핍한 자’(2:6; 4:1; 5:12; 8:4), ‘가난한 자’(2:7; 4:1; 5:11; 8:6), ‘겸손한 자’(2:7; 8:4) 등으로 표현된다. 아모스는 권력자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수난을 받는가를 밝히고 있다. ①‘가난한 자’의 연격적 존엄성을 무시하고 그들의 인권을 물질적인 것으로 가치절하시키는 죄인데, 2:6-7과 8:6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②그러므로 권력자와 부한 자들의 “죄가 중하고 허물이 많음”(5:12)은 그들이 의인을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억울케 함”에 있다(2:6). ③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실제로 죽이기도 한다(8:4). ④끝으로 그들은 때론 물질로서 매수하는 일, 즉 뇌물공세를 펴서 가난한 자들이 법에 의지할 수도 없게 만든다(5:12). 이는 결국 가난한 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이다.

 

4. 敬虔에 對하여

경건의 문제와 관련하여 종교적 비판과 고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건을 문제 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그들의 신앙행사에 대하는 태도를 문제 삼기 위함이다. 그것은 예언자 아모스가 고발하는 신앙의 문제의 본질이 그 신앙의 외형적 문제, 곧 절기를 지키고, 제물 및 십일조, 성소에 출입하는 문제의 잘못됨을 지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신학, 신앙, 경건 이 세 가지는 종교를 논하는 기본 요소로서,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종교를 비판한 것 역시 그들이 야웨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가 함과 또 그들의 신앙의 표현으로 생각하는 예배 행위가 진실된 것인가, 형식적인 것인가를 살핀 것이다.

 

1) 禮拜場所(벧엘, 단, 길갈)

아모스는 벧엘, 단, 길갈 이 세 성소가 중요한 것임을 지적하고 각 성소의 특징을 설명한다. 아모스는 이 성소들이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위선적인 종교적 행사와 온갖 우상숭배적인 이교의 의식들이 난무하는 죄악의 장소가 된 것을 고발한다.

 

2) 잘못된 敬虔

아모스는 잘못된 경건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①형식적인 종교로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종교의식이다(5:4-5, 21-25). 이는 형식적으로 관습화된 경건에 불과하며, 영(靈)이신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지 못하는 죽은 예배인 것이다. ②공의와 정의를 무시하는 삶, 불의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드리는 예배이다(5:7, 12, 24). 아무리 훌륭한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올려도 그 예배자들의 성소 밖에서의 삶이 죄와 허물로 가득 차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③마지막으로 잘못된 경건은 아마샤와 같이 권력에 빌붙어 살아가는 직업 종교인 혹은 어용(御用) 종교인들의 경건이다. 아모스가 보기에, 정당하지 못한 권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주는 종교는 이미 경건을 포기한 거짓 종교인 것이다(7:10-13). 아모스는 이러한 거짓 종교인들에 의해 예언 금지를 당하고 심지어 국외로 추방당하기까지 하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해야 말을 해나갔다.

 

3) 참된 敬虔

아모스에게 있어 참된 경건의 핵심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있다. 시내산의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명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4:12). 또한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5:4-5). 이것은 숨어 계시는 초월자 하나님을 인간 편에서 먼저 찾는 것을 의미한다. 아모스는 오직 이 길만이 이스라엘 백성이 살 길이라고 선언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동의어로 쓰인다. 아모스가 참 경건의 표지로서 “야웨를 찾으라”고 촉구하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신앙 전승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사람들이 구하던 것들이 물질, 향락, 권력, 바알의 종교와 같은 기복신앙이었을 때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구원자 하나님을 찾을 것을 명령한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을 찾을 것을 명하시는 하나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5. 結論

