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청목 스테디북스 42
이광수 지음 / 청목(청목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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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그러진 근대적 욕망의 자화상, 이광수의『무정』

 

“이형식과 같은 인물은 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만 존재했을까?”


400페이지를 넘는 책을 겨우 겨우 다 읽고 든 물음이 고작 그것이었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무슨 공식처럼 외웠던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이광수의『무정』.” 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이 작품을 기준으로 한국의 소설사가 고전 소설 및 개화기 소설기에서 바야흐로 본격적인 근대 소설기로의 이행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고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사실 나는 신학을 전공한 이래로 소설은 물론이고 문학이라고 하는 고상한 예술에 일절 관심을 끊고 살아오다가 작년에 들어서 나름대로의 문제의식을 갖고 그나마 한국의 90년대 이후 소설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시간 날 때마다 띄엄띄엄 읽고 있다. 그런 나이기에『무정』에서처럼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작품의 전면으로 튀어 나와 독자들을 친히 계몽하는 작가 이광수의 파격적인(?) 서술방식은 적잖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직접적으로 문학 텍스트를 많이 읽지는 못한 나이지만 신학이라는 인문학의 변두리에서 현대 인문학의 동향을 간접적으로 파악해 온 바에 따르자면, 적어도 탈근대 철학에서 근대적 주체(데카르트적 주체)의 죽음은 문학에서는 작품의 창조자 내지는 지배자로 상정되어 온 ‘저자’(author)의 죽음과 인식론적으로 상통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적어도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1968년「저자의 죽음」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에서 선언적으로 공포했듯이,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사라져 버린 중성적ㆍ복합적ㆍ간접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글을 쓰고 있는 육체에서 출발하여 결국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고 마는 ‘부정’이 되어 버리는 것이”여야만 한다고 나 역시 생각해왔다. 그것은 내가 최근에 탐독하고 있는 김영하나 김연수, 배수아, 천명관, 박민규 등의 90년대 이후 한국 작가들에게서 탈근대적 글쓰기의 전형적인 모습인 작가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 인물들의 자기 발언을 목격해 온 탓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광수의『무정』에서는 식민지 근대를 살아가던 지식인으로서 대중을 근대화의 흐름 속에 편입시키고자 발버둥치고 있던 이광수가 마치 작품의 인물들을 통해 독심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이광수는 지능적인 문학적 독심술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전지적이고 무소부재한 작가의 시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작품 전체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노골적으로 웅변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이형식이라는 이 작품의 중심인물이 작가 이광수 자신의 분신이자 문학적 자화상이라는 전제 하에 이형식을 중심으로 식민지 근대를 살아가던 한 지식인의 분열적인 욕망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이 작품에 대한 서평을 써보고자 한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어렴풋이나마 이 작품 안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겹쳐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는 분명 이형식이라는 동경 유학파 출신의 경성학교 영어 교사와 그의 과거와 현재를 대변하는 두 명의 여인 간에 일어나는 애정과 결혼의 삼각관계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적절히 구성된-물론 전근대적인 고전 소설이나 개화기 신소설에서 감히 다루지 못했던 파격적인 주제, 이를테면 자유연애 사상이나 서구적인 결혼관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을 서술하는 문체상의 표현 양식 또한 상당한 수준의 근대성을 성취했지만-표면적인 소재일 뿐 이 작품이 “잠재성의 차원”(내면에 감추고 있는)에서 실제로 말하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는 아니라고 본다. 나는 오히려 이러한 겉으로 드러나 이야기의 구조 이면에 깔려 있는, 아니 좀 더 정확히 그러한 연애의 삼각관계를 수단화하면서 작중 인물의 대사나 작가 본인의 서술을 통해서 이광수가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담론이 사실은 이 소설의 본질적인 이야기라고 본다.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것은 점점 작가 자신의 직접적인 서술이 아닌 주인공 이형식의 입으로 발화되기에 이른다. 작가는 독자들과는 별도로 작품의 주인공인 이형식이 작품의 내용 전개 과정-이형식으로서는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작가 자신이 이상화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의 지식인의 모델을 발견하여 내면화하고 현실에서 실천해나갈 수 있도록 훈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형식이라고 하는 식민지 근대의 한 지식인이 연애와 결혼이라는 개인적 문제의 갈등을 계기삼아 마침내 민족일반을 위해 봉사하는 애국지사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이형식 성장기』라고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형식과 박영채, 김선형 그리고 기타 주변 인물들 간에 벌어지는 극적인 많은 사건과 내면 심리의 갈등 양상이 그 자체로서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형식은 소설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이미 김선형과 정혼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기정사실을 위기로 몰아가는 박영채의 등장과 그에서 비롯된 며칠 동안의 사건들은 기실 이 작품이 대중소설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드라마틱한 긴장감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끌어들여진” 이야기적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이형식이 그러한 박영채와의 얽히고설킨 복잡한 연애의 문제를 삼랑진에서 목도한 민중들의 고난의 참상 앞에서 일거에 정리하고 그녀에게 새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교사”로 남게 된다는 이야기로 결말을 맺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작가 이광수가 이형식이라는 자신의 분신을 다소 신파적인 애증의 연애사 가운데 위치시켜 대중들 앞에 내놓으면서 결국 전달하고자 했던 그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즉 소설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통해 당시 조선 민중들이 살아가고 있던 현실의 세계에 대하여 실로 “무정”(無情)한 사회로서의 상상의 관계를 부여하며 만들어진 이 작품의 의미체계는 대중들의 의식을 어떻게 구성하기를 의도했던 것일까? 이광수는 삼랑진에서 모든 주인공들이 해후하기 전까지 박영채와 김선형을 사이에 두고 심리적으로 갈등하고 있는 이형식의 모습을 매개로 하여 구한말 개항과 더불어 도래한 근대화의 물결이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와 만나면서 “식민지 근대성”의 이름으로 형성되고 굴절되는 과정을 온몸으로 겪고 있던 당시 조선 민중들에게 더욱 더 전면적인 근대화의 길과 전통 보수의 길 양자 간에 택일을 집요하게 종용한 것이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질문 조건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이광수는 이형식도 이형식이지만 전자와 후자의 대립이 빚어낸 비극을 가장 첨예하게 체현하고 있는 작중 인물인 박영채가 결국 최종적으로 선택한 길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면서 이 작품의 독자들에게 근대 문명 지향이라는 민족적 지상과제와 그것의 유일한 방법적 수단이 교육밖에 없음을 강변한다. 물론 근대화를 전면화하자는 것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민족적 고유성까지 상실하자는 이야기로까지는 결코 나아가지 않는다. 아마도 이광수 본인으로서는 근대화를 이룩하는 것이 식민화에 순응하는 것과 개별적으로 철저히 양립이 가능한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정치적인 투쟁을 통한 주권의 탈환이 없이도 교육이나 경제, 문학 언론 등 각종 모든 문명 사상의 보급만으로 충분히 이 나라를 강성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이광수의 발상, 또 식민통치에 대해서는 저항이든 순응이든 그 어떤 선택도 말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교육의 강화만을 외치며 조국에 대한 장밋빛 미래를 환상적으로 염원하는 이광수의 정신세계 내에서는 식민지 근대 시기에 민족적 주체성 수호와 자력으로의 근대화 성취라는 현실적으로 상호 모순적인 목표가 아무런 충돌도 없이 분열적으로 병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형식이 김장로 및 김선형에게 갖고 있는 선망의식을 떠받치고 있는 정서의 기제는 박진사의 문하생 시절부터 줄곧 기만적으로 내면화해온 “민족에 봉사하는 교육자”로서의 소명 완수라는 지극히 대승적이고 공적인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필경 박영채와 재회하고 삼각관계의 애정사를 극적으로 거쳐야만 했다. 물론 박영채도 결국은 이형식과의 사사로운 연애의 시련을 극복하고 김병욱의 설득을 따라 “우리 자손에게 대한 책임을” 다하는 길을 걷는다. 삼랑진에서 재난 구호 음악회를 함께 치루는 과정에서 더 이상 “연인”이 아닌 “교사”가 된 이형식의 지도 덕분에 “민족에 봉사하는 지식인”의 길을 새롭게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형식이 김선형과 김병욱과 박영채 모두에게 스승이 되어 주었지만 결혼은 분명히 김선형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박영채는 결국 이형식의 자기완성을 위한 지양(止揚)의 객체 혹은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작가 이광수에게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민족주의가 했던 역할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광수가 식민지 백성들에게 설파했던 민족의 자존과 근대화의 성공적인 완수, 이 두 개의 상이한 목표 간에 놓인 좁힐 수 없는 간극은 이광수 일생에 걸쳐 중첩과 단절, 확대와 축소를 거듭하다 결국 일제 말기에는 식민지 지배 논리를 자발적으로 수용하여 친일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는 것을 계기로 전자가 후자의 논리에 완전히 종속되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형식 그리고 이광수는 식민지 근대를 살아가던 한 지식인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민족주의적 감성과 내면에서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는 가운데 결국 둘 다 함께 파국을 맞는 모습을 나에게 생생히 보여주었다. 나는 여기서 근대적 지식인 모델의 우울한 종말을 확인하였다. 문제는 이것이 이형식과 이광수, 이 식민지 근대적 지식인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 역시 저들처럼 서구적 근대성에 부합하는 개인과 사회의 이상을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 가운데 자신들을 민족이나 민중을 위한 교사의 모델로 자기규정하고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대중을 타자화하고 자신을 대중과 분리시키며 전지전능한 교사 혹은 입법자의 위치에서 대중을 계몽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이러한 지양의 과정이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로 귀결되는지는 큰 문제꺼리가 아니”라는 입장을 펼 수도 있다. 즉 “소설 형식의 근대성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보다 문제적인 것은, 소설이라는 인식적 장치의 위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한 시대를 구획할 만큼 획기적인 것인지의 여부이다”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정』의 형식적인 소설미학의 근대성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별도로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주조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의 식민지적 정신성에 대한 메타적 비평 역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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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에서 여이연이론 4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태혜숙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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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이 말하는 해체론의 정치적 활용 가능성

