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인 최인훈 전집 2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자아와 주체의 성찰적 변증법

―최인훈의 『회색인』읽기

 

 

1. 『광장』과 『회색인』

최인훈의 『회색인』은 1958년 가을부터 1959년 여름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잡고 있는 텍스트로서, 『광장』이 발표되고 나서 2년 후인 1963년 6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세대』에 「회색의 의자」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광장』―『회색인』―『서유기』―『소설가 구보씨 일일』로 이어지는 최인훈 소설의 계열, 즉 짙은 자전적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계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최인훈 특유의 관념성이 비교적 정연한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과 그의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는 W시의 원체험이 상세하게 진술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의 출세작인 『광장』에 쏟아졌던 숱한 주목에 비한다면 『회색인』에 주어진 관심은 상대적으로 초라한 편이었다. 물론 최인훈의 전체적인 저작들을 놓고 봤을 때 『광장』만큼 그의 소설세계 전반에서 서사화 혹은 사건화의 공력을 기울인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감행된 이명준의 분단현실과 남북체제에 대한 비판적 의의를 제외하면 많은 결함을 보여준다. 주인공 이명준을 둘러싼 여러 이론적 공방에서 자주 거론되는 점이지만 인물이 가진 취약성은 이곳저곳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다. 북녘의 아버지 집에서 아들에게 보인 일상적 체취가 혁명가의 풍모를 상실한 모습으로 부정되는 것은 단적인 예의 하나이다. 아버지를 향한 북한체제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명준의 개념화와 비판들이 대단히 성급하고 예단과 논리적인 비약으로 가득 차 있는 만큼 남북현실에 대한 명준의 환멸이 가진 식민 잔재와 국가폭력, 도구화된 이데올로기적 양태에 대한 감상적인 반응이라는 점도 그러하지만, 여성에 대한 그의 퇴행적인 몸짓도 비이성적이기는 매 한 가지이다. 이러한 성급함은 『광장』의 단순한 결함이라기보다는 분단체제에 대한 비판을 단행하는 청년의 과잉된 감각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사건화에 주력하기보다 내면의 사유를 서술한 성과를 꼽자면 『회색인』은 『광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출중한 작품이다. 『회색인』에서 제기된 문제의 범위나 사유되는 양과 질, 반성의 대범함은 『광장』에서 보이는 과잉된 행동, 논리적 비약, 심한 예단에서 벗어나 있다. 즉 『광장』에서 ‘남(밀실)이냐 북(광장)이냐’라는 민감한 선택지 앞에서 겪는 쓰디쓴 환멸과 포로석방 뒤의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한 채 제3국행을 선택하고, 이어서 자신만을 위한 광장이자 밀실인 바다로 몸을 던지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는 데서 확인되는 관념적 과잉상태가 빚어낸 자기파괴적 해결이 『회색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품의 제명인 ‘회색인’은 북녘 땅 고향에 가족을 남겨둔 채 LST를 타고 월남한 주인공 독고준이 남한사회와 계약을 맺으면서 현실과의 인식론적 거리를 두고 전개되는 미적 주체의 야심한 기획을 반영하는 상징어라고 할 수 있다. 별다른 서사의 전개 없이도, 이 작품은 내적 성찰의 치열한 자취를 모두 15장에 담아냄으로써 그 담론의 면모까지도 주목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 작품에서 발견되는 인물의 내면이 가진 특질은 독서인이라는 주체의 회상, 미적 주체의 모색과 자기구원, 주체의 자기정립으로 이행된다. 뿐만 아니라 주체의 자기반영적인 서술의 양식은 이후 발표되는 『구운몽』, 『서유기』, 『총독의 소리』, 『주석의 소리』,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거쳐 『화두』에 이르도록 유효한 근원이 된다.

