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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ㅣ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1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고교 동창들과의 약속 장소에 제일 먼저 도착해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비쳐보고 있는 화자인 ‘나’는 잠시 서울로 오게 된 자신의 내력을 회상한다. ‘나’는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하고 세 번째 남자와 결혼하면서 지방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서울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피난 시절 눈발 속에 웅장하게 서 있던 남대문의 '비장미의 영상'을 향수로 간직하고 있는 ‘나’에게, 남대문은 어머니나 동생들이나 중학동 옛집이나 그 밖의 소녀 시절의 앳된 추억이 서린 서울의 그 어느 곳보다 훨씬 더 강력한 향수의 구심점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돌아온 지 달포가 넘는 동안 거의 매일같이 도심을 가로지르면서 남대문을 볼 기회도 많았건만 번번이 딴데로 한눈을 파느라 남대문을 놓치고 만다. 그만큼 이제 서울은 남대문의 정기(精氣) 따위에 지배당하는 곳이 아니라, 급격한 근대화의 도정 위에 놓여 있는 분주한 시민들의 일상의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더구나 물질주의에 전도된 그 속물적 공간은 남편과 동창들이 펼쳐 보이는 위장과 가식으로 점철된 환멸의 무대이다.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지지리도 가난했던 피난민 시절에 딸을 양공주로라도 팔아서 가난을 면해보고자 했던 어머니의 그릇된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택한 길이었다. “양갈보짓을 해서, 딸을 그 짓을 시키지 못해 환장을 한 어머니를 만족시키기도, 누나는 굶건 말건 저희들 배만 채우려는 아귀 귀신같은 동생들을 부양하기도” 싫었기 때문에, ‘나’의 희생의 덕을 어느 누구도 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택한 결혼이었던 것이다. 시골에서는 부자라 일컬어지는 집에 서른이 넘은 신랑의 후취로 들어간 ‘나’는 아기를 낳지 못했고, 결국 시앗을 보고 시집을 떠났다. 이혼이란 확실히 결혼보다는 경사스러운 일이 못 되지만, ‘나’는 그 일을 자신이 선택했고, 생전 처음 어떤 선택을 행사했다는 데 기쁨을 느꼈다. ‘나’의 둘째 남편은 지방신문에 칼럼 따위를 쓰던 대학 강사였는데, 그의 글만 읽고 그에게 반했던 ‘나’는 행복을 갈망하며 그의 가정에 깊숙이 파고들었고 마침내는 그의 아내가 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겁쟁이에 비겁하고 거짓말쟁이였으며 그가 쓰는 글과는 달리 그의 본심은 돈과 명예에 기갈이 들려 있었고, 지방 도시와 지방 대학 강사의 삶을 지긋지긋해하던 위선적인 인간이었다. 아내를 잘못 만났다며 구박을 일삼던 그와 결국 이혼을 하고, ‘나’는 T시에서 돈 좀 번 것으로 소문난 장사꾼이었던 지금의 남편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키워야 할 아이들도 없고, 이윤을 추구하는 게 떳떳한 본분인 장사꾼이라 대학 강사처럼 위선이 필요하지도 않았던 그와 결혼을 한 후 ‘나’는 세 번째 결혼만은 성공한 결혼으로 자신의 인생에 남겨지를 바라며 살아가고 있다.
동창들과의 만남에서 “정말 세 번씩이나 개가를 했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고 드러낸 ‘나’는 친구들로부터 자신이 참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기실 ‘나’는 학창 시절 유난히 부끄러움을 타던, 그 내부에 유독 부끄러움에 과민한 병적인 감수성을 갖고 있던 그런 소녀였지만, 이제 ‘나’ 또한 자신이 개탄하는 세태를 살아가면서 변모를 겪어 간다. 그리고 이렇게 화자의 삶의 방식이 변모한 데는 전쟁 이후의 피폐한 삶과 그로 말미암은 윤리적 파탄의 상황을 초래한 자신만의 고통스러운 기억―불행했던 피난시절의 가족사와 세 번의 결혼이라는―이 밑그림으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동창들 중 가장 시집을 잘 가서 살아가고 있는 경희네 집으로 가게 되면서, ‘나’는 느닷없이 경희에게 경렬한 적개심을 느낀다. ‘나’는 마치 경희가 이 세상의 부끄럼 타는 마지막 인간이라도 되는 듯이, 지금이 바로 그 사라져 가는 표정을 봐 둘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듯이 초조해 한다. 모처럼 돌아온 부끄러움의 감정이 자신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자랑하며 상대적으로 ‘나’에게서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경희에 이끌려 그리고 그런 경희와 ‘나’의 인맥을 통해 “어떡하든 한 밑천 잡아 한 번 잘살아보자”는 남편의 욕심에 떠밀려 ‘나’는 일본어 학원을 다니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일어 학원이 있는 종로 일대의 거리를 거닐다가, 우연히 일본인 관광객을 안내하던 여자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그 여자의 말로 인해 ‘나’는 부끄러움의 감각을 불현 듯 느끼게 된 것이다. 자신의 부끄러움의 통증을 자랑스럽게 감수하는 ‘나’는 별의별 지식을 다 가르쳐주면서도 정작 삶에 있어 ‘부끄러움’을 가려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는 것으로 소설이 끝이 난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