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그 이후 매스터마인즈 3
돈 큐피트 지음, 이한우 옮김 / 해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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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신이 자발적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사랑한다. 아마도 신은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저자 Don Cupitt는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라고 한다. 처음에는 별 기대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 수록 "어! 이것 봐라! 이 친구 좀 하는데.."라는 말이 절로 나오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Kaufman이나 Taylor, Geering 등과 비슷한 사유를 하면서도 훨씬 쉽고 간결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 같다. 
   


1. 신들의 도래
영혼, 정령 그리고 신들 / 왜 정신인가 / 최초의 신들 / 신의 도래 / 신과 그리스 철학 / 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큐피트는 미셸 푸코가 말년에 'Technologies of the Self', 곧 자아를 만들고 돌보는 수단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을 인용한다. 푸코는 후기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의 권력 메커니즘을 분석하고자 초기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영적인 훈련'과 테크닉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거기서 개인이 자신 스스로에게 행사하는 지배의 테크놀로지를 문제 삼는다. 수도사가 자신의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면서 절대자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그 모습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주체로서 '자신'이 발명되고 있는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큐피트가 이 대목에서 푸코의 이러한 태도를 너무나 속좁은 판단이라고 비판하며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오히려 처음부터 신에게 도전하고 저항하는 것이 신앙의 구성 요소였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가 푸코를 적절하게 비판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왜 하필 푸코를 끌어들였는지도 솔직히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신학자로서 푸코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저서를 그가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큐피트는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도 다소 과감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에 따르자면, 그리스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법과 질서의 강력한 대변자이자 옹호자였으며, 세상 만물이 모든 수준에서 시계처럼 정확하고 준법 정신이 투철하며 자애롭고 조화롭게 운영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플라톤은 올바른 통치가 이뤄지고 있는 나라에서 모든 것이 현명하고 자비로운 법률에 복종하는 것처럼 우주적 차원에서도 모든 것이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며 국가나 개인의 영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건적인 '당위'로부터 현실적인 '존재'를 도출해 내고 다시 실제적인 당위 명제들로 복귀한다. 우리는 지상에서 법과 질서를 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이미 천상에도(아마도 이데아를 말하는 것일듯) 존재하고 있음은 물론 지상에서도 효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큐피트는 이런 생각들은 전적으로 비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이성의 측면을 넘어서 계시적이기까지 하다고 평가한다. 한 마디로 플라톤의 철학은 순수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고 단정한다. 그것은 애초부터 그리스 문화권에서 사용되던 종교적 언어를 자기들 수준에서 나름대로 탈신화화한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엉터리 학설이 기독교 신앙과 만나 그토록 오랫 동안 신학을 배후에서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신앙 언어가 작동된 맥락은 철저히 유대 종교적이지 그리스 철학적이지 않았음을 자세히 논증한다.
 
 
2. 신들의 떠남
신비주의 / 독단적 형이상학의 종말 / 역사와 휴머니즘 / 문화와 언어 / 천사들의 시대



"일반인을 위해 실재론은 나름의 필요성을 가진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함축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신의 실재성은 인간의 정신과 대비되어 확립되어 왔다. 유한과 무한,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감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등이 대비되어 온 것이다. 이 모든 분열로부터 벗어나 있는 신은 자아와 달리 부드러운 흑대리석으로 만든 무한한 벽과 같은 것으로 모든 것을 차단해 버린다. 처음에 신에 관한 실재론적 교리를 성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분법적 대조 일체를 해체해 버리는 것 외에는 종교적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없다.
 
.......
 