1) 宗敎와 政治

아모스의 신학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 밀착되어 있다. 그는 예언자로서 종교인의 사명을 다하려는 책임감 때문에 정치문제를 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교인이 정치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로는 ①이스라엘 신앙에서(구약성서에 나타난) 정치가 취급하는 모든 분야가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이끌어 나가시는 역사와는 다른 분야가 아니라, 역사 그것이 인간의 정치적 결단과 그 집행으로 움직여 나가기 때문에, 종교인의 선 자리가 이 역사이고, 그 속에서 살고 활동하기 때문에 종교와 정치는 불가분이다. ②이스라엘이 고백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소, 그 지성소 안에만 계셔서 그 백성들의 예배와 예물을 받고 만족하는 신은 아니다. ③인간의 삶의 실제와 그 바탕이 되는 정치적 영향은 물론, 정치와 무관한 삶은 있을 수 없다. ④오늘날과 같이 국제적 교류가 잦고 세계의 공동체가 전자 미디어와 교통수단의 발달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개별적인 국가의 사건이 곧바로 국제적인 차원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구약성서의 시대에도 이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적 현실에서 종교와 정치 관계를 살펴 볼 때 아모스가 예언활동을 펼친 북왕국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비판하고 또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나라들과 유다의 문제를 그의 예언 속에 언급한 것은 종교와 정치의 관련성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宗敎와 倫理

아모스의 윤리사상은 개인적 차원의 윤리보다도 민족공동체의 윤리를 관심함이 뚜렷한 사실이고 특히 그가 이스라엘 주변 여러 나라의 ‘서너가지 죄’를 언급하면서 지적한 각 나라의 죄는 아모스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만 관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살던 시대의 인간 공동체 일반에 대해 갖고 있었던 윤리적 교훈과 경고라 할 수 있다. 아모스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이 세계의 인간 공동체가 윤리적이고 인도적인 원칙에 입각해 있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인간 공동체 전체를 파멸시키고 말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 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던 착취와 반인륜적인 행태들을 아모스는 강력하게 비판하고, 윤리의식의 실종된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선포한 것이다. 아모스는 참된 종교의 실재와 실존을 그 백성들 앞에 밝히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 공동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윤리적이고 인권적인 실재나 실존을 강조했던 예언자이다. 윤리의식을 상실한 종교는 이미 그 본질에서부터 종교가 아닌 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이 윤리적인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절기’, ‘성회’, ‘번제’, ‘소제’, ‘화목제’ 등의 잘 차려진 예배의 단을 쌓는다 해도 공법을 물같이 쏟아 버리고 정의를 하수같이 흘려보내고서는 참된 경건의 종교라 할 수 없고 거기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죄를 짓는 것은 곧 계약의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일이 된다.”

 

 

II. 감상 및 비평

: 김정준의 아모스 신학의 현재적 의미

 

나는 아모스와 예수와 바울을 사랑한다. 이들의 메시지와 삶은 오늘 여기에서의 나를 이끌어가고 있는 현실적 지표이다. 예언자와 메시야와 사도.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의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를,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δικαιοσνη)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들을 이어 그리스도교의 사상사에 출현한 수많은 예언자적 설교자, 신학자들이 존재한다. 만수(晩穗) 김정준 (金正俊), 그 분도 그러한 예언자적 신학자의 전통에 서 계신 분이라고 나는 믿는다.

김정준 박사님께서 아모스서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고 있었던 1970년대의 한국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왜 하필 ‘아모스’인가? 불의한 사회 현실, 수탈을 일삼는 억압적인 체제, 가난한 자의 궁핍을 폭로하며 한 사회의 현실적 좌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던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정의를 사회 속에 실현코자 갈망했던 하나님의 사자(使者). 그리고 그 예언자를 당대 한국 사회 가운데로 귀환시킨 신학자 김정준. 김정준 박사가 이 논문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예언자 아모스는 왕정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주의의 모순을 첨예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것의 반대급부로서 지파 공동체 즉 민중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오늘날 극단적인 경제주의적 발전주의를 모토로 하여 민중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켜 나가고 있는 한국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나는 아모스 예언자가 보여준 가난한 자에 대한 당파성과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오늘 우리 시대의 신학 및 교회 현장에서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정준 박사님이 박정희 개발독재의 폭압적인 권력 하에서 신음하던 한국 민중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아모스서를 주석하고 연구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 우리에게 김정준의 “아모스의 신학”은 더욱 발전적으로 계승되고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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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없는 경제와 하느님 - 복음화에 도전하는 가난과 신자유주의
성정모 지음 / 가톨릭출판사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1. 서론