 
1. (데리다의) 해체론은 배제되거나 주변화된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인식을 확대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의 해방(혹은 '목소리 내기')을 도울 수 있다.
=>그런데 어차피 이것은 사이드가 푸코에게서 발견했던 바로 그 가능성이다. 굳이 데리다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하나의 이론이나 텍스트가 일관된 논리와 타당한 권위를 지닌 서사로 확립되는 과정에서 억압되고 무시된 것에 주목하는 스피박의 태도는 지배적 사회계층이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방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녀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이 두 가지 태도의 핵심은 주체가 규정부정되는 '묵살의 여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2. 해체론은 지배 담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분법적 체계를 전복할 수 있다.
=>이것도 굳이 데리다만의 작업이 아닐텐데..푸코의 계보학 역시 지배 담론이 지식권력으로 작동하는 양상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3. 해체론은 급진적 정치강령이나 전복적 문화분석이 비판의 대상인 지배 담론의 가치와 전제를 재생산하는 것을 막는 '정치적 안전장치'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스피박이 '단절 속의 반복'이라고 지칭하는 이러한 재생산의 위험은 저항 담론이 지배 담론의 역전에만 그치는 데서 비롯되며(이를테면,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의 위계질서를 뒤바꾸려는 목적으로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 결국 저항 담론은 지배 담론의 논리에 여전히 갇혀 있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소위 말하는 남한 사회의 진보적 우파 즉 민족주의 진영이 떠올랐다. 지난 세월 그들은 철저한 민족주의적 신념에 근거하여 민족적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반공이데올로기를 민족주의를 우회하여 정면으로 돌파하지는 못했다.
 
4. 스피박은 역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 역전에는 반드시 대립항 자체의 즉 구조 자체의 해체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거리두기가 보완되지 않으면 대립하는 두 입장은 끊임없이 서로를 정당화할 것이다."
=>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스피박은 지배 담론에 맞대응하는 역헤게모니적 담론은 '치고 빠지는' 혹은 '마구 헤집고 다니는' 식의 게릴라전보다 오히려 지배 담론에 의해 상쇄되거나 재전유될 위험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스피박이 지배 담론을 내부에서 공략하는 '타협'과 '비판'의 방식을 선호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지배 담론과 타협하는 것이 과연 지배 담론과 저항 담론이 대립하는 구조 자체를 해체하는 데 얼마나 공헌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지배 담론을 내부에서 비판하는 것이 지배 담론의 성숙한 자기 완성의 길에 조력하는 것이 되고 말지 않을까? 지배 담론은 저항 담론이 지배 담론 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비판할 때 과연 그것을 지배 담론 내부의 자기 성찰 움직임으로 왜곡하지 않을까? 소위 말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나 "지속가능한 발전의 논리", "사회적 안전망 확충", "다수자 내에서의 소수자 배려 문화" 등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모순의구조 자체를 해체시키기 보다는 그것의 약점을 보완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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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6-01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겠습니다. 스피박 흔적이 있어서 남깁니다. 요즘 관심이 있어 이어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혹 함께 나눌 부분이나 도움될만한 코멘트 나눌 수 있으면해서요. 직장인이구 취미삼아 보는 정도입니다.
 
신, 그 이후 매스터마인즈 3
돈 큐피트 지음, 이한우 옮김 / 해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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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이 자발적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사랑한다. 아마도 신은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저자 Don Cupitt는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라고 한다. 처음에는 별 기대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 수록 "어! 이것 봐라! 이 친구 좀 하는데.."라는 말이 절로 나오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Kaufman이나 Taylor, Geering 등과 비슷한 사유를 하면서도 훨씬 쉽고 간결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 같다. 
   


1. 신들의 도래
영혼, 정령 그리고 신들 / 왜 정신인가 / 최초의 신들 / 신의 도래 / 신과 그리스 철학 / 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큐피트는 미셸 푸코가 말년에 'Technologies of the Self', 곧 자아를 만들고 돌보는 수단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을 인용한다. 푸코는 후기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의 권력 메커니즘을 분석하고자 초기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영적인 훈련'과 테크닉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거기서 개인이 자신 스스로에게 행사하는 지배의 테크놀로지를 문제 삼는다. 수도사가 자신의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면서 절대자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그 모습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주체로서 '자신'이 발명되고 있는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큐피트가 이 대목에서 푸코의 이러한 태도를 너무나 속좁은 판단이라고 비판하며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오히려 처음부터 신에게 도전하고 저항하는 것이 신앙의 구성 요소였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가 푸코를 적절하게 비판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왜 하필 푸코를 끌어들였는지도 솔직히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신학자로서 푸코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저서를 그가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큐피트는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도 다소 과감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에 따르자면, 그리스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법과 질서의 강력한 대변자이자 옹호자였으며, 세상 만물이 모든 수준에서 시계처럼 정확하고 준법 정신이 투철하며 자애롭고 조화롭게 운영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플라톤은 올바른 통치가 이뤄지고 있는 나라에서 모든 것이 현명하고 자비로운 법률에 복종하는 것처럼 우주적 차원에서도 모든 것이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며 국가나 개인의 영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건적인 '당위'로부터 현실적인 '존재'를 도출해 내고 다시 실제적인 당위 명제들로 복귀한다. 우리는 지상에서 법과 질서를 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이미 천상에도(아마도 이데아를 말하는 것일듯) 존재하고 있음은 물론 지상에서도 효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큐피트는 이런 생각들은 전적으로 비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이성의 측면을 넘어서 계시적이기까지 하다고 평가한다. 한 마디로 플라톤의 철학은 순수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고 단정한다. 그것은 애초부터 그리스 문화권에서 사용되던 종교적 언어를 자기들 수준에서 나름대로 탈신화화한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엉터리 학설이 기독교 신앙과 만나 그토록 오랫 동안 신학을 배후에서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신앙 언어가 작동된 맥락은 철저히 유대 종교적이지 그리스 철학적이지 않았음을 자세히 논증한다.
 