 

2. 이방인 독고준 ― 파행적 근대의 성찰적 주체

최인훈은 김현과의 대담에서 『회색인』은 『광장』의 이명준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가정 하에서 쓰여 진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현의 설명에 따르자면, 『광장』에서 이명준이 떠도는 풍문에 만족치 않고 광장을 찾아 나섰던 인물이라면 『회색인』은 외부와의 모든 소통 경로를 스스로 차단하고 자기만의 회색 의자에 앉아 현실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는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김치수는 『회색인』에 대해 ‘에세이적 글쓰기’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회색인』이라는 에세이 스타일의 이 이야기에는 사건을 위해 인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상념과 사변을 위해 사건이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즉 사회적 현실 자체가 소설의 표층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이 주인공이라는 개인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으며, 또 그 주인공이 그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고 있고, 그 수용의 영향이 대체 어떤 식으로 그의 주체 형성에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소설의 전면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결국 최인훈이 이 소설을 집필한 기본적인 맥락은 1961년에 발발한 박정희의 5ㆍ16 군사 쿠데타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화의 과정을 겪고 있던 시점(1963년)에서 1960년의 4ㆍ19를 미완의 혁명으로서 성찰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5ㆍ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함으로 인해 4ㆍ19가 비록 실패한 혁명이 되어 버렸지만, 4ㆍ19 자체는 자발적인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학생들ㆍ시민들의 열망의 표출이었고, 이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성찰성이 심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회색인』은 4ㆍ19을 계기로 근대적 개인의식 및 시민의식이 형성과 근대적 제도에 대한 나름의 비전을 사후적으로 추체험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근대성에 대한 역동적이고 양가적인 경험 속에서 근대적 현실과 자아에 대한 성찰성을 독고준이라는 인물과 그의 대척점에 서있는 김학(및 김소위 그리고 황선생)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 『회색인』을 주체론의 관점에서, 즉 근대사회의 성찰적 경계인 혹은 이방인으로서의 독고준이 자신이 처한 사회적 현실에 어떻게 응전함으로써 자신의 주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정립해 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로 그의 발언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광장』과『회색인』그리고 『서유기』와 『구운몽』등의 초기 최인훈의 소설들에서 주인공의 주체성과 관련하여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모티프의 하나가 바로 ‘피난민의식’이다. 이 모티프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일찍이 김윤식이 간파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최인훈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피난민의식’이 단순히 월북자 아니면 월남한 실향민으로서 갖게 되는 절망적인 패배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그의 소설에서는 정주민의 사유 방식과 대립되는 인식 지평으로서 탈주민의 사유, 이방인의 사유, 경계인의 사유가 등장하고 있다. 『광장』의 이명준도 그렇거니와 『회색인』의 독고준은 명백히 남북 사회의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그는 현실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남북 체제를 비판적으로 조망하거나 반성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해방된 자아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불안정한 생계의 조건에서 오는 일상의 불안만이 아니라 전쟁세대로서 겪게 된 민족의 분단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역사의 조건을 개인의 삶과 연관시켜 사유하는 주체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뒤 단독자의 위치에서 냉혹한 현실의 조건을 직시함으로써 분단과 전쟁을 거쳐 개발독재라는 돌진적 근대화의 경로를 밟고 있는 남한의 역사적 조건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주체적 개인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배경으로 처리되는 기본적인 사건의 서사를 우선 정리하고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독고준이 보여주는 사변과 발언을 통해 나는 그의 주체성을 분석해나갈 것이다.

 

3. 『회색인』의 서사와 구조

총 14장으로 되어 있는 『회색인』의 스토리적 서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텍스트 주요 화자―단, 4ㆍ6ㆍ8장의 화자는 독고준의 친구 김학이다―인 독고준은 회상 형식을 통해, 가족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와 함께 월남하여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던 중 아버지가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하는 주체로 설정된다. 매부가 될 뻔한 ‘현호성’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거절당한 그는 노스탤지어에 젖어 완치될 가망 없는 부스럼과도 같은 ‘W시’를 그리워하지만 이제는 갈 수 없다. 그러던 중 독고준은 살고 있는 집의 주인 일가를 자주 찾아오는 ‘김순임’이라는 ‘왕국재림교회’의 여전도사를 만나지만, 그녀는 독고준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이 일이 있는 직후 독고준은 2ㆍ4파동 즈음, 월남할 때 가져온 짐 속에서 현호성의 공산당 당증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매개로 동반자적 공산주의자 현호성의 집에 들어가 생활한다. 8장에서는 김학이 ‘황선생’의 사변을 듣고 9장은 미국 유학 갔던 현호성의 처제인 화가 ‘이유정’과 독고준이 조우하는 내용이 나온다. 마지막 장에서 독고준이 그 이유정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회색인』의 서사는 끝이 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색인』의 1장과 마지막 14장이 유사한 구조의 서술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1958년 어느 비가 내리는 가을 저녁에 독고준의 하숙집으로 그의 친구인 김학이 ....... 찾아왔다. .......