“신학은 ‘물신’과 ‘성령’을 구별하는 일을 과제로 삼는다”는 주장에서 출발하여 저자 성정모는 신학적 관점에서 경제문제를 다룬다. 그는 Hugo Assmann이 근대 자본주의체제의 “숨은 신” 그리고 그 “내재적 신학”이라고 명명한 이 체제의 토대를 분석하기 전에, 경제신학의 작업에 대해 기존 신학계에서 제출하는 세 가지 유형의 비판에 관해 먼저 논평을 하고 있다. ① 경제신학은 사회과학을 활용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신학이 아닌 신학 이전의 작업이라는 견해인데, 이점에서 보면 해방신학의 사회 분석적 매개와 그 성찰은 고유한 의미에서 신학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경제신학자들이 행한 분석은 경제학이나 다른 사회과학 책에서 흔히 발견하는 그런 분석이 아니다. 경제신학의 관점은 소수에게 첨단 기술과 풍요를 안겨주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을 야기하는 구조와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었고 이 인식에 바탕해 이 논리의 토대와 그 정당화 과정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 경제학에 내재한 신학, 즉 숨은 신의 존재를 체계적인 형태로 밝혀내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식별해 온 것이다. 신학은 하느님과 신들에 관한 논의이므로, 신학을 한다는 것은 바로 신들에 관해 식별하는 것이며, 이 식별을 위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경제신학의 본질적인 부분일 수밖에 없다. ② 우상숭배 개념처럼 경제(학)에 적용한 신학 언어는 단지 유추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 즉 우상숭배 개념은 단지 종교 의 영역에 고유한 방식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견해는 (신성하다고 여기는) 종교적 영역을 (세속적이라고 여기는) 다른 인간적 현실로부터 분리해 하느님을 구체적인 역사적 관계에서 다시 분리하는 잘못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 이는 신의 육화 신비(incarnation)에 거스르는 것임. 우상숭배 개념의 핵심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인간의 산물을 신성화하다는 데 있음. 현행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절대화는 우상숭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특징지울 수 없는 것이다. Karl Marx 역시『자본(론)』에서 상품이 갖고 있는 물신성을 지적하고 있다. ③ 교회나 신학에서 경제에 대한 논의가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윤리적인 판단에서 이루어져 온 전통적인 견해인데, 이처럼 경제적 합리성의 문제를 윤리의 차원으로 제한하게 되면 자본주의체제의 내재적 신학의 우상적 정체를 밝히는 데 무력해지고 만다.

 

2. “물신-우상숭배”와 “하느님의 영”

엔리케 듀셀(Enrique Dussel)은 물신과 물신 과정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특징짓는다.

① 물신화는 체제를 신성화하기 위해 그리고 그런 식으로 권력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이 체제의 토대를 절대화하는 과정이다. ② “그러나 물신화는 단지 ‘절대화’만이 아니고 또한 행위와 예배의 바탕이다. 물신은 지배 체제의 실천적 수행을 위해 필요한 매개인 객체의 신성화다.” ③ 물신숭배는 설명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이고, 그 실천성에 있어서 마술적이다. ④ “제도적 실천”, 즉 현행 제도 안에 자리해 이 제도를 재생산하는 실천은 물신, 또는 신비적 마술적인 방식으로 신성화된 체제에 대한 현대적 예배 방식이다. ⑤ 물신화된 체제는 희생을 요구한다.

한편, 파블로 리처드는 성서 본문을 통해 우상숭배의 세 가지 특징을 분석한다.

