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 外에 나폴레옹과 관련된 것들



 1. 나폴레옹을 취급했던 작품들


 <書籍>

 "나폴레옹은 <죽은 다음날부터> 傳記가 써졌다"는 인물로 불리는 만큼
 그에 대한 서적과 작품은 많이 있다.(그러나 여기서는 傳記만 간단히 설명함)

 * 나폴레옹, 英雄의 野望과 苦惱 (에밀 루트비히)


 Emil Ludwig

 
1881년 1월 25일-1948년 9월 17일
 
독일출신의 작가.
 전기소설 작가로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전기 중에서는 단연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은바 있다.
 (상세한 것은 생략함)



 * 나폴레옹의 生涯 (티에리 렌츠)

 *
나폴레옹 自傳 (앙드레 말로)



 Andre Malraux (1901년 11월 3일-1976년 11월 23일)




 프랑스의 작가, 모험가, 정치가.
 드골정권에서 오랫동안 文化相을 맡았다.
 대표작으로 <王道>와 <人間의 條件>이 있다.




 * 세인트헬레나의 覺書 또는 回想 (Las Cases)
 등이 있다. 



  2. 로제타스톤


 로제타(영어:Rashid / Rosetta)

 
이집트의 지중해연안에 있는 항만도시의 중 하나이다.
 알렉산드리아로부터 65km 동쪽에 있고, 브하이라縣에 속한다.
 인구는 약 65000명(2001년)정도이다.

 로제타는 서기800년 즈음에 건설되었고, 16세기 오스만 터키에 의한 정복으로
 한때 알렉산드리아보다도 더 번영했었지만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부활 후에는 중요도가 저하되었다.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 때, 로제타석이 발견되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9세기에는 영국인들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로제타스톤




 
 Rosetta Stone은 이집트의 로제타에서 1799년에 발견되었던 비석이며, 
현재는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3종류의 기원전 문자로 쓰여 있고, 마지막 문자는 고대희랍어이다.

 해독에 참가했던 사람은 최초로 '토마스 영'(Thomas Young, 1773년 6월 13일-1829년 5월 10일. 영국의 물리학자. 파라오명 등 고유명사의 해독에 성공했다)이며


               
                                                          <토마스 영>


 최종적으로는 '쟌 프랑수와 샴폴리온'에 의해서 해독되었다.


                     



 <개요>

 그 돌은 1799년 7월 15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원정을 실시했을 때, 프랑스군의 '피에르-프랑수와 브샤르' 대위에 의해서 이집트의 항만도시 로제타에서 발견되었다. 세로 114.4cm, 폭 72.3cm, 두께 27.9cm, 중량 760kg. 당초에는 화강암 또는 현무암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暗色의 花岡閃綠岩으로 밝혀졌다.


                    
                                      


 바위에는 문자가 새겨져있고, 이집트어와 희랍어(코이네) 2종류의 언어로, 3종류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1802년 이후, 영국의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비문의 내용>

 헬레니즘기의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왕조 '프톨레마이오스5세' 에피파네스 施政 下의 기원전 196년에 열렸던 멤피스의 종교회의의 포고문을 옮겨 적은 것이다.

 
희랍어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Basileuontos tou neou kai paralabontos ten basileian para tou patros...”

 
(새로운 왕은, 왕의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계승했다....)

 
그 내용은 '프톨레마이오스5세'를 칭한 것이며
 '프톨레마이오스5세' 등에 대해서 황제 예배의 실시방법을 적은 것이다.


 <隱喩>

 영어에서는 로제타석을 은유로 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고
 그 예로는 해독하는 것이나 번역, 難問 등을 나타낸다.
 그리고 <면역학의 로제타석> 등, 중대한 열쇠 같은 것에도 은유되고 있다.




 3.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Beethoven의 교향곡 제3번 E플랫장조(내림마장조) <英雄> 작품55
 원제: 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un grand'uomo(이탈리아)
 영웅교향곡. 어떤 위대한 사람의 추억에 바친다.
 Beethoven이 작곡했던 3번째 교향곡이다.
 1804(또는 5)년에 완성되었다.
 Beethoven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4. 序曲1812년 (설명은 생략함)



 5. 포르타 니그라(Porta Nig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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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트리어에 있는 고대로마시대의 건축물.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도 지정되어 있다.
 <포르타 니그라>란 <검은 문>이라는 의미이며
 그 이름과 같이 외벽의 검은 돌로부터 그 이름이 붙여졌다.