 

1959년 어느 비가 내리는 여름 저녁에, 독고준의 집으로, 그의 친구인 김학이 ....... 찾아왔다. .......

 

위와 같은 수미상관의 기법 사용은 작가가 서사의 결말에 와서도 서두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결말이 보일 즈음에 이루어지는 서두에 대한 재인식은 서사 전체에 대한 재분석이 요구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작가는 서사의 완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다시 서사의 흐름을 되짚어나가는 것이다. 이에 완결을 향한 서사의 흐름을 단절되고 그 종결을 유보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 자체가 이미 이 소설이 갖고 있는 주제로서 성찰적 개인의 형상화를 구조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소설적 구조를 사건의 진행에 초점을 두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이 작품 『회색인』은 기존의 소설적 구조인 ‘처음/중간/끝’이나 ‘기-승-전-결’의 개념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다. 사건에 대한 설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등장인물의 사변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나마 『회색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건을 독고준이 현호성의 집에 살게 되는 경위이다. 독고준은 현호성의 노동당원증을 무기로 남한에서 이미 거물급 인사에 속하는 현호성을 위협해서 자신이 먹고 살수 있는 거처를 확보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사건도 독고준 자신의 관념과 사색을 지속시킬 수 있게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했다고 말함으로써 더 이상 어떠한 극적 사건으로도 진전이 되지 않는다. 즉 현호성과 독고준의 갈등이 심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고준의 말처럼 독고준이 현호성의 노동당원증으로 현호성을 위협한 사건은 사건 그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독고준의 사색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서 또는 이유정과의 만남을 예비하기 위해서 구성된 것이다. 또한 이유정과의 만남이라는 사건이나 이유정이라는 인물조차도 독고준이라는 한 개인의 상념과 사변을 심화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독고준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해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인 것이다.

 

4. 독고준의 자아 기획과 주체화 과정

『회색인』의 독고준은 월남한 인물이다. 독고준은 귀향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귀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는 실향민이며 동시에 피난민이다. 정신적 뿌리를 잃고 삶의 안식처를 잃은 셈이다. 이로 인해 독고준은 상실감에 시달린다. 독고준의 인식적 방황은 집과 가족과 어머니와 고향을 잃은 상실감에 유해한다. 또한 이러한 상실감을 달래주기에 너무 거칠고 황폐한 서울이라는 낯선 타향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고향은 자아의 주체성을 성립시켜 줄 수 있는 이상향으로 간주된다. 결국 독고준의 고향 상실은 이상향의 상실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의 형식을 ‘선험적 고향 상실성의 표현’으로 명명했던 게오르크 루카치의 개념을 빌려, 소설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준을 외부 세계에 대한 낯설음으로부터 생겨난 문제적 개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따르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이 처한 세계가 행복하고 아늑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반항하거나 갈등을 겪는다. 그 결과 대개의 경우 광인이나 범죄자 등의 악마적인 성격을 지니거나, 사회의 보편적 가치 질서에 맞서는 이질적이고 소외된 인물로 나타나게 된다. 골드만은 루카치의 개념을 적용하여 소설을 "문제적 인물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서사 양식"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도 독고준은 전형적인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문제적 개인을 표상하고 있다.

친구인 김학이 돌아갈 고향이 있는 존재인데 비해, 독고준은 고향도 가족도 없는 존재이다. 그는 “가족이 없다. 그러므로 자유다” 독고준은 고향에 대해 짙은 향수를 느끼고, 급기야 제12장에서는 조부가 월북하기 전에 살았다는 P면을 찾아 간다. 그는 어떤 것도 본래의 고향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고향을 발견하지도 (혹은 고향을 새로이 발견하지도) 못하고 실향(失鄕)의 경험 속에 영원히 살아간다.

