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정없는 경제와 하느님 - 복음화에 도전하는 가난과 신자유주의
성정모 지음 / 가톨릭출판사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1. 서론
“신학은 ‘물신’과 ‘성령’을 구별하는 일을 과제로 삼는다”는 주장에서 출발하여 저자 성정모는 신학적 관점에서 경제문제를 다룬다. 그는 Hugo Assmann이 근대 자본주의체제의 “숨은 신” 그리고 그 “내재적 신학”이라고 명명한 이 체제의 토대를 분석하기 전에, 경제신학의 작업에 대해 기존 신학계에서 제출하는 세 가지 유형의 비판에 관해 먼저 논평을 하고 있다. ① 경제신학은 사회과학을 활용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신학이 아닌 신학 이전의 작업이라는 견해인데, 이점에서 보면 해방신학의 사회 분석적 매개와 그 성찰은 고유한 의미에서 신학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경제신학자들이 행한 분석은 경제학이나 다른 사회과학 책에서 흔히 발견하는 그런 분석이 아니다. 경제신학의 관점은 소수에게 첨단 기술과 풍요를 안겨주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을 야기하는 구조와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었고 이 인식에 바탕해 이 논리의 토대와 그 정당화 과정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 경제학에 내재한 신학, 즉 숨은 신의 존재를 체계적인 형태로 밝혀내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식별해 온 것이다. 신학은 하느님과 신들에 관한 논의이므로, 신학을 한다는 것은 바로 신들에 관해 식별하는 것이며, 이 식별을 위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경제신학의 본질적인 부분일 수밖에 없다. ② 우상숭배 개념처럼 경제(학)에 적용한 신학 언어는 단지 유추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 즉 우상숭배 개념은 단지 종교 의 영역에 고유한 방식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견해는 (신성하다고 여기는) 종교적 영역을 (세속적이라고 여기는) 다른 인간적 현실로부터 분리해 하느님을 구체적인 역사적 관계에서 다시 분리하는 잘못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 이는 신의 육화 신비(incarnation)에 거스르는 것임. 우상숭배 개념의 핵심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인간의 산물을 신성화하다는 데 있음. 현행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절대화는 우상숭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특징지울 수 없는 것이다. Karl Marx 역시『자본(론)』에서 상품이 갖고 있는 물신성을 지적하고 있다. ③ 교회나 신학에서 경제에 대한 논의가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윤리적인 판단에서 이루어져 온 전통적인 견해인데, 이처럼 경제적 합리성의 문제를 윤리의 차원으로 제한하게 되면 자본주의체제의 내재적 신학의 우상적 정체를 밝히는 데 무력해지고 만다.
2. “물신-우상숭배”와 “하느님의 영”
엔리케 듀셀(Enrique Dussel)은 물신과 물신 과정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특징짓는다.
① 물신화는 체제를 신성화하기 위해 그리고 그런 식으로 권력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이 체제의 토대를 절대화하는 과정이다. ② “그러나 물신화는 단지 ‘절대화’만이 아니고 또한 행위와 예배의 바탕이다. 물신은 지배 체제의 실천적 수행을 위해 필요한 매개인 객체의 신성화다.” ③ 물신숭배는 설명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이고, 그 실천성에 있어서 마술적이다. ④ “제도적 실천”, 즉 현행 제도 안에 자리해 이 제도를 재생산하는 실천은 물신, 또는 신비적 마술적인 방식으로 신성화된 체제에 대한 현대적 예배 방식이다. ⑤ 물신화된 체제는 희생을 요구한다.
한편, 파블로 리처드는 성서 본문을 통해 우상숭배의 세 가지 특징을 분석한다.