① 출애굽기 32장에서 발견되는 “금 송아지”.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야훼 부정이나 다른 신 숭배가 아니라 조작된 야훼임. 리차드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죄는 “희망을 거스르는 죄”였음. 이 우상숭배의 결과는 해방과 자유를 거부하는 것이고 억압적인 체제 안에서의 “안주”를 도모하는 것임. ② 하느님과의 계약을 이행하도록 불림을 받은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삶의 상실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포기하고 이방인의 신을 택할 때, 야훼와 맺은 계약(가난한 사람들, 과부, 고아와 이방인을 위한 권리와 정의)대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백성임을 포기하는 것. ③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권력이라고 하는 특징. 억압자는 억누를 수 있고 죽일 수 있으나 한계가 있음.

요약하면 우상숭배는 억압적 체제가 제조한 신에 바탕한다. 이 체제는 체제의 토대를 신성화할 때 그리고 이 신성화와 함께 사람들에게서 현행 억압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다.

 

3. 자본주의의 숨은 신

자본주의 사회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이 믿는 신은 어떤 신인가를 알기 위해 이들이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 희망을 걸고 믿음을 쏟으며 자신의 행위를 위한 동기 부여와 기준을 찾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시장 경제의 초인간적 조건: 자본주의 시장 경제만이 우리 주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하는 새뮤얼슨이나 시장 경제체제는 오직 전적으로 자기 이해만 염려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위의 비의도적 결과이고, 경제성장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자유라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이기 때문에 번영과 자유의 “필요조건”을 이룬다고 말한 밀턴 프리드만의 진술에서 보건대, 시장 경제 옹호자들은 시장 경제체제 밖에는 번영과 자유를 위한 사회적 조건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회적 목표나 전략을 제안하면서 시장 경제의 무의식적인 조정 체제를 반대하는 것은 사회의 번영과 개인의 자유까지도 반대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포퍼 같은 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들이 “아무리 좋은 뜻으로 천국을 지상에서 실현하려고 할지라도 단지 지상을 지옥, 즉 오직 인간만이 자기 동료를 위해 준비하는 그 지옥을 만들 뿐이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상가들에게 시장 경제는 인간 사회에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개개인의 상호 행위의 무의식적 결과로서 단순히 진화하고 발전했을 뿐이며, 인간의 그 어떤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형태로도 결코 실현할 수 없는 기적 같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시장 경제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인데, 실상 우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잘 알고 있다. 칼 맑스가『자본(론)』제1권 제8편 “이른바 시초 축적” 장(章)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잘 분석하고 있듯이, 자본주의 출생의 역사는 즉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역사는 더럽고 잔혹한 과정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출생의 역사는 “농민으로부터의 토지수탈이 전체과정의 토대”를 이루는 “수탈의 역사”이며 “피와 불의 문자로써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공유지에 대한 폭력적 약탈,” “무자비한 폭력 아래에서 수행된 교회재산의 약탈, 국유지의 사기적 양도, 공유지의 횡령, 봉건적 및 씨족적 재산의 약탈과 그것의 근대적 사유재산으로의 전환,” “아메리카에서 금은산지의 발견, 원주민의 섬멸과 노예화 및 광산에의 생매장, 동인도의 정복과 약탈의 개시, 아프리카의 상업적 흑인수렵장으로의 전환”과 같은 폭력과 부패로 얼룩진 과정으로서, “자본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농촌에서의 폭력적 수탈이 농민들을 도시로 몰았고 결국 그들로 하여금 “팔 것이라고는 자기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실재를 은폐함으로써, 시장 경제의 초월화는 가능했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행위와 관계의 산물인 시장 경제를 흡사 자연의 범주로 승격시킨 것이고, 급기야는 단순히 경제적 관계를 넘어 자본주의를 인간적 실현의 최상 형태라는 식의 인간론적 주장과 사회에 관한 일반 이론으로까지 그 정당성을 비약시켜 버렸다. 말 그대로 자본주의를 신성화하여 도저히 극복이 불가능한 초월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하느님의 유일한 초월성을 부인하고 자본주의 체제 밖에 존재하는 모든 희망까지도 부정하고 억압하는 우상숭배에 다름 아닌 것이다.