따라서 이제 그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에고(ego)'이다. 독고준은 고등학교에서 대학 초년에 걸친 시절에 “민족의 일원도 국가의 일원도 그리고 가족의 일원이기도 전인 ’자기‘”를 발견했으며 “이 발견에 몸이 으스스하도록 감격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에고를 가꾸고 매끄럽게 다듬고 대뜸 눈에 뜨일 유별난 빛깔을 내게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는 물론 타인의 주목을 끌고 싶은 욕망,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다. 이러한 인정에의 욕망에 지배당하는 독고준은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거부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한다. 독고준의 이러한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그가 여인들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이다. 『회색인』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인들―W시의 여인, 김순임, 이유정―을 차례로 이동해가는 독고준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바로 그가 그 여인들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그의 존재를 거부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으며, 순종과 헌신이라는 특성은 무엇보다 그런 조건에 일치할 개연성 때문에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회색인』에서 독고준이 아버지 상실을 겪으면서 긴 회상을 거쳐 대면하게 되는 단독자의 현실이나, 김학을 지식의 추상성ㆍ가족적 혈연의식ㆍ동인들의 감상적 유대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그의 형 김소위나 황선생 같은 인물들은 모두 주체의 정립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시도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독고준의 경우 분단과 실향, 아버지 상실로 인하 피난민의 처지에서, 김학의 경우, 고향과 민족을 대상화하는 군인이라는 관점에서, 김학의 경우 병든 아버지와 가족의 희생을 전제로 한 자신의 학업과 사회 진보에 대한 열정에서 방황하는 처지에서 반성하는 주체의 형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독고준의 경우, 경제적 계약과 사회문화적 계약의 분리는 그의 회상에서 드러난 현실과 허구의 분리를 변주하여, 누님의 전 생애를 건 삶의 도박이 봉쇄된 운명적 현실을 대리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들을 정초(定礎)하려는 해방된 몸짓을 보여준다.

 

........ 이향(離鄕). 나그네살이. 그리고 오랜 풍상 끝에 귀향. 객지에서 나그네 죽음을 하는 사람도 마지막 깜빡거리는 임종의 순간에 그의 눈알에는 어머니가 비칠 것이다. ....... 그러한 공향을 김학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없다. ....... 나의 고향은 나의 속에 있다고 믿게 된 인간. 그리고 그 ‘속’에서 소리도 없는 바람만 느끼는 인간. 이것은 고향을 잃은 자의 대상(代償) 본능이 시킨 속임수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실향민 아닌 이향인, 혹은 피난민 내지는 이방인, 나그네살이로 스스로의 삶을 규정하는 독고준의 내면독백은 고향만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와 국과와 민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 도시적 인간, 망명지식인의 자기선언에 가깝다. 그는 더 이상 고향의 온기를 보존하지 않으려 하며, 가족의 혈연적 유대나 아버지의 권위를 빌리지 않는다. 그는 소년기에 겪은 배교자의 심문으로도 이데올로기의 허위와 폭력을 충분히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당증을 매개로 한 남한에서의 계약적 삶은 그대로 안주하기를 유보한 채 불모적인 남한 현실과의 정신적 응전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함축한다. 독고준과 김학의 형, 황선생이 조망하는 남한의 불모성이란 분단과 전쟁, 서구적 근대에 대한 맹목성이 빚어낸 난민수용소와 같은 허구에 가까운 시대현실을 지칭한다. 결국 『회색인』이 재현하고자 하는 바는 주어진 운명이자 거대한 아이러니로서 사회현실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주체의 치열함에 있다. 현실과 길항하며 드러내는 내면의 진정성은 운명적으로 주어진 삶의 모든 조건들을 모색하며 열어놓는 서술에서 잘 발견된다. 또한 이 진정성은 그의 문학에서 남북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이념적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에 맞서서 힘겹게 마련해가는 개인 주체의 가치발견과 자기구원, 더 나아가 가족의 혈연적 유대, 국가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적 차원마저 넘어선 주체 정립의 미적 기획을 예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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