 
2. 신들의 떠남
신비주의 / 독단적 형이상학의 종말 / 역사와 휴머니즘 / 문화와 언어 / 천사들의 시대



"일반인을 위해 실재론은 나름의 필요성을 가진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함축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신의 실재성은 인간의 정신과 대비되어 확립되어 왔다. 유한과 무한,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감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등이 대비되어 온 것이다. 이 모든 분열로부터 벗어나 있는 신은 자아와 달리 부드러운 흑대리석으로 만든 무한한 벽과 같은 것으로 모든 것을 차단해 버린다. 처음에 신에 관한 실재론적 교리를 성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분법적 대조 일체를 해체해 버리는 것 외에는 종교적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없다.
 
.......
 
특출난 신비적 '탈(脫)실재론자들'-예를 들면 유대인 스피노자, 아랍인 알-할라지, 그리스도인 에카르트 등과 같은 인물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로부터 단죄를 받았다. 옳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신비주의는 실재론의 허위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
 
종교의 마지막 아이러니는 결국 우리가 가장 열렬하게 갈망하는 것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신, 자아, 세계 등의 관념을 구성할 때 사용한 주요한 구별과 대립 항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래서 우리에게 남게되는 결과는...니힐리즘인가 지복인가?
물론 둘 다이다. 신의 해체와 신과의 완전한 합일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 책은 내가 보기에 '신론의 계보학'적 탐구를 초보적이나마 시도하고 있는 책같다. 물론 북미의 수정주의신학 진영과 공명하는 재구성된 현대의 종교 개념을 제시하는데 최종 목적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구의 종교사와 문화사를 관통해온 神인식의 패러다임 전환 과정을 설득력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결코 진화론적 역사주의의 사고를 고집하지 않으며 자신의 관점에서 계열화된 역사의 궤적을 따라서 서구 신관의 변화 과정을 신의 '도래'와 신의 '떠남'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3. 신들이 떠나버린 이후의 종교
전통적 종교의 유산 / 자연주의 철학 그리고 종교 / 세계화와 타자의 종언 / 도덕의 종말과 윤리의 복권 / 순진한 종교 / 시적 신학 / 세계 종교

 

큐피트가 제시하는 새로운 종교 개념은 이렇다.

1) 형이상학 없는 종교
큐피트는 과감하게 말한다. 고대의 유신론 신앙을 가능하게 했던 인식론적 토대로서의 형이상학적 가정들은 이제 모두 그 논리적 설득력을 상실했고 물질적 차원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정신적 차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음이 자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 더 이상 신을 엄청난 크기의 비가시적 존재로 파악하는 견해는 존립할 수 없으며, 차라리 우리는 신에 관한 신앙을 일정한 의식 형태 곧 우리 자신을 성찰하기 위한 간접적이고 선택적인 의식 형태의 일종으로서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큐피트는 그것을 '신의 눈'이라고 명명하며, 이미 죽은 신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그의 눈이 때로 유의미함을 강조한다.

 

2)신조없는 종교

교리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철저하게 드러난 오늘날 과연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 체계가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가를 진지하게 물었던 큐피트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객관적인 가치나 기초를 갖고 있지 못하며 객관적으로 고정된 사물에 질서란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항구 불변적 성격을 지니고 독립된 절대적 인식의 권위를 누려왔던 기독교의 교리나 신조 역시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흡사 린드벡의 견해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3) 권위와 질서가 배제된 종교

-기독교는 감시와 처벌, 유혹과 자발적 순종의식 함양 등 모든 억압적 주체화의 동원들을 다 사용하여 그 통치성을 관철시켜온 대표적 이데올로기이다. 교회 생활, 영성, 경건, 교리 학습, 기도, 선교, 노동, 구제 등은 철저히 권력의 유지와 연계되어 작동되어온 장치들이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제거된 종교를 큐피트는 희망한다.    

 

4) 인류 중에서 선민과 나머지 사람들간의 명확한 경계선을 확신하는 군중들이 없는 종교

-별 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구원 신앙에 근거한 자기 정체성 확보 노력과 그것에 자동적으로 동반되는 비기독교인에 대한 배타의 논리가 얼마나 왜곡된 인성과 행태를 조장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과연 이런 종교가 존재할 수 있을까? 큐피트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의 도구 세트로서의 종교 개념을 제시한다. 이러한 종교 개념은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우리가 자기 인식에서 성장할 수 있고(신의 눈), 우리 자신과 기타 만물의 무상(無常)과 허망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지복의 空), 삶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일련의 태도들과 기법(태양의 삶)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바, 신들이 떠나 버린 이후의 종교 그 핵심에는 '시적 신학'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카우프만이 제시했던 상상적 언어로서 '재구성된 신학'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것 같다. 큐피트에 따른다면, 시적 신학이 하나의 신학일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각양각색의 가치관이 경합하는 다원주의의 시대에도 여전히 아니 더 심각하게 명료한 도덕적 비젼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만물의 무상함에 대해 이제는 그저 담담한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기독교 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온 탈신화화와 비실재론적 종교 개념화의 전통을 이상적으로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야할 길은 어디일까? 세계 가운데서 이미 죽어버린 신을 따라 같이 죽으러 가는 길 뿐이지 않을까?

 

신, 그 이후의 시대에서 신앙의 바다로 뛰어들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꼭 읽어 볼 필요가 있는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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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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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실재의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Empire of the Real!”)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중요성을 부여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실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환기되며, 신비를 환기하는 질서 안에서 ‘사물들’을 결합시키는 사유에 의해 정당하게 환기될 수 있는 ‘신비’입니다.


1966년 5월 23일

르네 마그리트

(미셸 푸코에게 보낸 편지 중)




1. 기다림 그리고 만남


이 소설이 서점에 나오기 며칠 전에 내게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소설의 출간과 맞추어 ‘소설 낭독회’를 개최한다는 ‘김영하 닷컴’(http://kimyoungha.com) 운영자로부터의 메일이었다.

그러나 낭독회가 열리기로 한 8월 10일에 공교롭게도 내겐 중요한 일정이 잡혀 있었다. 당시 내가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와 관련한 지방출장이 하필이면 그날 잡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책이 출간되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내게 배송이 되도록 인터넷 서점에서 미리 주문을 해두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되던 무렵부터 난 이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단 4회 연재를 끝으로 이 소설은 갑자기 연재가 중단되었고, 그로부터 약 1년이 경과한 시점인 지난 8월에 390페이지 정도의 두툼한 장편소설의 모습을 하고 출간이 된 것이다. 책을 받아보던 날, 약간의 흥분을 느끼며 박스를 뜯던 기억이 난다. 책을 꺼냈을 때, 일단 디자인부터 눈길을 끌었다. 책 꺼풀이 책을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꺼풀을 벗겨보면 책의 앞뒤 표지가 벨기에의 화가 Réne Magritte(1898-1967)의 1954년 작 ‘빛의 제국’으로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작가가 소설의 제목을 그 ‘빛의 제국’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문득 미셸 푸코가 쓴 마그리트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도 생각나고, 전에 읽은 김연수의 단편소설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도 생각나는 것이 어째 마그리트라는 이름만으로도 이 소설에 대한 흥미는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현대 초현실주의 회화 계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마그리트는 모든 세계와 사물을 결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정의 내리려는 시도에 반대해서 신비의 불명확성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연작은 같은 시간대·같은 장소에서 하늘은 청명한데 땅은 어두운, 말 그대로 모순 된 현상이 너무나도 조화롭게 결합된 기이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 모순적인 현실이지만 우리는 별 다른 의식 없이 그럴싸하게 느낀다. 마치 꿈에서라도 본 듯한 장면이다.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에서 인지된 또 하나의 현실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몇 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음 그의 그림과 대면하는 순간 받았던 충격을 잊지 못할 것이다. 마그리트는 충격과 역설을 통해서 사고의 신비함을 드러냈으며, 상식적으로 전혀 예측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대상을 병치시키며 현실과 환상 간의 긴장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이 소설의 내용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작가는 소설의 제목을 그것에서 빌려 온 것일까? 증폭되는 내 호기심에 대한 답변은 소설의 독서과정 속에서 직접 찾기로 했다.