                   
                           

 <개요>

 
180년에 로마市壁의 北門으로 건조되었던 것이었지만
 1035년에 성문을 가리는 형태로 聖시메온교회로 轉用되었다.
 그러나 1805년에 프랑스혁명군이 그곳을 점령했을 때
 나폴레옹의 명에 의해서 로마시대 이외의 건조물은 제거되어버렸기 때문에
 포르타·니그라도 城門蹟으로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졌고, 현재는 트리어의 관광 스폿이 되고 있다.
 1986년에 <로마遺跡群, 聖페테로대성당, 성모마리아교회>로서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6. 중요한 參考文獻

 
※ 단, 원 작가들에 의함


 
* 오크타브 오브리 <나폴레옹 言行錄> 大塚幸男 譯  (岩波文庫 1983년)
 * 프랑수와 비고-루시용 <나폴레옹 戰線從軍記> 龍川好庸 譯 (中央公論社 後의 中公文庫 1988년)
 
* 에밀 루트비히 <나폴레옹, 英雄의 野望과 苦惱> 北澤眞木 譯 (講談社學術文庫 上下 2004년)
 *
長塚隆二 <나폴레옹> (文春文庫 上下 1996년)
 
* 로제 듀프레스 <나폴레옹의 生涯> 安達正勝 譯 (文庫쿠세쥬·白水社 2004년)
 
* 安達正勝 <나폴레옹을 창조한 女子들> (集英社新書 2001년)
 
* 티에리·렌츠 <나폴레옹의 生涯 - 유럽을 우리 손에> 福井憲彦監修 遠藤유카리 譯 <(知의 再發見) 創元社 1999년>
 
* 兩角良彦 <反나폴레옹考-時代와 人間> (新版朝日選書, 朝日新聞社 1998년) ISBN 4-02-259715-1
 
* 죠르쥬 르노 토르 <나폴레옹 秘話> 大塚幸男 譯 (白水 U BOOKS 白水社 1991년)
 
* <나폴레옹全集 第1卷 이탈리아 戰記(上)> 難波浩 譯 (昭和刊行會, 1943년)
 
* <나폴레옹격언(拿勃列翁兵家格言)> (月曜會文庫, 1885년)
 
* <戰爭 政治 人間-나폴레옹의 말> 柳澤恭雄 譯 (河出書房 1939년)
 
* 마르텔편編 <나폴레옹作品集> 若井林一 譯(讀賣新聞社 1972년)
 
* 라스 카즈 <나폴레옹 大戰回想錄 全3冊> 難波浩 譯 (改造社 1937-1938년)
 
* 브리엔누 <나폴레옹실전(奈翁實傳)> 栗原古城 譯 (玄黃社 1929년)
 
* 워텐베르크 <戰史나폴레옹-將軍으로서의 나폴레옹 全3卷> (防衛大學 1955년)
 
* 梅崎延太郞 <奈翁戰史講授錄 全> (海軍兵學校 1935년)
 
* 梅崎延太郞 <偕行叢書 奈翁戰史略 上下> (陸軍偕行社 1942년)
 
* 大場彌平 上田修一郞 <나폴레옹戰略 國防雙書2> (甲陽書房 1966년)


 






Napoléon Bonaparte

<
大尾>




그의 영혼이 天國에서 구원받을 수 있길 바라면서......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END 

 

 

 

 끝까지 읽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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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2  나폴레옹麾下의 元帥들




 * 페리뇬(Catherine-Dominique de Perignon, 1754년 5월 31일-1818년 12월 25일)

 프랑스혁명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페리뇬 후작.


               




 그는 1804년에 나폴레옹에 의해서 임명된 4명의 명예원수 중 한명(다른 3명은 켈레르만과 세류리에, 르페브르)이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혁명전쟁에서 피레네전선(대 스페인전)에서 활약했었고, 그 후에는 5백인회의의 의원으로 선출되어서 스페인대사에 취임했다.

 그는 1799년에는 노뷔 전투에 참가해서 부상을 당했고, 포로가 된 후 프랑스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최초의 원수 중 한사람이 된 후
 1806년에 파르마와 피아센트 兩州의 총독(知士)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08년에는 나폴리의 총독으로서, 나폴리 왕 죠악키노1세(뮤라)의 본거지에서 나폴리방면 군을 지휘하는 등 중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군인으로서는(노뷔 전투 이후) 활약하지 않았다.