① 출애굽기 32장에서 발견되는 “금 송아지”.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야훼 부정이나 다른 신 숭배가 아니라 조작된 야훼임. 리차드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죄는 “희망을 거스르는 죄”였음. 이 우상숭배의 결과는 해방과 자유를 거부하는 것이고 억압적인 체제 안에서의 “안주”를 도모하는 것임. ② 하느님과의 계약을 이행하도록 불림을 받은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삶의 상실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포기하고 이방인의 신을 택할 때, 야훼와 맺은 계약(가난한 사람들, 과부, 고아와 이방인을 위한 권리와 정의)대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백성임을 포기하는 것. ③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권력이라고 하는 특징. 억압자는 억누를 수 있고 죽일 수 있으나 한계가 있음.
요약하면 우상숭배는 억압적 체제가 제조한 신에 바탕한다. 이 체제는 체제의 토대를 신성화할 때 그리고 이 신성화와 함께 사람들에게서 현행 억압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다.
3. 자본주의의 숨은 신
자본주의 사회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이 믿는 신은 어떤 신인가를 알기 위해 이들이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 희망을 걸고 믿음을 쏟으며 자신의 행위를 위한 동기 부여와 기준을 찾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시장 경제의 초인간적 조건: 자본주의 시장 경제만이 우리 주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하는 새뮤얼슨이나 시장 경제체제는 오직 전적으로 자기 이해만 염려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위의 비의도적 결과이고, 경제성장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자유라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이기 때문에 번영과 자유의 “필요조건”을 이룬다고 말한 밀턴 프리드만의 진술에서 보건대, 시장 경제 옹호자들은 시장 경제체제 밖에는 번영과 자유를 위한 사회적 조건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회적 목표나 전략을 제안하면서 시장 경제의 무의식적인 조정 체제를 반대하는 것은 사회의 번영과 개인의 자유까지도 반대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포퍼 같은 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들이 “아무리 좋은 뜻으로 천국을 지상에서 실현하려고 할지라도 단지 지상을 지옥, 즉 오직 인간만이 자기 동료를 위해 준비하는 그 지옥을 만들 뿐이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상가들에게 시장 경제는 인간 사회에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개개인의 상호 행위의 무의식적 결과로서 단순히 진화하고 발전했을 뿐이며, 인간의 그 어떤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형태로도 결코 실현할 수 없는 기적 같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시장 경제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인데, 실상 우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잘 알고 있다. 칼 맑스가『자본(론)』제1권 제8편 “이른바 시초 축적” 장(章)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잘 분석하고 있듯이, 자본주의 출생의 역사는 즉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역사는 더럽고 잔혹한 과정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출생의 역사는 “농민으로부터의 토지수탈이 전체과정의 토대”를 이루는 “수탈의 역사”이며 “피와 불의 문자로써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공유지에 대한 폭력적 약탈,” “무자비한 폭력 아래에서 수행된 교회재산의 약탈, 국유지의 사기적 양도, 공유지의 횡령, 봉건적 및 씨족적 재산의 약탈과 그것의 근대적 사유재산으로의 전환,” “아메리카에서 금은산지의 발견, 원주민의 섬멸과 노예화 및 광산에의 생매장, 동인도의 정복과 약탈의 개시, 아프리카의 상업적 흑인수렵장으로의 전환”과 같은 폭력과 부패로 얼룩진 과정으로서, “자본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농촌에서의 폭력적 수탈이 농민들을 도시로 몰았고 결국 그들로 하여금 “팔 것이라고는 자기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실재를 은폐함으로써, 시장 경제의 초월화는 가능했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행위와 관계의 산물인 시장 경제를 흡사 자연의 범주로 승격시킨 것이고, 급기야는 단순히 경제적 관계를 넘어 자본주의를 인간적 실현의 최상 형태라는 식의 인간론적 주장과 사회에 관한 일반 이론으로까지 그 정당성을 비약시켜 버렸다. 말 그대로 자본주의를 신성화하여 도저히 극복이 불가능한 초월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하느님의 유일한 초월성을 부인하고 자본주의 체제 밖에 존재하는 모든 희망까지도 부정하고 억압하는 우상숭배에 다름 아닌 것이다.