한편, 또 하나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다. 책의 앞뒤를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는 그 꺼풀의 앞면에 위 아래로 다시 덧 씌워진 작은 꺼풀, 거기에는 소설의 제목과 함께 이런 문구가 세로쓰기로 적혀 있었다.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지금 당장 나의 메신져를 로그인하면 발견할 수 있는 누군가의 메신져 대화명이기도 하고, 포털 사이트에서 명언 혹은 격언을 검색하면 개인 블로그나 미니홈피 등에서 쉽게 발견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문장 안에 들어간 단어들이 약간씩 다른, 몇 개의 버전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공히 이 말의 주인은 ‘폴 발레리’로 돌려지고 있다. 발레리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적인 자극이 중요할 뿐이다.

전에 한 번은 내가 알고 있는 그 프랑스 상징시(象徵詩) 계열의 대표자 폴 발레리(Paul-Toussaint-Jules Valéry)와 후기자본주의의 기업가적 주체담론을 특징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이 격언이 얼핏 봐도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이 말이 정말 발레리의 시편에 들어 있는 말인지 일부러 찾아 본 적이 있다. 역시나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발레리의 시집과 그에 대한 연구서는 물론이고 도서관이나 웹상에서 찾을 수 있는 관련된 연구 논문들을 아무리 뒤져봐도 발레리의 시에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자기계발의 주문에 걸려 살아가는 탈근대 자본주의의 시민들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황금률’로 즐겨 사용하는 이 말을 왜 냉소적 아이러니의 활력으로 넘치는 소설을 쓰는 데 주력해온 작가 김영하가 인용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할 뿐이었다. 냉소적 허무주의자 김영하와 후기자본주의적 계몽주의자 ‘발레리’(실존했던 시인이자 평론가 Paul Valéry가 아닌 네티즌들의 ‘상상’ 속의 그 폴 발레리!)라니?! 이 둘의 조합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 조그맣게 쓰여 진 책 소개의 문구, “단 하루 동안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산 한 남자의 이야기”. 짐작컨대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산다는 것은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을 순식간에 회복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잃어버린 기억이 현재의 나의 삶과 그다지 별로 충돌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면, 그런 건 애초부터 소설의 꺼리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뭔지 몰라도 분명 현재의 내게는 잊고 싶은 그런 류의 끔찍한 기억, 즉 충분히 소설의 소재가 되고도 남을 만큼 충격적인 과거와의 대면을 다루고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책의 표지에서부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과 발레리 아닌 발레리의 ‘문장’이 역시 나의 심상치 않은 예감 그대로 이 소설을 읽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 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소설의 서사를 중심으로 그 얘기를 해볼까 한다. 자, 나의 『빛의 제국』 ‘독후감상문’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2. 명령의 귀환, ‘실재’의 귀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즉시 귀환하라. 이 명령은 반복되지 않는다.” (39쪽)


이 한 마디의 문장 속에서 주인공 ‘그’(김성훈도 김기영도 아닌 ‘실재’의 ‘그’)의 과거가 드러나는 것과 동시에 이 소설의 중심 서사가 비로소 실체를 드러낸다. 20년 동안 그저 조금 위험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만 믿었던 한 남자에게 2005년 3월 15일 아침 8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각에 갑자기 암호문 하나가 스팸 메일을 가장하여 날아온다. 명민한 ‘그’는 그 암호가 4번 명령을 의미함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4번 명령은 위에 보다시피 다름 아닌 본국으로의 귀환 명령이었다. 그렇다. ‘그’의 과거는 북에서 남으로 ‘옮겨 심어진’ 사람, 곧 김기영이란 이름으로 살았던 남파간첩 김성훈이었던 것이다. 3월 16일 밤 세시에 좌표 3674828에서 접선해야 한다면 이제 남은 시간은 대략 18시간 정도. 아! 이제 ‘그’는 하루 동안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 가족, 사랑, 직업과 추억,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20년 간 자신이 김기영이라 믿고자 노력했고 최근 10년간은 정말로 그렇게 믿어버렸던 한 남자가 이제 그 김기영이라는 이름의 원래 주인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은 그 껍데기를 잠시 빌려 입은 ‘육체’일 뿐임을 만천하에 공개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것은 ‘그’의 육체가 전에 갖고 있던 이름인 김성훈 곧 평양출신의 남파간첩이라는 본래의 신분을 회복해야만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명령문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귀환’과 ‘명령’이라는 두 단어였다. ‘귀환’하라는 명령이 주인공에게 내려졌다. 그리고 이 명령은 10년 만에 다시 내려온 명령이었다. 이 명령이 내려짐으로써 소위 386출신 영화 수입업자 김기영으로 살아오던 ‘그’의 삶 속에 잃어버렸던 과거가 한 순간에 되살아난 것이다. 다름 아닌 남파간첩 김성훈. 김기영이 잊고 지냈던 혹은 그러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 신분이자 이름이다.

김기영 아니 김성훈은 평양외국어대 영어과 재학 중 차출되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반(구 695부대 130연락소)에서 4년간 대남 공작원 교육을 받은 뒤 스물두 살이던 1984년 서울로 남파되었다. 당의 명령에 따라 대학입시를 치르고 ‘1986년’ (그러니까 작가 김영하가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바로 그 해에) 연세대 수학과에 입학하고 곧바로 NL 계열의 학생운동그룹에 잠입한다. 그때 그가 경험하는 것은, 공작원 교육까지 받은 자신이, 소위 주사파라고 하는 남한의 철부지 꼬마 혁명가들에게 김일성 ‘주체사상’을 학습 받는 희극적인 상황이다. 위장 재외동포나 고정간첩, 자생적 공산주의자 위주의 공작원 양성 방식에 변화를 꾀하고 있던 당시의 평양은 잘 훈련된 엘리트 출신 공작원을 남한 대학의 신입생으로 입학시켜 학생운동세력과 함께 커나가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김기영이 된 김성훈은 그 실험 모델이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영화수입업을 하며 남파된 스파이들에게 그럴듯한 전사(前史)를 만들어주는 이른바 ‘포스트’로 암약한다.

그런데 그런 김기영 뒤의 감춰진 김성훈의 이름과 신분이 다시 돌아온 것과 동시에 현재의 김기영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김기영의 삶 속으로 남파간첩 김성훈이라는 존재가 귀환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저 간명한 명령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명령의 귀환은 곧 (잃어)버린 자기존재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귀환 혹은 명령의 귀환이라고 하는 이 기표는 그 속에 단 하나의 기의만을 담고 있다. “너의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당장 귀환하라!”

