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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해설
J.M 로호만 지음, 오영석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84년 8월
평점 :
절판
Jan Milic Lochman,『사도신경 해설』
1. 사도신경의 기원
1) 생성의 기원
사도신경은 무엇인가? Lochman에 따르면, 고대전승을 파악할 때, 12사도들의 무리가 성령강림 이후, 선교하기 위해 온 세계로 파고 들어가야 할 것을 결단했을 때, 그들은 선교를 위한 신앙의 규범, 하나의 공동의 신앙 규범에 일치하였다. 놀랍게도 그것은 성령의 인도 아래에서 기초되었다. 12제자는 각자의 관심을 짧은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 형식들은 전체를 따라서 구성되었다. 위의 이야기는 물론 하나의 전설이다. 그러나 각 사람이 각 부분을 나누어 맡아 말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 사도신경의 삶의 자리
사도신경의 삶의 자리는 아마 초대 교회의 세례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신경은 세례받는 자에 의해 고백된 것이 아니라, 세례 베푸는 자가 질문의 형식으로 제의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고백은 세례사건에서 지시한 바와 같이 구속력을 지니는 신앙의 결단에 일치한다. 3세기의 세례문답으로부터 신앙고백의 선언적인 형식이 생 겼다. 교회들은 상세한 부분에서 상이성을 갖는 세례고백들을 형식화 했다. 로마 교회에서 사용된 것이 가장 영향 력이 많은 고백으로 되었다. 4세기에 사도신경은 어느 정도 첨가와 변화가 있어나며, 6세기 서부 코오트 지역의 스페인과 갈리엔에서 작성된다. 이 텍스트는 오랫동안 서방교회에선 경전화가 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정치 적 발전에 연결되어 있다.
2. 사도신경 해설의 문제점
1)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사도적인 케리그마가 아니라, 고대 교회의 교의적인 생성에 관계한다. 이것은 케리그마의 중요성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성서적인 사신과 오늘날의 우리의 문제 설정에 관계하여 사도적인 케리그마를 상대화한다.
2) 기독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주제가 이 신경을 지배한다. 성서의 역사에서 보거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 또는 그의 창조물의 계약의 역사에서 보든지, 가장 극적으로 반사된 이 인간이란 주제가 하나님 신앙의 전체에서 보면 엷어진다. 그렇지만 인간이란 주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체는 고백하는 인간에 관계되어 있다. 밑으로부터의 신학 대신에 위로부터의 신학(theologie von oben)이 제공된다. 그 길, 이 신앙과 사고의 행위의 방법은 높은 하늘에서부터 곧 바로(비변증법적으로) 나아간다.
3)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실제로 교의학 개요와 일치하지 않은가? 이 신경을 성서적─교의학적인 유산과 비교할 때 큰 간격이 있지 않은가? 모든 해석자는 이 문제를 제의해야 한다. 예로서 레온하르트 라가츠(Leonhard Ragaz)는 사도신경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게 한다. 신경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경, 창조, 구속, 피안, 개인의 구원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그의 의의 나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올바른 고백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살아 움직이는 직접적인 증언이다. 교회는 신경을, 공동체는 나라를 고백한다(Das Glaubensbekenntnis, 2. Aufl., S.5).
3. 사도신경 해설의 방법론
Lochman의 『사도신경 해설』은 기독교의 역사적-사회적 책임을 논하면서, 그 이면에 전통적 교의의 틀 내지는 전통적인 신앙내용을 깔고 있다. Lochman은 우선적으로 교리사의 흐름을 항상 의식하면서, 현대의 여러 신학자들의 신학과 대화를 아끼지 않는다. 사도신경에 표현된 교의학의 여러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풍부한 성서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며, 아울러 교의학의 목적을 단순히 교회에 맞추지 않고 역사와 사회, 곧 세상으로 확대시킨다. 이와 같은 점에 입각해서 그는 ① 사도신경의 기원과 삶의 자리, ② 나는 믿는다 ........ 아멘, ③ 나는 주를 믿는다, ④ 전능하신 아버지를 ........ ⑤ 하늘과 땅의 창조자를 ........ ⑥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등의 사도신경의 각 조항들을 차례대로 논하되 이 각 조항 안에 많은 교의학적 주제들을 포괄시킬 뿐만 아니라, 신학사적 맥락에서 토론과 비판도 가하며, 반제들도 제시하고, 나아가 기독교의 역사적ㆍ사회적 프락시스를 계속 취급하였다.