 그는 그 후에 서서히 부르봉 왕가에 접근했고, 마침내 그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에 격노했고, 워털루 전투 직전에는 장관명부에서 삭제했으며, 계급도 박탈했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왕정복고 때 루이18세에 의해서(1816년) 원수에 복귀했다.

 <평가>

 
그는 나폴레옹의 원수로서는 전장에서의 활약보다 과거의 명성과 정치적인 배려에 의해서 임명되었던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거의 활약이 없었던 원수 중 한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옷슈 또는 오셰(Louis Lazare Hoche, 1768년 6월 24일-1797년 9월 19일)

 프랑스혁명 기의 군인.



 



 <생애>

 
그는 1768년 馬夫의 아들로 몬트르이유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784년에 16세의 나이에 병졸로 입대했다.
 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는 벌써 프랑스 근위대의 하사가 되어있었다.
 1789년 7월 14일, 혁명이념과 국민의회를 열렬하게 지지했던 그는 바스티유습격 때 민중 측에 가담했다.
 그해 8월, 프랑스근위대의 해산과 함께 국민위병대에 군조로 다시 입대했다.
 그리고는 10월의 베르사유 행진에도 참가했다.

 ※ 베르사유 행진은 1789년 10월 5일, 여성 중심의 파리 시민들이 베르사유궁전까지 행진해서 루이16세를 연행했던 사건이었다. 10월 행진 또는 10월 사건이라고도 한다.

 1792년 4월에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종군해서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그 후 북부전선의 공위전과 네이르윈덴 전투에도 참가했고
 1793년 3월에는 그 공으로 중령에 임명되었지만, 그러나 반혁명용의자로 체포되었다.
 (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단케르크 수비대에 轉屬되었고, 이어서 단케르크 공방전에서 큰 무훈을 올리고는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는 또 훈공을 거듭했고, 그 1개월 후에는 장군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이어서 26세의 나이로 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0월에는 군대를 인솔해서 프로이센군과 싸웠으나 카이저-스라우테른 탈취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곧 심기일전해서 12월에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라인 강 西岸을 확보했다.

 그리고 94년, 카루노에 의해서 파면되었지만, 그러나 곧 이탈리아 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또 산-쥬스트 휘하 장군의 고발에 의해서 니스에서 체포되었고, 파리로 이송되었다.



                 
                                                         <산 쥬스트>
                                     


 그리하여 그는 불과 그 일주일 전에 결혼했던 16세의 부인을 두고서 당분간 감옥생활도 해야 했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만났던(근처 방) 조세핀과 곧 애인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5월 16일, 그는 처형 직전에 있었지만, 그러나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발발로 석방되었다.

 그 후, 그는 서부방면 군으로 전임을 받아서 방데반란 진압에 파견되었다.
 
그리고는 부임하자마자 관용정책을 취해서 반란군을 와해시켰다.

 1795년 6월 15일, 영국의 지원으로 왕당파부대가 퀴베론(Quiberon-프랑스서부 브르타뉴 지역권, 퀴베론반도 남단 해안도시)에 상륙하자 그는 그것을 격퇴했고, 그 대부분을 포로로 획득했다.



        
                                                              <퀴베론 반도>
                                                        


 그리하여 1796년 7월까지 방데지방의 평정을 선언했다. 그리고
동년, 그는 또 아일랜드원정 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12월에 브레스토 항을 출발했지만, 그러나 폭풍우 때문에 함대가 뿔뿔이 흩어져서 실패로 끝났다. 그 다음에 그는 또 1797년 2월에 군사령관에 취임했고, 이어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몇 건의 전과를 올렸다.

 그 후에 그는 왕당파의 세력이 의회로 확장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군대를 파견해서 파리를 포위했다.
 그 결과 그는 전쟁대신에 추대되었지만, 그러나 단기간으로 끝냈고, 이어서 폴 바라스의 부패에 항의해서 사직했다. 그 후 그는 군대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러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못했다. 그리고는 1797년, 30세의 나이로 戰地였던 베츠라에서 병사했다.(그에는 또 독살설도 있다)





프랑스의 군인, 원수.