이처럼 10년 만에 내려온 명령, 10년 만에 ‘그’에게 귀환한 그 명령은 곧 다른 어떤 곳으로도 아닌 오직 ‘북한’으로의 귀환만을 요구하는 명령이었다. 적어도 그것은 단순히 간첩 임무를 재개하라는 평범한 명령이 아니었다. 이는 소설 속에서 아이러니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부분이다. 10년 동안 주인공은 나름대로 잘 나가는 영화 수입업체의 사장이자 외제차 폭스바겐 딜러의 남편이며 천재소리를 듣는 소녀 바둑기사의 아빠인 김기영이라는 이름 뒤에서, 자신이 남파간첩 김성훈이라는 사실을 점차 망각해버리고 김기영을 오로지 ‘실재’의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인데, 평생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두통을 느끼게 된 어느 날 아침 한 순간에 그 죽었던 남파간첩 김성훈이 다시 살아난 것도 모자라 지난 시절 김기영의 이름으로 만들어온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다 파괴될지 모르는 상황이 온 것이다. 명령의 귀환이 김성훈의 귀환이며 북으로의 귀환의 명령이자 김기영의 죽음을 요구하는 명령이라는 이 끔찍한 상황 앞에서 ‘그’는 비로소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던 지난 10년간의(1996-2005) 비교적 편안했던 김기영‘만’으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명령을 수행하던 (김기영과 김성훈이 공존했던) 간첩으로서의 13년 세월(1984-1996)과 나아가 명령과는 무관했던 즉 남파되기 이전 북에서 김성훈으로‘만’ 살았던 시간들(1963-1984)까지 단 하루 동안 통째로 ‘복습’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전개되는 소설 속의 ‘그’의 힘겨운 하루 여정은 이렇다. 자신의 기록이 삭제되었으리라 믿고 있던 ‘그’는 명령의 전달 경위를 추측하며 고민에 휩싸인 채 서울 곳곳을 방황한다. 올라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에게 시간은 속절없이 점점 흘러간다. 한가로이 앉아서 사태를 관망하며 대책을 마련할 그런 여유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망각의 강 저 편에 있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아무런 예고와 절차도 없이 불쑥불쑥 ‘그’의 의식 한 가운데로 넘어 온다. 어머니의 자살로 얼룩진 불행했던 평양에서의 어린 시절, 자신보다 앞서 주체사상을 냉소하고 북한의 파국을 예상했던 아버지의 모습, 첫 사랑 정희와의 가슴 아픈 이별과 우연한 재회, 서울의 종로5가를 본뜬 평양의 세트장에서 치렀던 마지막 시험, 연세대 재학 시절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어린 친구들과 월미도로 놀러 가 나누었던 혁명에 관한 대화들, 대학 후배 소지현과 비밀을 공유하면서 나눈 섹스, 배신한 동료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기도 했던 악몽 같은 임무 수행의 기억들 속에서 ‘그’는 점점 촉박해지는 시간과 뒤따라오는 미행의 강박에 동시에 쫓기며 허둥댄다.

이쯤 되면 이 명령의 귀환은 단순한 귀환의 명령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 명령의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인가? ‘그’는 알 수 없었다. 독자인 나도 소설의 마지막까지 그것이 궁금했지만 작가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명령이 내려온 이유와 명령을 내린 주체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 그 자체의 명령, 그러나 4번 명령이라는 명령의 형식만으로도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명령. ‘그’를 따라 우리도 다시 한 번 그 명령을 되새겨 보자. “모든 것을 청산하고 즉시 귀환하라. 이 명령은 반복되지 않는다.”

한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에게 내려진 이 죽음의 귀환 명령인 4번 명령이 라캉의 ‘실재’(the Real)에 관한 다소 대중적인 정의에 비교적 잘 부합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실재’ 그것(物, the Thing)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명령은 ‘그’가 온전한 김기영이 되어 지난 날 김성훈으로서의 신분과 정체성을 철저히 잊고 지냈던 사이에 ‘그’의 일상을 찾아냈으며, ‘그’의 힘과 지식으로는 그것의 정확한 기원이나 내막도 알 수가 없다. 한편, 우리는 ‘실재’가 우리 앞에 다가올 때 그것을 거부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다. ‘그’ 역시 명령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며, 또 무력하지 않는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실재’는 때로 상징적 질서(the symbolic order)의 경계를 완전히 침범해 들어오는, 위협적인 그 무엇이다. 명령은 ‘그’의 김기영으로서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리려 한다. 모든 것을 ‘청산하라’ ― 너 스스로 너의 아내와 딸과 사업을 ‘모두 파괴하라’. 귀환의 명령인 4번 명령은 결국 ‘그’가 김기영의 이름으로 있던 지난 22년간 남한에서 일구어 온 삶의 모든 것들을 삼키려 하는 죽음의 명령 그 자체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에서 ‘그’에게 전달되는 명령이 정확히 ‘실재’적인 것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명령의 귀환, 그것은 곧 ‘실재’의 귀환이었던 것이다. 이 명령의 귀환을 통해 ‘그’는 처음으로 김기영 이전의, 나아가 김성훈마저 너머 선 ‘그’ 자신의 ‘실재’적인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김성훈 혹은 김기영이라고 하는 상징적 이름을 가진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이전에 피와 뼈와 살로 이루어진 ‘날 것’ 그 자체의 인간성 말이다.

라캉 정신분석학에서는 현실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구별을 중요시한다. 주체는 복잡한 언어적·상징적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스스로 ‘현실’이라고 상상적으로 믿고 있는 어떤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상징적 질서는 그의 주체의 존재 조건이며, 상상적인 것은 그의 버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 혹은 ‘현실’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무언가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세계 속으로 상징화되어 포섭될 수 없는 은폐된 그 무엇을 정신분석학은 외상(trauma)이라고 부른다. 주체가 드러내는 증상에는 이 외상이라는 ‘실재’가 그 ‘증상의 뿌리’로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주체의 ‘현실’ 이면에 있는, 그 현실의 ‘실재’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실재’의 귀환 앞에서 그것을 외면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반드시 환상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다르다. 환상을 동원하여 외상과의 대면을 피하기는커녕 처음부터 ‘실재’에 맞서며 즉 명령에 정면으로 저항하다가 마침내는 결국 그 외상의 한 가운데로 직핍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인지 소설의 서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자.  

작가가 소설 속에서 얘기하고 있듯이, 『빛의 제국』의 주인공 ‘그’는 북한과 1980년대의 남한 그리고 21세기의 남한사회를 모두 경험하는 인물이다. ‘그’가 남파되던 1980년대 당시의 남한은 21세기의 현재 남한보다는 오히려 그때나 지금의 북한과 더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시스템, 국민들의 사고방식, 정치상황, 교육환경 등 모든 면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남과 북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였다. 그러나 21세기의 남한은 1980년대의 남한과는 사실상 ‘다른 나라’이다. 후자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2005년 서울이라는 시공간에 소속된 김기영은 이미 자본주의사회에 완벽히 적응한 인물이다. “배는 불룩 나오고 가슴은 빈약하며 팔에는 물살이 출렁대는, 남한의 평균적인 중년 남성이 되어가고 있는”중으로, “하이네켄 맥주와 빔 벤더스의 영화를 좋아하”고 “일요일 오전엔 해물 스파게티를 먹고 금요일 밤엔 홍대 앞 바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이다. 누가 봐도 간첩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지금 북한으로 돌아간다 해도 과거의 ‘김성훈’이 결코 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386세대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떨어진 귀환 명령. 그것은 자신이 본래 “공작원이고 당과 수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노동당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동시에 일상에 함몰된 채 살아가던 권태로운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계기가 된다. 이 명령 앞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완전한 ‘김기영’이라고 우길 수도 없게 된다. 명령의 귀환 앞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명령은 가르쳐준다. ‘그’에게 자본주의란 절반은 ‘학습’한 것이고 절반은 ‘체득’된 것일 뿐이라는, 즉 ‘그’에게 22세 이전의 남한 사회는 아무리 학습을 통해 다다르려 해도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미지의 것임을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원히 ‘그’가 자본주의 남한 사회의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서글픈 진실’을 말해줄 뿐이다. ‘그’는 단 하루 동안 인생의 전부를 반추하고 회의하며 ‘복습’한다. 영원한 국외자. 이것이 김기영도 김성훈도 될 수 없는 ‘그’의 ‘실재’인 셈이다. ‘그’가 자신의 이러한 ‘실재’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는 ‘실재’에 맞서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실재’로서 명령이 숨기고 있는 ‘그’의 외상 한 가운데로 직접 돌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이상 남한의 김기영이나 북한의 김성훈이라는 상상적 주체의 환상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실재’와 정면으로 대면하기 시작한 것에서 ‘그’는 이미 윤리적 주체가 되는 한 가능성을 찾은 것이 아닐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할 것이다.