특출난 신비적 '탈(脫)실재론자들'-예를 들면 유대인 스피노자, 아랍인 알-할라지, 그리스도인 에카르트 등과 같은 인물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로부터 단죄를 받았다. 옳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신비주의는 실재론의 허위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
 
종교의 마지막 아이러니는 결국 우리가 가장 열렬하게 갈망하는 것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신, 자아, 세계 등의 관념을 구성할 때 사용한 주요한 구별과 대립 항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래서 우리에게 남게되는 결과는...니힐리즘인가 지복인가?
물론 둘 다이다. 신의 해체와 신과의 완전한 합일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 책은 내가 보기에 '신론의 계보학'적 탐구를 초보적이나마 시도하고 있는 책같다. 물론 북미의 수정주의신학 진영과 공명하는 재구성된 현대의 종교 개념을 제시하는데 최종 목적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구의 종교사와 문화사를 관통해온 神인식의 패러다임 전환 과정을 설득력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결코 진화론적 역사주의의 사고를 고집하지 않으며 자신의 관점에서 계열화된 역사의 궤적을 따라서 서구 신관의 변화 과정을 신의 '도래'와 신의 '떠남'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3. 신들이 떠나버린 이후의 종교
전통적 종교의 유산 / 자연주의 철학 그리고 종교 / 세계화와 타자의 종언 / 도덕의 종말과 윤리의 복권 / 순진한 종교 / 시적 신학 / 세계 종교

 

큐피트가 제시하는 새로운 종교 개념은 이렇다.

1) 형이상학 없는 종교
큐피트는 과감하게 말한다. 고대의 유신론 신앙을 가능하게 했던 인식론적 토대로서의 형이상학적 가정들은 이제 모두 그 논리적 설득력을 상실했고 물질적 차원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정신적 차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음이 자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 더 이상 신을 엄청난 크기의 비가시적 존재로 파악하는 견해는 존립할 수 없으며, 차라리 우리는 신에 관한 신앙을 일정한 의식 형태 곧 우리 자신을 성찰하기 위한 간접적이고 선택적인 의식 형태의 일종으로서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큐피트는 그것을 '신의 눈'이라고 명명하며, 이미 죽은 신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그의 눈이 때로 유의미함을 강조한다.

 

2)신조없는 종교

교리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철저하게 드러난 오늘날 과연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 체계가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가를 진지하게 물었던 큐피트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객관적인 가치나 기초를 갖고 있지 못하며 객관적으로 고정된 사물에 질서란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항구 불변적 성격을 지니고 독립된 절대적 인식의 권위를 누려왔던 기독교의 교리나 신조 역시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흡사 린드벡의 견해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3) 권위와 질서가 배제된 종교

-기독교는 감시와 처벌, 유혹과 자발적 순종의식 함양 등 모든 억압적 주체화의 동원들을 다 사용하여 그 통치성을 관철시켜온 대표적 이데올로기이다. 교회 생활, 영성, 경건, 교리 학습, 기도, 선교, 노동, 구제 등은 철저히 권력의 유지와 연계되어 작동되어온 장치들이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제거된 종교를 큐피트는 희망한다.    

 

4) 인류 중에서 선민과 나머지 사람들간의 명확한 경계선을 확신하는 군중들이 없는 종교

-별 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구원 신앙에 근거한 자기 정체성 확보 노력과 그것에 자동적으로 동반되는 비기독교인에 대한 배타의 논리가 얼마나 왜곡된 인성과 행태를 조장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과연 이런 종교가 존재할 수 있을까? 큐피트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의 도구 세트로서의 종교 개념을 제시한다. 이러한 종교 개념은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우리가 자기 인식에서 성장할 수 있고(신의 눈), 우리 자신과 기타 만물의 무상(無常)과 허망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지복의 空), 삶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일련의 태도들과 기법(태양의 삶)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바, 신들이 떠나 버린 이후의 종교 그 핵심에는 '시적 신학'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카우프만이 제시했던 상상적 언어로서 '재구성된 신학'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것 같다. 큐피트에 따른다면, 시적 신학이 하나의 신학일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각양각색의 가치관이 경합하는 다원주의의 시대에도 여전히 아니 더 심각하게 명료한 도덕적 비젼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만물의 무상함에 대해 이제는 그저 담담한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기독교 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온 탈신화화와 비실재론적 종교 개념화의 전통을 이상적으로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야할 길은 어디일까? 세계 가운데서 이미 죽어버린 신을 따라 같이 죽으러 가는 길 뿐이지 않을까?

 

신, 그 이후의 시대에서 신앙의 바다로 뛰어들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꼭 읽어 볼 필요가 있는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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