4. 사도신경의 중심
Lochman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중심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라고 한 오스카 쿨만의 주장과 “둘째 조항은 첫째 조항을 뒤따르고, 셋째 조항을 선행한다. 이 둘째 조항은 다른 두 조항을 비추는 광원(Lightsquelle)이다. 그에 따르면, 초대 기독교 교인들의 신앙의 진술은 끈덕지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운명을 선회한다. 그 출발점은 동시에 기독교 운동의 중심점이고, 역사적인 근거이고, 교리적인 기초이다. 그리스도의 고백에서 사도적 신앙의 심장은 고동친다. 기독교 신앙 고백의 기독론적인 집중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일반적인 종교사의 전망에서 볼 때 하나의 도전이고 파결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거침돌(Argernis)이나 어리석음(Torhit)으로 간주한다. Lochman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역사에 있어서 신경의 역사에 있어서 철학적인 세 가지의 본질적인 면을 언급한다.
1) 거침돌과 어리석음으로서의 신경의 기독론적인 출발점과 중심점은 우연성과 특이성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우연성과 특이성에서 존재의 비밀은 열려지고, 세계의 구원이 일어난다. 우연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인간에게 필요불가결한 것이고, 외부로부터 도래함으로써 내적인 것이 열린다.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익명 은 자유의 필요성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2) 두 번째 조항의 다른 거침돌과 어리석음은 하나님과 역사의 관계이자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이다. 고전적-이상주의적인 그리고 영지주의적-헬라적인 전승에 있어서 시간과 영원은 바로 대립되었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간 밖의 참된 존재로서 엄격히 생각되었다. 그러나 신경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불쾌감을 일으키는 이 역사에서 하나님의 현재를 고백한다. 우리의 고난과 삶의 역사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무감적인 박에서 개선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같이 고생하시고 투쟁하시는 그런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의 도래할 나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 안에서“ 현재한다.
3) 세 번째 면에서, 기독교신앙과 하나님의 신앙이 결합된 이름 두 가지인 “그리스도”와 “예수”에 대해 논한다.
① 그리스도: 구약에서는 결정적인,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 야훼에 대한 전적인 경외와 헌신이 문제였다. 그러나 종교사적으로 중요성을 갖고 있는 명칭인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를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다. 희망의 정치적인 구원론적인 차원, 원수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와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한 기대는 메시아의 기대와 연결된다. 메시아의 칭호와 관련하여 베드로가 예수에게서 고난의 주제를 배제시키려고 할 때,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였다. 그의 사명은 정치적인 의미를 애당초 거부했다. 예수의 지배는 봉사에서 실현된 다. 해방을 시키는 사랑의 말과 행위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했다. 그는 구속사적인 약속의 성취자였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의 사명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생활의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이 지적된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형식은 그리스도와 믿는 자의 밀접한 연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울에게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다.
② 예수: 한편,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가 희랍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주“는 정상적인 인간의 이름을 지닌 역사적인 인격에서 나타났다. 신앙의 고백의 근원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생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은 자의적인 구속력이 없는 개방된 가능성을 지향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예수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구속력이 있는 삶을 형성해야 한다.
5. Lochman의 신학사상 정리
1) “나는 주를 믿는다”
여기에서 Lochman은 신앙의 대상지향성과 신앙의 주체지향성의 불가분리성을 주장함으로써 정통주의적 객관주와 실존주의적 주관주의를 넘어선다(p.37). 더욱이 “신 죽음의 신학” 이래 “하나님”이라는 주제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으며, 현대의 기술문명과 이념들은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새로운 문제로 야기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자본주의 사회와 산업화된 사회가 “하나님” 주제를 변두리로 몰아내고 있는 이때에 “내가 주를 믿는다”고 하는 고백이 새롭게 그 의미를 획득해야 한다(p.48)고 주장한다.
2) “전능하신 아버지를 ........”
