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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마틴 에덴 1~2 - 전2권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환멸.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이 단어가 떠올라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적었다. 귀찮음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장렬하게 패배하여 장장 일주일를 묵힌 탓에 기억이 완전히 휘발되기 직전, 이제서야 이어 적는다. 환멸.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꿈이나 기대나 환상이 깨어짐. 또는 그때 느끼는 괴롭고도 속절없는 마음." 그야말로 『마틴 에덴』의 마지막 권을 관통하는 정서라 해도 되겠다. 이 쓰라린 정서는 절망이나 슬픔과는 다른 것이어서, 조건을 충족했을 때에만 발한다. 꿈이나 기대나 환상을 가질 것, 다음으로 그 환상이 깨어질 것. 그러니 애당초 꿈과 기대, 환상을 갖지 않는다면 없는 것이 깨어지지도 않을 터이니, 파편에 찔려 환멸할 도리도 없으리라.
마틴은 사랑에 고결함이라는 환상을 덧입혔고 그 환상은 본디 실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깨어지고 만다. 깨어진 환상의 파편에 찔리고서야 마틴은 깨닫는다. "이제 그는 알았다, 자기가 정말로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가 사랑한 사람은 이상화된 루스, 자기 자신이 창조한 천상의 존재, 자기가 쓴 연애시의 환하게 빛나는 정신이었다. 부르주아인 실제의 루스, 부르주아들의 모든 결점과 가망 없이 왜곡된 부르주아 심리를 가진 그녀를, 그는 사랑한 적이 없었다."(2권, 231쪽) 사랑은 결코 다른 가치와 비견할 수 없는 지고의 것이 아니며, 내가 간직해 온 사랑마저도 조건 따위가 개입되지 않은, 고결하다고 할 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가 사랑에만 그랬겠는가. 마틴은 다른 세계에서의 삶을 꿈꿨고 그곳에 발을 딛고 나서야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다. 천국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삶은 병든 것, 아니 오히려 진작부터 병들어 있던 것이었다.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2권, 246쪽) 더이상 참을 수 없는, 단지 편안해지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이의 눈 앞에 보이는 선택지는 단 하나다. 마틴은 몸을 싣고 있던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 소설에는 마틴과 마찬가지로 시를 썼음에도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고 제 수명을 다하여 죽은 자가 등장한다. 그가 마틴에게 건넨 충고를 들어보자. "그것들은 내버려 두고, 자네는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사랑하게. 배를 타고 자네의 바다로 돌아가. 그게 내가 자네에게 하는 충고야, 마틴 에덴. 이 병들고 썩은 도시에서 뭘 바라나? 자네가 섬겨야 할 단 하나의 주인님은 아름다움이야. (・・・) 자네의 기쁨은 글을 써서 성공하는 데 있지 않고, 글을 쓰는 데에 있어. (・・・) 아름다움을 자네의 목적으로 삼아."(2권, 94쪽)
내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물음은 이것이었다. '마틴의 창작은 과연 루스에게 걸맞은 상대가 되기 위한 수단일 따름이었나?' 내린 결론은 이렇다. 창작의 불씨는 루스에 의해 지펴졌을지언정 그것이 마틴에게 목적으로 화한 순간들이 적실히 존재했다는 것. 마틴은 창작 그 자체를, 그러니까 아름다움을 사랑할 수도 있을 터였다. 마틴의 문학적 재능은 충만했거니와, 그는 글을 쓰면서 제 삶에 전례 없던 관능과 희열을 경험했으니 과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아름다움을 섬기자. 섬길 만한 아름다움은 다양하겠으되, 다만 그것은 무용해야겠다. 아름다움은 본디 무용한 것이어서 수단이 되는 순간 퇴색하므로. 더욱이 장자의 말마따나 무용지용일 따름이다. 언뜻 보기에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가장 큰 구실을 한다는 것. 쓸모없는 아름다움은 환상이라는 장막 없이도, 그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 붙는 환멸 없이도, 진작부터 병들어 있던 삶을 겪는 이들에게 진통제를 처방한다. 이 정도면 아름다움이 거창한 구실을 한다 말해도 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