2) 공동선의 건설 :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의 주장대로, 만일 정말 시장 경제가 자기 이해에서 출발해 공동선을 기적적으로 생산한다면 역사의 진정한 주체는 더 이상이 인간이 아니라 시장 경제 그 자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며, 성서적 관점에서 역사의 주체는 하느님 나라의 제안을 충만하기 위해 ‘부활한 분’의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의 공동체이다. 시장 경제의 범례는 이러한 복음서 및 성서적 관점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시장 경제에서는 역사의 주체로서 의식적으로 이웃과 연대하는 것, 또는 사회적 정치적 목표를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것 등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 경제에서 진정한 역사의 주체는 자본 혹은 시장 경제제도 그 자체이므로, 능력이 없어 약자가 되어 버린 자들을 옹호하고,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일체의 행위를 중단하고 오로지 각자의 이해만을 돌봐야 하는 것이다.

3) 시장 경제의 세계와 가난한 사람들의 삶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이들, 즉 가난한 자들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작동되는 체제이다. 가난한 자들의 배제와 죽음이 시장 경제에 속한 자들의 조화와 풍요를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맬서스는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과 고통은 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을 자신들의 구원의 길과 동일시하는 우상숭배이다. 시장 경제는 귀가 있으나 단지 소비자 즉 시장에서 상품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만 귀 기울이고 소비자가 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과 탄성은 시장 경제 내부에 절대 닿지 못한다. 우상은 귀가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지 않는 것(참고: 시편 115, 6; 왕상 18, 27)처럼 울부짖음을 듣지 못하는 가짜 신이다.

4) 숨은 신

시장 경제 우상숭배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살아 있는 참 하느님을 추구하고 선포하는 과정의 첫 단계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삼위일체” 분석이 요청된다. 즉 우리는 신성화된 자본주의에서 출발해 우상 숭배적 삼위일체를 엿볼 수 있다. 메시아적 주체와 구원의 길로서 시장 경제는 제2위 하느님인 성자이다. 성령은 시장 경제의 영, 즉 자신 안에 갇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순전히 내재적인 영, 이기심과 다른 이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는 영, “낙관적 비관주의”의 영과 대조할 수 있다. 우상숭배적 삼위일체의 제1위 성부는 시장 경제 논리 운동의 시작과 끝으로서 시장 경제와 그 영을 통해 찾아야 할 것인데, 시장 경제의 길이라면 이 운동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최종심급은 대체 무엇인가? 아스만은 “시장 경제 구조 안에서 그 자동 조절 기능의 시혜적인 방향을 보장하면서 활동하는 역동적인 신비가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처럼 자본 신은 자본 축적이라는 아지랑이에 숨겨져 있는 신이다. 이 신비의 특징은 권력 구조의 이러 저러한 폭력과 마주할 때조차도 그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 자본 신은 사물의 형태를 취하는 사회적 관계 즉 자본주의 내에서의 사회적 관계인 “계급”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지와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임금을 받아 삶을 영위하는, 그 과정에서 자본가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것이다. 자본은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고 그 결과 자본을 축적해가는 사회적 관계즉 계급 적대이다.



4. 자본주의적 인간관

자본주의에서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인간성의 원천을 어디에서 찾는가를 보기 위해 상품 물신(주의) 현상을 살펴보는데, 이는 시장 경제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가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전적으로 시장에서의 교환 즉 매매를 수행하기 위해 상품을 소유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런 상품 소유자 간의 교환 관계가 반복되면 소유자로서의 사람도 사라지고 오로지 상품만 남게 되어 상품이 그 자체로서 교환가치가 되어 버린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중요하지 않고 그것의 교환가치만 중요시됨으로써 사람조차도 교환가치로 측정되는 상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게 되고, 결국에는 인간이 자신의 창조물인 상품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되고 상품이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을 가치화하는 상품 물신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참고