 * 산-씰(Laurant Gouvion-Saint-Cyr, 1764년 5월 13일-1830년 3월 17일)

 


 

 <약력>

 
1. 성장내력과 관직에 오름

 
그는 로레누(Lorraine)지방의 토울스(Tours)에서 피혁가공업을 영위하던 일가에서 태어났다.
3세 때 부모님이 이혼했고, 그 후 가업을 물려받는 것을 싫어해서 집을 떠나 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어학과 수학 그리고 繪畵와 제도 등을 배운 후, 화가를 지망해서 이탈리아에서 2년을 보냈다. (파리에서 俳優를 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샤토브리앙의 기록에 의함)


                                       <로레누 위치도>                                          
          
     <토울스>



 ** 사토브리앙(Francois-Rene de Chateaubriand, 1768년 9월 4일-1848년 7월 4일)

 프랑스 · 빈체제 하의 정치가.
 작가로서도 알려졌다.(자세한 것은 생략함)



 




 그 후, 그는 프랑스혁명 후였던 1792년에 군인이 되려고 공화국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는 군인으로서의 적성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었던 높은 교육까지 받았던 것으로 해서 중용이 거듭되었고, 이어서 2년도 채 되지 않아서 장관에까지 승진했다. (그 즈음부터 그는 드제이, 네이, 다브 등과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특히 네이와 다브와는 마음이 맞아서 나중에까지 우정을 유지했다)

 
2. 나폴레옹 시대

 그 후로도 그는 주로 라인 및 이탈리아방면에서 활약해서 유능한 사단장으로서 이름을 높였지만, 그러나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까닭에 나폴레옹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또 나폴레옹 역시도 그때는 그를 싫어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던지 그는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또 그 결과로 한직으로 돌려져서 더 이상의 승진도 기대할 수 없게 되어갔다. 그러나 그는 1807년의 폴란드전에서 다시 기용되었고, 이어서 충분한 역량을 선보여서 그 다음해에는 카타르냐에서 제7군단의 지휘를 맡아서 활약했다.



            
             <카타르냐>
                                            

 그 후로도 그는 포로츠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등 무훈을 올렸고, 그로써 나폴레옹은 그를 재인식하고 1812년에는 원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전쟁의 후반이었던 드레스덴 전투에서는 서툰 솜씨를 보였고 (그 싸움에서 그를 포위전에 기용했던 나폴레옹은 나중에 “그를 攻勢에 투입했던 것은 나의 실수였다” 라고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다), 그 후의 드레스덴 방위 전에서는 천성의 수완을 발휘해서 탄약과 식료가 다할 때까지 3개월을 참아낸 뒤에야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다.

 3. 그 후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했을 때, 그는 나폴레옹을 외면했다.
 그리고 워털루 전투 뒤에는 임시정부에 참가해서 공화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고, 이어서 두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는 또 네이의 처형재판 때는 그를 구해보려고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평가되어서 전쟁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군의 개혁과 재편성에 착수했지만, 그러나 보수반동 때문에 2년 만에 좌절했다.
 그리고 1821년까지는 모든 직무를 물러났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회상록과 戰史논문 집필로 여생을 보냈다.

 
4. 인물상

 그는 다른 나폴레옹의 원수들과 비교한다면 지명도가 낮지만, 그러나 군인으로서는 매우 우수한 인물이었으며, 다브나 맛세나에 필적한다고 평가되었다. 특히 그는 방어전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었고, 그래서 나폴레옹도 후에<그는 과연 방어전에 관해서는 제1인자였다. 물론 공격에 관해서는 내가 더 우수했지만...> 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그 思想(평생 그는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다)과 경력이 말해주듯 활약했던 장소가 한정된 감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나폴레옹이 그를 잘 다루지 못했던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또 개인적으로는 냉정침착하고 감정에 흐르는 일 없이 청렴결백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너무 무표정하고 냉담해서 <그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하고 알아보려고 해도 이해하기가 힘든 사람이었다고 하며, 또 주위사람들(특히 상사들)과도 자주 충돌해서 <스파르타인> 또는 <氷人> 또는 <梟-올빼미> 등의 별명도 가지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점은 또 다브도 비슷했는데, 어쩌면 그래서 그 두 사람이 친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그는 여러 가지 奇行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서 <전투 후에 僧院에 틀어박혀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든지, 또는 <대오를 이탈해서 마음대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등의 에피소드도 남겼다.

 하
지만 그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는 매우 두터웠던 것 같고, 그래서 <1813년 전쟁에서 그가 기용되었을 때, 그는 장병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그와 함께 환영받았던 원수로서는 다브와 네이 그리고 오쥬로가 있었다)



 




 *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1766년 10월 23일-1847년 5월 29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기의 군인. 제국 원수.
 나폴레옹1세가 임명했던 26명의 원수 중 제일 마지막으로 임명되었던 사람.
 그것도 1815년 백일천하 때였다.