한편, 바로 여기서 내가 최초에 가졌던 한 가지 호기심의 실마리도 쉽게 풀렸다. 소설의 제목으로 쓰인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소설의 결말에 거의 당도한 시점인 밤 3시에 접선하기로 한 어느 좌표지점에 서서 ‘그’는 보이지 않게 존재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자신을 귀환시키기 위해 내려 온 잠수정의 동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그’는 자신의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한다.  감히 말하건대,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스무 살이었고, 평양에 두고 온 가족과 여자를 그리워했고, 다가올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했”던 그때의 ‘그’는 “인간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된 인간들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아주 잠깐이지만, 믿었”다. 그러나 “지금, 이 태안반도의 한 귀퉁이에서 자신이 그런 것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새삼 실감하”고 있으며, “맥라이트의 신호를 통해 그는 이십 년 전의 자신과 해안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그의 목전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조명탄으로 인해 하늘은 검은데 세상은 밝아진 모습, 그것이 지금 그가 마주하고 있는 해안선의 광경이자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속 이미지이며 결국 이 모든 것이 “혼자만 어둠 속인 혹은 혼자만 대낮인, 그런 세상”을 살아온 주인공 ‘그’의 삶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삶이 다름 아닌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연작이었다. 그 연작 속의 세계는 조심스럽게 뒤집혀 있다. 마그리트의 다른 그림처럼 대놓고 부조리하지 않고 자세히 살펴봐야 무엇이 이상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하늘은 청명한데 땅은 어둡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 나무들은 검은 그림자에 묻혀 있다. 집의 창문에서는 램프의 불빛이 은은히 비쳐 나오지만 밖은 엄연히 낮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사는 세상이 바로 그런 곳이 아닐까. 혼자만 어둠 속인 혹은 혼자만 대낮인, 그런 세상. 그러다 갑자기 어느 하루, 그것마저도 뒤바뀐다. 슬라보예 지젝을 패러디하여 말해본다면, ‘빛의 제국’은 그런 의미에서 정확히 ‘실재의 제국’인 것이다.



3. ‘냉소적 허무주의’의 진실: ‘나’는 생각하지 않거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그는 운명을 잊고 있었지만 운명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200쪽)


“이 소설의 기본적 지향점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그리고 인간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한치 앞을 모르는 눈 먼 인간들의 운명을 다루고 싶었다.” 작가 김영하가 『빛의 제국』의 출간 직후 어느 문예지에 기고한 신작산문 가운데서 한 말이다. 앞서 나는 발레리의 시구로 일컬어지는 저 정체불명의 격언과 『빛의 제국』의 작가 김영하의 이미지가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내가 김영하의 전작(前作)들을 읽어본 바로도 그렇고 그의 작품세계를 논하고 있는 여러 평론가들의 글을 읽어봐도 그런 것이, 김영하는 냉소적 허무주의를 세계관으로 가진 작가라는 것이다. 데뷔작인 단편소설 「거울에 대한 명상」(『호출』, 문학동네, 1997)에서부터 첫번째 장편소설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1996)를 거쳐 최근의 장편 『검은 꽃』(문학동네, 2003)이나 단편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창비, 2004)에 이르기까지 김영하 소설들은 한결같이 그 어떤 실존적인 무게도 실려 있지 않은 것처럼, 작가 자신이 소설쓰기에 대해 매우 가벼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제 아무리 진지하여도 정작 그것을 바라보는 최종적인 작가의 시선은 냉소적이기 이를 데 없었으며, 그것이 어쩌면 김영하의 소설이 작품의 내용과 무관하게 독자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활기였는지 모른다.

예컨대, 김영하가 변했다고 평가받기 시작한 장편 『검은 꽃』의 결말을 생각해보자. 작품의 거의 후반부에 가면, 국가에 복속되기 보다는 영원한 혁명을 지속하고자 했던 주인공 김이정이 괴상한 논리를 대며 과테말라에서 ‘신대한’이라는 국가의 건설을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이정의 논리인즉슨,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국가를 세워야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유 끝에 그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가를 작가는 친절히 설명해주는데, 예컨대 이런 것이다. “개인이 국가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일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국가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다. 그런데 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국가가 있든 없든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지? 있든 없든 상관없다면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하나쯤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우리 모두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어.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국민으로 죽은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무국적이 되려 해도 나라가 필요한 거라구.” (『검은 꽃』, 305-306쪽)

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정말이지 “이정의 논리는 어려웠다”. 그런데 과연 김이정의 이러한 궤변에 가까운 발언이 작가의 목소리를 대언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과연 김영하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종국에는 역사허무주의나 역사에 대한 냉소주의를 포기하고 있는 징후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무엇이었던가? “그러나 그곳을 거쳐 간 일단의 용병들과 그들이 세운 작고 초라한 나라의 흔적은 발굴되지 않았다.” (『검은 꽃』, 321쪽) 자, 그렇다면 김영하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국가주의의 망령, 즉 ‘근대’와 ‘국가’가 만들어내는 담론의 힘이 한 개인의 삶과 정치적 태도에 얼마나 깊이 얼마나 끈질기게 관여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평론가 김영찬의 해석을 빌리자면, 김이정이 그토록 필요하다고 강변했던 그 국가는 결국 죽은 자조차도 제대로 호명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그런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소설의 논리 속에 작동하고 있는 것은 물론 민족 또는 국가주의(nationalism)의 환영(幻影)을 짐짓 슬쩍 발 걸어 뒤집어버리는 작가의 허무주의적 냉소일 뿐이다. (「한국문학의 증상들 혹은 리얼리즘이라는 독법」,『창작과 비평』, 2004년 가을). 김영하는 그런 작가였다. 자신이 창조한 주인공마저 냉소하는 작가.

