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는 수락산에 살았다. 연령은 미상이나, 400년은 산 듯하다. 영물이라 인간 행세를 한다. 늘보는 고기를 좋아한다. 특히 소고기에 환장한다. 소고기를 사 준다고 하면 처음 보는 사람도 따라갈 정도다. 늘보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양질을 소고기를 얼마나 공급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같이 고기를 먹으러 가면 3인분을 시키는데, 본인이 2.2인분을. 내가 0.8인분을 먹는다. 자기 고기라고 생각한 고기에 손을 대면 격분하므로 세심한 젓가락질이 필요하다. 먹이에 예민한 것은 야생동물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고기는 보통 스스로 구우나, ‘진실한 사람’(진늘)이라고 판단한 자들에게는 고기를 굽도록 허용해주는 것 같다. ‘진늘’의 몇 안 되는 혜택이다. 내가 집게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요즘 늘보는 내년, ‘프로듀스101’ 시즌 2에 출전하기 위해 맹연습 중이다. 개인기로 준비하고 있는 폴댄스가 수준급이다. 하긴 늘보인데 매달려 있는 게 어려울쏘냐. 잘 하는 게 당연하다. 프로듀스101 프로젝트에 있어서 늘보의 최대 고민은 소속사 사장님이다. 일정 레벨에 올라가게 되면 소속사 사장님이 스튜디오에 나와야 하는데, 사장님이 워낙 바쁜 관계로 나와 줄지 모르겠단다. 아무리 바빠도 회사 홍보차원에서 나와주지 않을까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늘보를 안심시키진 못한 것 같다.
늘보는 최근 일주일에 한번씩 만화방(물론 누워서 읽을 수 있는 곳이다. 여차하면 바로 잘 수 있다.)에 가서 슬램덩크 완전판을 읽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떨리는 손으로 넘겨가며 가끔 ‘으으’하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아오!’ 하는 소리도 낸다. 때로는 책을 확 덮고 상기된 얼굴로 한참 쉼호흡을 하고 다시 읽기도 한다. 슬램덩크를 다 읽은 늘보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농구가, 농구가 하고 싶”다며 고백했다. 하지만 현실에 안감독님이 있을리는 만무하고, 애먼 나를 그 대타쯤으로 삼아 이 폭염에, 주말마다 학교 운동장으로 농구하러 간다.
열대 생물이어서 그런지 별로 더운 기색도 없다. 마른 오징어처럼 말라 비틀어져 가는 나와는 다른 모습이다. 농구를 끝내면 떼루와에 가서 1L짜리 오렌지 쥬스와 500mL짜리 복숭아 쥬스, 두 통을 사 마신다. 물론 나눠 먹는 게 아니라 혼자 다 마신다.(오렌지를 먼저 다 마시고 복숭아를 입가심으로 마신다.) 충분히 고기를 사 줘 호감도를 쌓았을 때 레어한 확률로 한입 주기도 하는데, 빨대의 유속을 관찰해 몇 ml가 빠져나가는지 유심히 살피고 있으므로 한 모금 이상은 주의해야 한다. 경험상 30ml이상은 그냥 먹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도대체 1.5L가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걸까. 그래도 늘보의 몸무게는 하여간 50kg을 넘지 않는다.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근자에 늘보는 오버워치(블리자드의 새 슈팅 게임이다.)에 맛을 들인 듯하다. 지난 주 금요일에도 친구들과 우르르 피씨방에 가서 멀미가 날 때까지 오버워치를 한 모양이다. 나도 시도해 봤지만 화면이 어질어질해서 도저히 30분 이상 플레이를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낮부터 오버워치를 하러 피씨방에 갈 예정이란다. 함께 플레이 할 고수도 한명 섭외해 놓은 모양. 늘보는 승부욕이 강해서 경쟁이 붙으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전에 ‘모두의 마블’을 같이 했던 적이 있는데, 몇 판 연속해서 지면 불같이 화를 낸다. 임전무퇴의 정신만큼은 화랑 귀싸대기를 왕복으로 날릴 수준이다.
늘보는 물론 게으르다. 내게 빌린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를 거의 반년 째 반납하고 있지 않다. 반납을 종용할 때마다 신경질이 나는 듯하여 더 말하지는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요일마다 16시간씩 잔다. 조는 시간까지 합치면 18시간은 되는 듯하다. 도대체 생산적인 활동은 언제 할까 싶지만 오래 살았기 때문인지 의외로 잘 하는 게 많다. 댄스 전문가이며, 부적 작성의 전문가이며, 여행 전문가이며, 5개 국어(늘보어 포함)의 전문가이며, 경제학 전문가이며, 공부 전문가다. 상당한 역덕으로 국사 전문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늘보를 읽는 주요한 키워드는 질투심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질투의 여신 헤라의 머리 꼭대기에서 늘보는 태어났다. 늘보는 ‘진늘’로 분류되는 인사가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나의 여행 파트너이기도 한 루리를 매우 경계하고 있는데, 언젠가 실수인 척 루리 엉덩이를 후려갈긴 적도 있다. 늘보는 루리를 ‘한 주먹거리’로 생각한다고 공언한 바 있지만, (루리는 코웃음으로 화답했다.) 루리의 막강한 전투력과 늘보의 임전무퇴 정신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나의 중립적 판단으로는 용호상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