 그는 프리틀란트 전투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활약했지만, 그러나 워털루에서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너무 잘 따랐던 것이 오히려 해(패인)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 이틀 전의 리니 싸움에서 이겼던 블뤼허가 인솔하던 프로이센군을 기병 35000명으로 추격하도록 나폴레옹으로부터 명받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때는 그가 프로이센군을 따라잡아서 타격을 줄 수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워털루 근처에서 포성이 울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격명령을 고집했고, 그로 인해서 나폴레옹이 인솔하던 주력군과 합류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또 프로이센군은 워털루로 향할 수가 있어서, 결국에는 Wellington이 인솔하고 있던 영국군에게는 유력한 원군으로 참전하는 결과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저녁때까지도 우세하고 있었던 프랑스군은 패배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단, 그때 그루시가 이끌었던 그 병력은 주력군이 패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하나 없이 귀환했으며, 그것은 또 파리를 지키고 있던 육군대신 다브 원수가 급히 수습을 해서 연합군이 밀어닥치는데 대한 억제효과는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상황은 끝났고, 그리고 1840년 12월에 나폴레옹의 유해가 파리로 귀환했을 때, 그 式典에는 그도 함께 참석을 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곳에 함께 참석을 했던 나폴레옹이 임명했던 원수 중에는 솔트와 우디노 그리고 몬세이도 있었다.




<이상, 나폴레옹 기의 원수 27명에 대한 소개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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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2  나폴레옹麾下의 元帥들




 * 에두아르(에두알드) 아돌프 카슈미르 죠제프 모르티에(Edouard Adolphe Casimir Joseph Mortier)

 1768년 2월 13일-1835년 7월 28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전쟁 기의 군인. 제국 원수.
 7월 王政期 중 1834년부터 수상을 맡았고, 그 재직 중에 암살되었다.





 <생애>

 그는 1791년에 군대에 투신했다. 그리고 1792년부터 1793년 프랑스혁명전쟁 때는 주로 북동전선이나 네덜란드, 그밖에 뮤즈 강, 라인 강 방면에서 싸웠다.

 1799년의 제2차 대불대동맹과의 싸움에서는 여단장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사단장이 되었고
 이어서 1804년에는 원수가 되었다.

 그는 울름 전투에 참가한 후, 아우스트리트 전투 바로 직전에는 미하일 쿠투조프가 인솔하던 數에서 우수했던 러시아,·오스트리아군을 맞아서 단독으로 선전했던바 있었다.

 
그리고 1807년의 프리틀란트 전투에도 참가했다.

 1808년에 그는 트레비스公이 되었다.
그리고 반도전쟁에도 참가한 뒤, 친위대를 지휘했다.

 1815년의 백일천하 때는 나폴레옹 군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병 때문에 워털루 전투에는 참가할 수가 없었다.

 
1830년부터 1831년까지, 그는 프랑스대사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1834년에는 프랑스 수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1835년 국민군의 행진을 열병하던 중 폭탄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 샤를 피에르 프랑수와 오쥬로(Charles Pierre Francois Augereau)

 1757년 10월 21일-1816년 6월 12일
 

                    
                                                <아레코레 전투에서의 오쥬로-1796년>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기의 군인.


 