2) 공동선의 건설 :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의 주장대로, 만일 정말 시장 경제가 자기 이해에서 출발해 공동선을 기적적으로 생산한다면 역사의 진정한 주체는 더 이상이 인간이 아니라 시장 경제 그 자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며, 성서적 관점에서 역사의 주체는 하느님 나라의 제안을 충만하기 위해 ‘부활한 분’의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의 공동체이다. 시장 경제의 범례는 이러한 복음서 및 성서적 관점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시장 경제에서는 역사의 주체로서 의식적으로 이웃과 연대하는 것, 또는 사회적 정치적 목표를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것 등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 경제에서 진정한 역사의 주체는 자본 혹은 시장 경제제도 그 자체이므로, 능력이 없어 약자가 되어 버린 자들을 옹호하고,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일체의 행위를 중단하고 오로지 각자의 이해만을 돌봐야 하는 것이다.
3) 시장 경제의 세계와 가난한 사람들의 삶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이들, 즉 가난한 자들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작동되는 체제이다. 가난한 자들의 배제와 죽음이 시장 경제에 속한 자들의 조화와 풍요를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맬서스는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과 고통은 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을 자신들의 구원의 길과 동일시하는 우상숭배이다. 시장 경제는 귀가 있으나 단지 소비자 즉 시장에서 상품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만 귀 기울이고 소비자가 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과 탄성은 시장 경제 내부에 절대 닿지 못한다. 우상은 귀가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지 않는 것(참고: 시편 115, 6; 왕상 18, 27)처럼 울부짖음을 듣지 못하는 가짜 신이다.
4) 숨은 신
시장 경제 우상숭배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살아 있는 참 하느님을 추구하고 선포하는 과정의 첫 단계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삼위일체” 분석이 요청된다. 즉 우리는 신성화된 자본주의에서 출발해 우상 숭배적 삼위일체를 엿볼 수 있다. 메시아적 주체와 구원의 길로서 시장 경제는 제2위 하느님인 성자이다. 성령은 시장 경제의 영, 즉 자신 안에 갇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순전히 내재적인 영, 이기심과 다른 이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는 영, “낙관적 비관주의”의 영과 대조할 수 있다. 우상숭배적 삼위일체의 제1위 성부는 시장 경제 논리 운동의 시작과 끝으로서 시장 경제와 그 영을 통해 찾아야 할 것인데, 시장 경제의 길이라면 이 운동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최종심급은 대체 무엇인가? 아스만은 “시장 경제 구조 안에서 그 자동 조절 기능의 시혜적인 방향을 보장하면서 활동하는 역동적인 신비가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처럼 자본 신은 자본 축적이라는 아지랑이에 숨겨져 있는 신이다. 이 신비의 특징은 권력 구조의 이러 저러한 폭력과 마주할 때조차도 그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 자본 신은 사물의 형태를 취하는 사회적 관계 즉 자본주의 내에서의 사회적 관계인 “계급”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지와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임금을 받아 삶을 영위하는, 그 과정에서 자본가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것이다. 자본은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고 그 결과 자본을 축적해가는 사회적 관계즉 계급 적대이다.
