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대한 내 생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학교에서 초청한 와인강사의 강의를 들었을 때도 와인 맛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그래서 난 테이블에 놓인 4병의 고급 와인을 거의 마시지 않고 놔뒀다 (지금 생각하니 집에 싸갈 걸 그랬다. 20만원짜리 와인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 이후 강의 내용이 떠올라 와인을 시켜 봤고, 참고 마시면 마실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와인 맛을 조금 안다. 지난 일요일엔 어머니와 둘이 와인을 마셔보기도 했다.

 

그렇긴 해도 밖에서 와인을 먹는 건 여전히 돈이 아깝다. 메뉴에 적힌 와인들 중 뭘 시켜야 할지는 여전히 난감하고, 가격을 보면 자꾸 소주 생각이 난다. 강사가 해준 말이다.

"잘 모를 때는 까소 주세요 라고 해라."

까소는 까---  소---의 약자로, 그렇게 말하면 그래도 좀 아는구나 쳐준단다. 글쓰기 강의를 해준 강사분과 내 글을 실어줬던 크로스워드 편집자 이렇게 셋이서 와인바에 갔을 때, 난 뭐든지 하나 골라보라는 그분들의 권유에 까소를 시켰다. 돌아오는 미녀 종업원의 대답, "까소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강사가 해준 말이 또 생각났다.

"요즘은 프랑스보다 미국이나 칠레 와인이 더 인기입니다. 소비자에게 더 친절하거든요."

일단 칠레 걸 시켰고, 가격은 2만9천원으로 정했다. 안주는 소세지를 시키고 싶었지만 다른 분이 "치즈 어때?"라고 해서 좋다고 했다. 한병은 금방 비워졌다. 두번째 와인을 시킬 때였다. 편집장의 말이다.

"아까 거보다 조금 더 비싼 걸로!"

3만2천원짜리가 나왔다. 난 머리속으로 지금까지 금액을 계산해 봤다.

'그래, 그냥 내가 내자. 두분 다 프리랜서인데 어쩌겠나.'

 

두번째로 시킨 와인이 맛있었던 건 나도 이제 와인맛을 안다는 증거일까. 그쯤해서 집에 가거나, 아니면 소주 집으로 장소를 옮겼으면 했지만, 그들은 세번째 와인을 시켰다.

"이거보다 좀 더 비싼 걸로..."

5만원이 넘는 와인이 나왔을 때, 난 마음을 정리했다. 그리고 글쓰기 강의를 해주신 분의 말을 떠올렸다.

"그 편집자, 프리랜서인데 일도 많고 돈도 많이 벌죠."

칠레가 고향인 아옌데 대통령과 네루다 얘기를 하면서,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진보란 무엇인가에 관한 얘기를 무지무지 유쾌하게 하면서 우리는 세병째의 와인을 비웠다. 나갈 때 난 편집자 뒤에 나갔고, 그분은 멋지게 카드를 냈다.

 

와인 맛을 알긴 했어도 12% 정도의 알콜 함유량으론 날 만족시킬 수 없었다. 집에 가서 혼자 소주에 2차를 할까 했지만 관뒀다. 잘한 것 같다. 내가 알콜 중독도 아닌데.^^ 한가지 더. 내가 편견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남자 셋이 와인을 마시는 건 영 어색했다. 역시 와인은, 미녀와 마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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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24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요. 와인은, 역시 미녀와. :)
저도 5만원 넘는 와인은 안먹어봤어요. 겁나서 못먹겠어요.

세실 2007-05-24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부리님 답지 않은 소심함~ 뒤에 서실때도 있군요. 크
( 아 그러고보니 마태님이 아니어서 그렇구나~ 내가 알고 있는 분은 마태님!)
그나저나 와인은 그저 진로와인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Mephistopheles 2007-05-2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마지막은 언제나 현명한 결론을 내리십니다....^^

프레이야 2007-05-2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베르네 소비뇽.. 저도 칠레산이 프랑스 것보다 더 입에 맞더군요.
전 매일밤 중독되었어요. 와인셀러까지 사서 넣어두고 뿌듯하답니다..
와인은 미녀와 함께,인가요? ㅎㅎㅎ

antitheme 2007-05-2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항상 집에서 미녀와 와인을 마십니다.

무스탕 2007-05-2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거 보면 정만 전 미녀는 아닌가봐요...
제 옆엔 와인도 없고 저한테 와인 마시자는 신사분도 없어요.. ㅠ.ㅠ

moonnight 2007-05-24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엔 잘 참으셨네요. 축하합니다. 가끔은 그럴 때도 있어야지요. ^^ 와인 참 맛있죠. 필름 끊길 때까지 마시지만 않으면 ;;;;

다락방 2007-05-24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계산하는건 참는 것도 필요해요. 지금의 이 페이퍼처럼 말이죠. 저는 와인을 모르니 저랑도 한번 마셔요, 라고 하고 싶지만 전 미녀가 아니라 뒤로 주춤할 밖에요. 털썩 orz

게다가 전 아직도 역시 소주를.....

파란여우 2007-05-2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오백원짜리 진로 와인은 소주 맛이 강해요.
담번에 만날 때는 그 때 그 밤의 공원에 앉아서
그 멤버들끼리 나발 불자구요.
미녀는 아니지만 제가 쏘겠슴다.
세실님 말씀대로 진로와인이 최고!

파란여우 2007-05-2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은 제가 유일하군요. 부리의 와인 얘기에 왜 추천들이 없을까?
1) 마태보다 덜 유명해서
2) '서민의 소주'를 예찬했으므로
3) 모처럼 먼저내기 게임에서 양보했으므로
4) 생각하기 귀찮은 기타 이유

다락방 2007-05-24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말씀에 반성하며 잽싸게 추천눌렀어요. 헷.

마노아 2007-05-25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 엔딩이 마음에 들어요^^ㅎㅎㅎ

전호인 2007-05-25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와인하면 괜히 분위기 있고, 격식을 차려야 될 것 같고, 소주는 그냥 대충마셔도 별 탈 없을 것 같고 하는 감정은 왜 일까요, 자연스럽게 마실 수 있는 쐬주가 최고죠. ㅎㅎ

부리 2007-05-25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아무래도...가격 차이가 아닐까요.. 쐬주 최고!
마노아님/호오, 그렇다면 마노아님과 함께...?^^
다락방님/반성은 아름다운 겁니다
여우님/님의 추천에 늘 감사드립니다. 진로와인도 있다니 놀랍습니다. 공원에서 님과 함께라면 어떤 술을 마셔도 좋을 것 같네요. 불러만 주세요!
다락방님/아니 전 님을 미녀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란 말입니까! 진실을 가르쳐 주세요!
달밤님/흠, 와인 마셔서 필름 끊길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언제 우리 와인이나...^^
무스탕님/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있잖습니까
안티테마님/ 대단하시군요!!!! 미녀랑 마시면 어떤 술이든 상관있겠어요^^
배혜경님/알라딘 분들 중 와인이 가장 어울리시는 분은 바로 님이십니다. 까베르네 소비뇽. 맞다, 이거였어요 강의 때 들었는데
메피님/하핫 제 글은 다 미녀로 통하죠
세실님/마태였다면 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후회하고 ....^^
아프락사스님/그렇죠? 술 한병에 5만원인데다 몇잔 나오지도 않으니.....

비로그인 2007-05-3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호, 미녀랑 마시는 술은 다 맛있지요 ^m^ 전 아이스와인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