 <생애>

 1. 젊은 시절

 
그는 1757년에 파리에서 과일노점상을 하던 어머니와 벽돌공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교육을 받은 후, 어머니가 독일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어에 통달했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지만 모두 만족하지 못했고, 16세에 쿠레아보병연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성격이 난폭했던 데다 싸움꾼 기질 때문에 2년 만에 제대했다.
 그 후 그는 칼잡이로서 이름이 나서 아르트와 백작 龍기병연대에 입대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결투를 반복하며 무적을 자랑하던 劍豪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그러나 1776년경에 사관을 죽이고 스위스로 도망쳤다.
 그는 그길로 제네바에서 흑해연안까지 가서 러시아군에 입대했고, 이어서 오스만제국과 싸웠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도망해서 다시 프로이센군에 입대했다.
 그는 그곳에서는 전투경험을 살려서 하인리히 왕자 연대와 근위연대의 하사관으로 재직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군에 불만을 가져서(당시 프로이센은 적국인이었던 프랑스인은 승진시키지  않았다)
 탈주했고, 이어서 무장한 동료들과 함께 그 이웃나라였던 작센왕국으로 도망갔다.
 그는 그곳에서는(드레스덴) 초야에 묻혀서 살았지만, 그러나 곧 이어서 프랑스의 왕자탄생에 대한 恩赦로 귀국이 허락되었고, 그리고는 브루고뉴용기병연대에 복귀했다.
 그 후 그는 카라비니에 기병연대의 검술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2년 뒤에는 군사고문단의 일원으로 나폴리왕국 방문을 완수했고, 그 공으로 소위로 승진했다.(단, 그곳에서도 탈주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또 그의 아내 가브리엘과 Lisbon으로 사랑의 도피행을 떠났다.
 그는 1788년부터 1790년까지는 포르투갈에서 체재했지만
 그러나 프랑스혁명발발(혁명파의 국외퇴거명령에 따라서)에 수반해서 프랑스로 다시 귀국했다.

 
2. 프랑스혁명전쟁

 프랑스혁명전쟁 때 그는 방데반란 진압이나 南下해서 스페인군과의 전장으로 전전했다.
 그 결과 그는 순식간에 승진해서 1793년 12월 23일에는 사단장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사단은 이탈리아에 파견되어서 나폴레옹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1796년 3월의 밀레시모(Millesimo)의 싸움이나 동년 4월 14일의 콧세리아(Cosseria-이탈리아 북서부 해안지방)의 공위 또는 8월 5일의 카스티리오네(Castiglione-콧세리아 근처)의 싸움에서 활약했던 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1797년에는 총재정부의 지원을 위해서 파리로 귀환했다.(나폴레옹에 의해서)
 그 후, 그는 (혁명력) 후류크티드르 18일의 쿠데타에서 활약한 후, 독일국경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 라인 강 방면으로 가있었기 때문에, 1799년 11월의 브뤼메르 쿠데타 때는 거의 역할이 없었다. 하지만 1804년 5월 19일, 그는 나폴레옹에 의해서 프랑스 제1제정 최초의 원수가 되었다.

 3. 나폴레옹 전쟁

 그 후 그는 영국 침공을 위해서 브르타뉴 지방의 심장부에 집결했지만, 그러나 그 작전은 곧 중지되었다.
 그러자 그가 지휘하던 대육군 제7군단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의 대결을 앞두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의 군단은 제3차 대불대동맹 때는 콘스탄츠(영:Constance-독일연방 남부)와 브레겐츠(표준독일어:Bregenz-오스트리아 북서부)에서 싸웠다. 
그리고 그는 제4차 대불대동맹 때도 제7군단장을 맡았으며,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싸움에서는 좌익을 맡았다.

 1807년 2월 7일에 행해졌던 아이라우 전투에서도 그는 용감하게 지휘했지만
 그러나 그의 군단은 대 손해를 입었으며, 그 또한 중상을 입었다.

 1808년 3월 19일, 그는 카스티리오네公(그가 활약했던 1796년의 전투 이름에서 따온 것)이 되었다.
 (그리고 1915년까지 그 칭호는 그의 자손에까지 계승되었다)

 그 후, 그는 반도전쟁에도 참가했고, 카탈로니아지방에서 작전을 실시했으며
 그로인해서 얼마정도의 성공도 거두었다.

 1812년의 러시아전쟁과 그 다음 1813년의 제국민전쟁에도 그는 참가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1814년의 프랑스 전쟁에서는 리용의 방위를 맡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에 별 저항도 못해보고 그곳을 내주고 말았다.

 루이18세의 왕정복고 때는 그 역시도 왕정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백일천하 때는 나폴레옹에게 가려 했지만, 나폴레옹이 거절했다.
 워털루 전쟁이 끝나고 루이18세가 재 복고했을 때, 그의 칭호와 연금이 다시 다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후, 페레 라제즈 묘지에 매장되었다.




 * 세류리에(Jean-Mathieu-Philibert Serurier, 1742년 12월 8일-1819년 12월 21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전쟁기의 군인. 제국 원수.
 혁명전쟁에서 활약했고, 1804년 4월 23일에는 폐병원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5월 19일에는 명예원수가 되었다.
 1808년 세류리에 백작. 1809년 파리 친위대사령관.
 제1제정기에서는 거의 활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 원수들 중에서는 가장 知名도가 낮다.