Lochman이 정립한 하나님은 성경적 하나님, 역사의 하나님, 은총의 하나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야웨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이 야웨는 예수님의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사건 없이 이해될 수 없는 구약의 구속사적 하나님이시다(p.52). Lochman의 신앙은 “사랑을 추구하는 신앙”으로서 기독교의 역사적-사회적 책임이 항상 신학적 사고의 목표로 작동한다. 따라서 단순히 케리그마와 도그마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적 프락시스가 항상 강조된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Lochman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세계 안에, 시간 안에 오신 것은 보편적인 진리와 초시간적 세계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되었고, 출애굽 이래 미래적 종말을 향해 달려가면서 야웨만을 믿었던 유대인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었다(p.73 이하)고 말한다. 특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오스카 쿨만의 구속사 신학과 같이 구약의 구속사와 연속시킨다.
5) “그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
Lochman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기적 차원에서, 구원론적 차원에서 그리고 윤리적 혹은 정치적 차원에서 풀이해 나간다. 여기서 십자가의 윤리적-정치적 의미는 역시 기독교의 역사적-사회적 책임과 연관된 것이다.
6) “성령을 믿습니다.”
Lochman은 기독교 신학이 이미 영을 망각한지 오래되었다고 통탄한다. 그에게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이 성부와 성자를 우리 믿는 자들에게 현재화시키며 우리가 이 성부와 성자에 참여케 하시는 분이다(p.169). 성령은 그리스도의 삶과 운명에서 하나님을 현재화시키며 하나님을 나의 영혼과 밀착시킨다. Lochman은 성령을 내면적 갱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종말론적 세계의 전망을 열어 주시는 분으로 진술한다.
6. 비평 및 소감
2000년 기독교회사에서 보편적으로 고백되어온 사도신경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비판적인 관점에서 사도신경에 대해 접근하지 않는 부분이 아쉬웠다. 예컨대, 사도신경이 아무리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능했을지라도 그것이 형성되던 당시에 교회의 통일성을 추구하기 위한 제국의 정치적 압력이 존재했었고, 이러한 배경이 작용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는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콘스탄틴 황제 이후 국교화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제도화되면서 ‘권력’의 수행 기관으로서 작동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영국 버밍엄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프란시스 영(Frances M. Young)은 사도신경의 발생 단계를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신앙의 규칙 단계, 세례문답 단계, 그리고 신앙의 선언 단계가 그것이다. 즉 ‘신앙의 규칙’은 확실히 신조들의 중요한 선구자가 되고, 이러한 신앙의 규칙의 전반적인 채택과 전통적 어구들의 사용을 통해 두 번째 세례문답으로 확장되었고, 세례문답의 상황에서 신앙의 ‘선언’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3세기 말경으로 알고 있는 신조들의 출현을 낳게 한 것은 바로 이런 요소들의 연합을 통해서였다.
사도신경과 같은 신조들이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능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 영은 당시 교회의 통일성을 추구하기 위한 제국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공의회가 정통 신앙을 규정하는 신조들을 사용하기 전부터 그것들을 ‘정통의 척도’로 만들게 한 압력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즉 정통을 규정하는 데 신조를 사용했다는 것. 그리고 공의회의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제국의 권력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주교들은 그들의 권위를 땅 위에서 수행하는 데서 더 큰 효율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사도신경은 제도화된 교회가 외부에 대하여 배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기치를 세우고, 내부적으로 통일된 체계를 완성해 가기 위한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써, 철저히 신앙의 수호를 위한 통일된 신앙의 표준을 세우고자 하던 상징권력의 수행 방법이었던 것이다.
신약학자 조태연은 사도신경의 핵심적 내용을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의 신앙 구조 현상과 관련시켜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그리스도론 중심적 신앙고백, 둘째,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신앙 지상주의적’ 고백, 셋째, 묵시 종말론적 내세 신앙, 넷째,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로 표현되는 교회 제도(교권)에 대한 신앙 체계가 그것이다.
사도신경에 기반한 교회의 권력화 내지 제도화 과정이 교회의 배제주의 혹은 배타주의의 생리를 동반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교회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수행하고, 지속시키고,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종교적 장치 및 방법들을 고안해내기 시작했으며, 교회의 신자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교권 아래 복종시키기 위해 성직주의와 교리주의를 통해 위계 질서를 공고히 했으며, 교리를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 정경화 작업이나 공동체적 고백문을 작성했다는 것은 교회사의 기본 상식이다. 교회가 자신의 권력을 수행하는 방법으로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한 것이 바로 상징권력으로서의 사도신경과 같은 신앙고백문이었다.
사도신경이 갖고 있는 긍정적 의미와 더불어 사도신경을 둘러싼 권력의 작동의 측면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사도신경을 고착화시키지 않고 그 의미를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