김영하의 『검은 꽃』이 그런 방식으로 역사, 국가, 민족, 근대 주체 등의 자명성을 유희적으로 뒤집어버리는 것은 작가가 한국사회의 근대적 현실을 대면하는 인식의 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그 이후 출간된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창비, 2004)를 들여다보더라도 분명한 것이었다. 이 소설집에 일관되게 흐르는 인식적 기조는 단순하게 정리하면 세상은 항상 개인의 진의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배반하면서 굴러가게 마련이라는 생각이다. 김영하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세상의 무겁지 않은 진실을 시종 그 안도 바깥도 아닌 경계선상에서 짐짓 시치미 떼면서 무관심한 척 건드리고 지나간다. 이러한 김영하의 태도가 현실과 역사에 지나치게 덧씌워진 엄숙한 환상을 탈각시키는 효과를 가지며, 그동안 한국소설에서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 온 역사주의와 국가(민족)주의, 좌파 이데올로기 등을 상대화하여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역사와 근대, 국가와 주체 등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상대화하는 아이러니의 유희 자체가 거꾸로 그에 대한 더 이상의 집요한 사유와 성찰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어쩌면 작가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을 그 ‘아이러니의 질주’에 지나치게 탐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인 동시에 작가 자신은 유일하게 그 활기찬 탐닉의 향유 속에서, 탈환상의 아이러니 속에서 제외되어 작중 인물들이 벌이는 ‘아이러니의 질주’마저도 결국은 허무한 것에 불과하다며 냉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냉소적 허무주의는 『빛의 제국』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더 급진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검은 꽃』의 김이정은 모든 불변의 가치에 대한 믿음과 환상이 언젠가는 결국 모두 멸(滅)하는 것에 불과한다는 사실을 믿은 ‘환멸’의 주체였다. 이는 페터 슬로터다이크 식으로 말하자면, 계몽된 냉소적 이성의 주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멸이 다가오고 있다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새로운 가치가 만병통치약처럼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시대는 냉소적이 되었고, 이 새로운 가치도 단명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누구나 당사자가 될지 모른다는 당혹감, 시민 가까이 숨쉬는 것, 평화 보장, 삶의 질, 책임 의식, 환경 친화, 이 모든 것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적절한 때를 기다릴 수는 있다. 냉소주의는 그런 우리 뒤에서 장황한 회담이 끝나고 사태가 진행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맥 빠진 근대성도 ‘역사적으로 사유할’ 줄 알지만, 우리 자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의미 있는 역사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다.” (『냉소적 이성 비판』1, 에코리브르, 2005)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세상의 모든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계몽된 근대적 주체들이 유일하게 냉소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나르씨시즘적 애착이건 아니건 간에, 세계와 자기 자신의 냉소적 거리를 확보해주고 지탱해주는 동력은 결국 자기 자신의 계몽된 ‘이성’이다. 냉소적 이성만이 행사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환멸은 환멸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이 예외적인 존재 곧 자아가 전제되어야만 작동이 가능하다. 『검은 꽃』의 주인공 김이정은 이미 오래 전에 개인은 국가를 선택할 수 없다는 말 속에서 국가-시민 사이에 설정된 강한 이데올로기적 폭압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국가로부터의 완전한 탈주를 꿈꾼다. 그러나 결국 국가라고 하는 것이 불가항력적인 인간적 삶의 조건이라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앞에서 그가 택한 논리가 다름 아닌 국가가 있건 없건 간에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나’의 존재 가능성이었다. “나라가 있든 없든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지? 국가가 계속 되건 아님 사라지건 간에 ‘우리’는 하여튼 영원할 것인데 무엇이 걱정인가? 그러니 국가를 세우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러한 김이정의 논리 속에는 ‘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전제되고 있다. 강요된 가치의 바깥에서 오직 자기 자신만의 이성으로 세계의 부정성에 침해당하지 않는 ‘나’를 정립하고 영원히 존속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 말이다.

그런데 『빛의 제국』의 주인공 ‘그’는 이와 다르다. 그는 허무함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인간이다. 그의 그러한 허무의 근원에는 세계와의 냉소적인 지적 거리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주체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고 있다. ‘나’를 결정하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닌 ‘나’가 통제할 수 없는 ‘나’ 바깥의 운명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주체에게, 그 세계 바깥에서 대타적으로 정립되는 ‘나’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김이정과 김기영(혹은 김성훈)이 전혀 다른 주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후자의 주체는 세계 바깥의 상상적 ‘나’의 정립이란 한낱 자기기만이나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알아버린 주체인 것이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그’는 운명을 잊고 있었지만 운명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명령의 귀환 아니 ‘실재’의 귀환을 통해서 주체의 운명적 진실 곧 ‘허무’를 깨닫게 된 것이다.

계몽된 자아의 냉소적 이성을 자랑하고 과신하며 이 세계로부터 유아독존이 가능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상상했던 『검은 꽃』의 주인공 김이정에게 작가 김영하가 선사한 냉소의 반전이 『빛의 제국』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김영하 소설의 주인공은 『빛의 제국』에서 이렇게 또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냉소적 이성 혹은 환멸의 주체에서 냉소적 자아 혹은 허무의 주체로. 예컨대, 『검은 꽃』의 김이정이 소설의 서두에서 이미 죽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소설의 맨 뒤 부분에 나오는 김이정의 희망찬 ‘건국 선언’도 작가에게는 여지없는 냉소의 소재일 뿐이었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제 『빛의 제국』의 ‘그’에게 작가가 보이는 태도는 어떤 것인가? 사실상 ‘그’에게는 작가의 냉소가 필요조차 없는 것 아닌가? 이미 ‘허무’를 경험한 주체이니 말이다. 명령이 귀환한 그날 하루 동안 ‘그’가 배운 것은 바로 이 ‘허무’가 아니었을까? 명령의 부정을 통한 ‘나’의 정립이 마지막 도달하는 곳에는 ‘김기영’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김성훈’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오로지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그래서 그곳이 ‘빛의 제국’ 혹은 ‘실재의 제국’이라는 것을 깨달은 주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는 라캉의 새로운 코기토(cogito) 선언은 바로 이러한 무의식적 주체의 조건을 일컬어 한 말이 아닐까?



4. ‘윤리적 존재’로 다시 사는 하루를 위해.


윤리적 존재로의 길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유와 책임을 다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면, 그 자기 자신과의 관계 정립이란 결국 나르씨시즘적인 상상적 공간의 바깥으로 걸어 나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세계 자체의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주체의 고통스런 자기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정립된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자유와 책임의 긴장을 항시 유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인간 곧 윤리적 존재로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빛의 제국』의 ‘그’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막강한 세계의 질서를 우선 승인하되, 한편으로 현실 너머의 실재 앞에서는 현재의 모든 상상적 ‘나’가 해체되고 만다는 허무주의적 체념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고, 그러나 다시 그것이 ‘나’의 결승점이 아니라 출발점임을 직시하면서, 마침내 그렇게 고통스럽게 정립한 나 자신과의 관계에 이제 자유와 책임을 다해 충실하게 임함으로써 윤리적 인간의 존재양식을 창안해나가는 여정.  놀랍게도 그런 윤리적 인간의 존재양식이 창안되는 예가 바로 이 소설 속에 이미 있었던 것이 아닌가? 명령이 귀환한 그날 하루 동안 ‘그’가 전(全) 인생을 다시 살며 마침내 ‘빛의 제국’을 보기까지의 그 여정 속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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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21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과 타자간의 대화를 통한 윤리적 실천들. 종결불가능성의 자아와 세계라는
바흐친의 이론..과 닮아있네요. 님의 리뷰만으로도 책을 한권 읽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관촌수필 - 이문구 문학선 나남문학선 1
이문구 지음 / 나남출판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근대화’에 대한 냉소적 감성 비판

-이문구의『관촌수필』읽기



지금은 종영되었지만 한때 내가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중에 <KBS 인물현대사>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작년 1월쯤에 소설가 이문구 편이 방송되어 내가 그것을 시청할 때만해도 나는 솔직히 그런 소설가가 있었는지도 전혀 몰랐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얼핏 들어 봤을 런지도. 물론 내 기억에서는 여전히 가물가물하지만 말이다.