오늘날 경제 문제에 관한 신학적 성찰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먼저 특히 WCC와 서구 신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고 자본주의 경제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 윤리적 판단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경제윤리신학”이 있다. 둘째, 기존의 경제 체제를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신학적 내용이나 종교적 이미지를 끌어들이는 마이칼 노박(Michael Novak)류의 “경제의 신학(Theology of Economics)”이 있다. 마지막으로 주로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제2세대적 흐름의 맥락에서, 특히 코스타리카의 DEI(Departamiento Ecuménico de Investigación) 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학제적인 연구 형태로, 물신숭배적 또는 우상숭배적 경제 이론과 실천을 삶의 하느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경제신학(Economic Theology)”이 있다. 예컨대, Enrique Dussel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 또는 파괴로서, 사회적 관계에 있는 노동의 빵(산물)의 sacramentality의 신학이라는 의미에서 theology of economics를 말하는데("Theology of Liberation and Marxism", p.97) 이것이 바로 세 번째 형태의 경제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 비교한다면, “경제신학”은 특정 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옹호하는 “경제의 신학”과 달리 인간과 자연의 삶을 죽음과 희생으로 내모는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적 경제 체제, 이론, 그리고 실천 등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또한 일방의 자로 타방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학제적 대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경제 문제를 신학 외적인 주제가 아니라 내적인 주제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경제윤리신학”과도 다르다. 물론 삶의 하느님을 고백하고 강조하는 점에서 경제윤리신학과 일맥상통한다. 우리 교재에 실린 성정모와 파블로 리처드, 힌켈라메르트 등도 바로 대표적인 경제신학자들인데, 1976년 DEI연구소의 창립을 주도한 프란스 힌켈라메르트(Franz J. Hinkelammert), 우고 아스만(Hugo Assman), 파블로 리차드(Pablo Richard) 등은 칠레의 경험에서 출발해 경제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독일 출신으로 정치경제학박사인 프란스 힌켈라메르트는 63년 칠레로 이주해 칠레 가톨릭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경제학자로서 종속이론가, 해방신학자들과 교류하고 당시 고조되던 사회 변혁 열기 속에서 사회주의 이행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 와중에서 기존의 정치경제학적 분석으로는 자본주의의 본질 - 그는 영(spirit)이라 표현한다 - 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단순히 경제 논리에 바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를 신학적으로 치장하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본주의를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하고 극복하려면 그러한 신학적 치장을 가능케 하는 자본주의적 기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 맑스의 물신숭배 비판을 성서적 전통의 우상숭배 비판과 접목해 종말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재해석한다. 다른 한편으로, 브라질 출신으로 64년 군부쿠데타로 우르과이로 망명했다가 거기서 다시 군사쿠데타를 만나 칠레로 망명했고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 후벵 알베스(Ruvem Alves) 등과 더불어 해방신학의 터를 닦았던 우고 아스만, 칠레 출신 성서학자로 민중적 성서해석학을 개척한 파블로 리차드는 신학적 관점에서 정치경제학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이들은 70년대 중남미의 억압적인 독재정권들이 대중들의 기본권 요구를 무참히 짓밟고 학살을 서슴치 않으면서도 스스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종교적 치장이 단순히 체제 이익을 위해 종교적 요소를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활용함을 뛰어넘어서 자본주의 체제가 잉여나 사회계급만 생산 또는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자체의 상징적 세계, 영성, 종교를 생산 또는 재생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은 피상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잘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종교심, 고유한 신비와 덕, 윤리와 상벌을 갖는 국가 종교의 가면을 벗기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선 맑스의 물신숭배 비판이 유용하다고 판단 아래 정치경제학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결국 서로 다른 두 개의 성찰 영역이 공통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해 함께 만나면서 이른바 경제신학이 태동한다. 한국계 브라질인으로서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인 성정모 역시 라틴 아메리카 각국에서 신학과 경제의 상관성에 관한 수많은 신학 강연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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