4. 자본주의적 인간관
자본주의에서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인간성의 원천을 어디에서 찾는가를 보기 위해 상품 물신(주의) 현상을 살펴보는데, 이는 시장 경제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가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전적으로 시장에서의 교환 즉 매매를 수행하기 위해 상품을 소유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런 상품 소유자 간의 교환 관계가 반복되면 소유자로서의 사람도 사라지고 오로지 상품만 남게 되어 상품이 그 자체로서 교환가치가 되어 버린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중요하지 않고 그것의 교환가치만 중요시됨으로써 사람조차도 교환가치로 측정되는 상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게 되고, 결국에는 인간이 자신의 창조물인 상품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되고 상품이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을 가치화하는 상품 물신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참고
오늘날 경제 문제에 관한 신학적 성찰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먼저 특히 WCC와 서구 신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고 자본주의 경제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 윤리적 판단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경제윤리신학”이 있다. 둘째, 기존의 경제 체제를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신학적 내용이나 종교적 이미지를 끌어들이는 마이칼 노박(Michael Novak)류의 “경제의 신학(Theology of Economics)”이 있다. 마지막으로 주로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제2세대적 흐름의 맥락에서, 특히 코스타리카의 DEI(Departamiento Ecuménico de Investigación) 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학제적인 연구 형태로, 물신숭배적 또는 우상숭배적 경제 이론과 실천을 삶의 하느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경제신학(Economic Theology)”이 있다. 예컨대, Enrique Dussel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 또는 파괴로서, 사회적 관계에 있는 노동의 빵(산물)의 sacramentality의 신학이라는 의미에서 theology of economics를 말하는데("Theology of Liberation and Marxism", p.97) 이것이 바로 세 번째 형태의 경제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 비교한다면, “경제신학”은 특정 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옹호하는 “경제의 신학”과 달리 인간과 자연의 삶을 죽음과 희생으로 내모는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적 경제 체제, 이론, 그리고 실천 등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또한 일방의 자로 타방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학제적 대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경제 문제를 신학 외적인 주제가 아니라 내적인 주제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경제윤리신학”과도 다르다. 물론 삶의 하느님을 고백하고 강조하는 점에서 경제윤리신학과 일맥상통한다. 우리 교재에 실린 성정모와 파블로 리처드, 힌켈라메르트 등도 바로 대표적인 경제신학자들인데, 1976년 DEI연구소의 창립을 주도한 프란스 힌켈라메르트(Franz J. Hinkelammert), 우고 아스만(Hugo Assman), 파블로 리차드(Pablo Richard) 등은 칠레의 경험에서 출발해 경제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독일 출신으로 정치경제학박사인 프란스 힌켈라메르트는 63년 칠레로 이주해 칠레 가톨릭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경제학자로서 종속이론가, 해방신학자들과 교류하고 당시 고조되던 사회 변혁 열기 속에서 사회주의 이행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 와중에서 기존의 정치경제학적 분석으로는 자본주의의 본질 - 그는 영(spirit)이라 표현한다 - 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단순히 경제 논리에 바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를 신학적으로 치장하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본주의를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하고 극복하려면 그러한 신학적 치장을 가능케 하는 자본주의적 기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 맑스의 물신숭배 비판을 성서적 전통의 우상숭배 비판과 접목해 종말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재해석한다. 다른 한편으로, 브라질 출신으로 64년 군부쿠데타로 우르과이로 망명했다가 거기서 다시 군사쿠데타를 만나 칠레로 망명했고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 후벵 알베스(Ruvem Alves) 등과 더불어 해방신학의 터를 닦았던 우고 아스만, 칠레 출신 성서학자로 민중적 성서해석학을 개척한 파블로 리차드는 신학적 관점에서 정치경제학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이들은 70년대 중남미의 억압적인 독재정권들이 대중들의 기본권 요구를 무참히 짓밟고 학살을 서슴치 않으면서도 스스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종교적 치장이 단순히 체제 이익을 위해 종교적 요소를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활용함을 뛰어넘어서 자본주의 체제가 잉여나 사회계급만 생산 또는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자체의 상징적 세계, 영성, 종교를 생산 또는 재생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은 피상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잘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종교심, 고유한 신비와 덕, 윤리와 상벌을 갖는 국가 종교의 가면을 벗기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선 맑스의 물신숭배 비판이 유용하다고 판단 아래 정치경제학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결국 서로 다른 두 개의 성찰 영역이 공통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해 함께 만나면서 이른바 경제신학이 태동한다. 한국계 브라질인으로서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인 성정모 역시 라틴 아메리카 각국에서 신학과 경제의 상관성에 관한 수많은 신학 강연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