이번에『관촌수필』을 읽고 서평을 쓰면서 다시 그 방송을 찾아서 보았다. 정확한 제목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 - 소설가 이문구>였다. 다큐멘터리에서 이문구는 대충 이렇게 소개된다. “분단의 비극 속에 남겨진 한 소년. 소년은 살아남기 위해 문학을 택하고 문학을 위해 시대에 저항한다.……이념과 계파를 넘은 문학동네의 진정한 어른. 한국 현대사의 비극 한가운데를 살아왔던 이문구. 김동리의 수제자이자 최측근 비서였다는 사실에서 엿보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삶의 보수성과 동료문인들과 함께 한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격렬한 저항적 실천의 이력 중에서 그의 정체성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반공과 용공, 보수와 진보 같은 이념적 선택이 아니었다. 이념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한데 어울려 사람답게 사는 세상. 그것이 바로 그가 일구려고 했던 세상이다. 분단과 이념 대립의 한 가운데를 살다 간 이문구. 그는 시대를 포용으로 이끈 우리 동네의 진정한 촌장이었다.”1)


소설도 소설이었지만 먼저 개인적으로 추적해본 이문구라고 하는 한 작가의 삶의 이력은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관촌수필』맨 앞에 나오는「일락서산-관촌수필1」에서도 잘 소개되어있듯이 그는 몰락한 충남지방 양반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할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유교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6ㆍ25 전쟁 시기에는 남로당 간부였던 부친과 두 형이 포승에 묶여 산채로 고향 앞 바다에 수장되는 모습을 직접 목도하는 비극을 경험했다. 연좌제의 서슬이 퍼렇던 시대에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빨갱이 자식인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심한 심리적 압박감을 늘 겪었다. 그러다 결국 문학만이 살 수 있는 길이라 믿고 그 길을 택했다. 자신의 보호막으로 문단의 대표적인 보수 우익에 친정권 인사인 김동리를 택해 그에게서 일찌감치 높은 인정을 받고 전도유망한 작가의 대열에 섰지만 이내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참여문학의 흐름에 깊숙이 자신을 연관시켜 버린다. 그 후 그는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면서 여러 계열의 문학단체를 넘나들며 문단통합적 활동을 주도했다. 작품 창작에 있어서도 그만의 독특한 토착어 지향의 문체를 구사한 작품들을 통해 정말 (김동리의 예언대로) “한국 문단에서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가 되었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문구에게는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보수적인 가치관을 옹호하고 지향하는 성향과 (평생 거부 하려고 발버둥 쳐봤지만 어쩔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불의에 저항하는 진보적인 정치적 성향이 평생 분열적으로 공존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분열을 억지로 하나로 통일시키려 노력하지 않고 문학을 통해 양자를 지양(止揚)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가 이념과 계파를 넘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어떻게든 추구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첫 번째 이야기인「일락서산-관촌수필1」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하여 아버지에 대한 회고로 끝을 맺고 있으며 뒤에 이어지는 다른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 실마리가 되고 있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개별적인 주인공들이 거의 한 번 씩은 이 첫 번째 이야기에서 다 등장하고 있지 않나 싶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읽는 내내 내가 지금 소설을 읽는 것인지 작가의 자서전을 읽고 있는 건이지 순간 혼동을 느낄 만큼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었다.


「화무십일-관촌수필2」는 윤영감과 그의 일가에 대한 작가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역시 소설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읽는 내내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이 작가 개인의 인생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임에 틀림이 없다고 단정 짓곤 했다.) 며느리를 찾아 아니 잃어버린 손자를 찾아 소반장수가 되어 전국을 떠도는 윤영감의 모습은 근대화가 폭압적으로 추진되어 온 우리 역사의 어느 한 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가족 해체의 비극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행운유수-관촌수필3」가 이 연작소설집에서 내게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아마「관촌수필」에서 주인공이자 화자인 작가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옹점이라고 하는 이 여인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네 집의 식모나 다름없는 종년이었지만 사실상 주인공에게는 친누나 같으면서 때로는 어머니를 대신하는 유모 같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그녀. 결혼 생활에 실패하고 약장수 틈에 끼어 노래 부르는 신세가 된 그녀를 바라보던 화자의 감정은 왜 그토록 충격적이었을까. 실망감이었을까 아니면 죄의식이었을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화자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서 그녀로부터 도망을 간 것인가 아니면 노래 부르는 옹점이가 부끄럽고 실망스러워 그 자리를 도망친 것일까. 그 후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났을까. 많은 의문들이 남는다.


「녹수청산-관촌수필4」는 대복이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마지막 반전이 놀라운데, 순심이와 대복이의 사랑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것이 아쉽다. 작가는 마지막 문장에서 딱 한 단어, ‘입덧’이라는 단어를 불쑥 언급하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으며 둘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짐짓 모른 체하며 다 들려준다. 대복이가 출정하던 날 변소 속에서 시선으로 그를 배웅하던 그녀. 이 소설집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바로 이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공산토월-관촌수필5」는 화자의 부친을 열심히 따르며 그로인해 함께 숱한 고초를 치룬바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안 화자의 집안을 돌보아주었던 석공의 이야기이다. 석공이라고 하는 한 인물의 개인사가 그대로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모습의 전형이기도 하며 석공이 보여주었던 상부상조의 삶의 모습은 작가가 그리워하는 바람직한 사회상이기도 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석공의 임종 장면은 죽음 앞에서 가장다운 초연함을 보이고자 하면서도 한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본능적 욕망이 교차하고 있는 어쩌면 우리들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는 그런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문구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석공에 대한 기억에 더 많은 소설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문구 개인이 당했던 그 정신적 외상의 근원이 과연 누구였는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실마리일지도 모른다. 이문구의 살부(殺父)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관산추정-관촌수필6」은 화자의 죽마고우라고 할 수 있는 복산이의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들려주고 있다. 아버지 유천만의 성품을 그대로 닮아 “내 일 제쳐놓구 넘의 일부터 봐주는 성질”을 갖고 현재도 고향에서 동네 유지 노릇하고 있는 유복산의 모습에서 농촌이 현실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도 간접적으로 시사된다. 관광지로 개발되어 발전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로인해 도시의 퇴폐문화가 그대로 유입되어 인간 공해를 겪고 있는 농촌 현실에 대한 간접적 폭로의 의도가 작품 속에 깔려 있는 듯하다.


세태풍자극을 연상시키는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씁쓸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여요주서-관촌수필7」은 필경 박정희나 전두화이 집권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일 게다. 마지막에 법정에서 “지은 죄 없이 고개 조이고 살아온 사람이 오랜만에 켜보는 기지개와 같은 몸짓으로 믿어야 될 성싶은” 그런 용기로 용모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법이 정작 국민들의 실질적인 이익과는 무관한 국가 만들기와 국민 훈육을 위해 동물과 자연을 먼저 보호한다고 나서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비난한다. 그 시대 무자비한 공권력의 횡포에 시달리며 불행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 한국 민중들의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월곡후야-관촌수필8」은 이제 장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다시 고향을 찾은 화자가 경험한 현재 고향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골에 요양 차 내려온 중년 남성이 자기 딸의 친구를 겁탈하고 그 일로 인해 마을 청년들이 그를 징계하고 축출한다는 이야기인데 마지막에 보면 그렇게 정의감이 투철한 청년들 중 한 명-화자의 친구 동생인 수찬이-이 바로 그와 상황은 다르지만 어쨌든 떳떳하지 못한 이유로 고향을 몰래 빠져나가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관촌수필』은 전체적으로 한국의 민중들 특히 농민들이 경험했던 해방정국과 6ㆍ25전쟁 그리고 개발독재 근대화의 야만성을 곳곳에서 폭로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이 잃어버린 그 어떤 가치와 정서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회한을작중인물의 대사나 내적 화자의 서술을 통해 작품 곳곳에서 절절히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나아가 작가가 이 소설집을 통해 보여주는 도시화ㆍ산업화에 대한 냉소적 비판은 “한국사회의 근대화가 일차적으로는 고향의 상실이며, 사람들 개개인의 실존에 있어서 의미로 충만한 원초적 세계의 소멸이며 나아가서는 인간사회를 따뜻하고 인간적인 공동체이게 하는 경제적ㆍ도덕적 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2)고 볼 수도 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근대화ㆍ산업화 속에서도 혜택과 피해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담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권력에 의한 차별적인 분배가 발생하고 있음을 명확히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소위 이 근대화 프로젝트의 열매를 맺기 위해 죽어나고 있는 사람들과 그 열매의 달콤한 맛을 즐기는 사람들은 결코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 권력이 있는 곳과 없는 곳에 비치고 있는 근대화의 명암도 각각 다르다는 이 아이러니를 이문구는 너무나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문학을 통해 근대화 자체에 대한 냉소를 보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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