                 




 ** 참고: 그가 등장하는 작품

 <나폴레옹­獅子의 시대> (長谷川哲也 :하세가와 테츠야-1963년생. 일본의 만화가)

 
이탈리아원정에서 그는 사단장이면서 군단의 선두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하는 것으로 오쥬로를 감탄시킨다는 장면이 나온다. 하세가와 테츠야는 대담한 각색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이른바 하세가와 매직), 그러나 상기의 활약에 관해서는 마르몽이 남긴 수기에서 <세류리에는 항상 맨 앞줄에서도 10보前을 달렸고, 역전의 강자들을 모두 仰天시켰다>라는 기술이 있으므로, 그것은 사실에 의거한 묘사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 자리에(그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이) 오쥬로나 맛세나가 마침 있었다는 것은 연출일 가능성이 높다.



 * 크라우드 빅토르()-페린(Claude Victor-Perrin, 1764년 12월 7일-1841년 3월 1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원수.
 베르노 공작.


                  




 나폴레옹의 오랜 전우로 툴롱 공략전에서 나폴레옹을 만났고, 이어서 많은 전투를 함께 치렀다.
 그는 밝고 호감이 가는 성격이어서 <화려한 태양>이라고 불리며 많은 병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꼼꼼하지 못한 성격으로 나폴레옹과는 그리 친하지 못했다.
 그는 왕정복고에 즈음해서는 부르봉가에 일찍부터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백일천하 때도 나폴레옹을 따르지 않았으며, 루이18세를 쫓아서 국외로 망명했다.
 제2차 왕정복고 후에는 전쟁대신, 근위군指令을 역임했지만
 후에 왕에게 소외당하고 만년은 불우하게 보냈다.




 * 마크드날(Etienne Jacques Joseph Alexandre Macdonald, 1765년 11월 17일-1840년 9월 25일)

 
※ 다수, 맥도날드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들이 많이 있음.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수단(sudan-아프리카)에서 스코틀랜드系 가계에서 태어났다.
 찰스 小僭王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로 피신해 온 자코바이트의 후예였다.
 1809년에 나폴레옹으로부터 군단장으로 지명되었고, 그에 더해서 한층 더 젊었던 이탈리아副王 우제누 드 보아루네의 군사고문 역할도 맡았다.
 바그람 전투에서는 그의 군단의 공격으로 오스트리아군 중앙부를 패주시키고 승리로 이끌었다.
 후에 타란트(타랜토)公의 칭호가 주어졌다.


                            



 1810년에는 반도전쟁에 지원했고, 1812년 러시아전쟁에서는 좌익을 담당했다.
 1813년의 제국민 전쟁에서는 뤼헬 전투, 바우첸 전투 뒤에 시레지아에 침공했지만, 드레스덴 전투와 같은 날이었던 8월 26일에 카츠바하 전투에서 블뤼허가 인솔하던 프로이센군에게 격파되었다.
 Leipzig 전투에서는 Leipzig 시가로부터의 프랑스군의 퇴각을 맡았지만(유제프 포냐트프스키와 함께), 그러나 교량이 폭파된 후에는 프랑스군에게 엘스타 강을 헤엄쳐서 도하하도록 지휘했다.
 (포냐트프스키는 바로 그 전에 전사했다)





 * 마르몽(Auguste Frederic Louis Viesse de Marmont 1774년 7월 20일-1852년 7월 22일)


               


 프랑스의 군인, 귀족, 정치가.
 나폴레옹1세의 하급사관시절부터의 심복부하였다. 그러나 1814년에 연합군이 파리로 침공해오던 그 절망적이었던 상황 속에서도 미적거려서 프랑스를 항복으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고, 회상록 등에서도 비난을 계속했지만, 그러나 유서에서는 그를 용서했다.

 그는 포병장교로서도 유명했고, 또 왕정시대말기에 制式되었던 그리뷰발(Gribeauval system) 砲시스템의 후계자로서, 프랑스혁명전쟁에서의 경험과 戰訓(전쟁경험)을 반영시켜서, 경량화 등의 개량을 도모했던 11年式 포시스템의 制定에도 진력했다.
덧붙여서 11년의 의미는 프랑스 혁명달력 11년에 해당한다.



<그리뷰발 시스템 구성>


 <약력>

 그

 1774년 유복하고도 교육열이 아주 강했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1792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세에 소위가 되었다.
 1793년 툴롱 공위전에 파견되어서 나폴레옹의 부관이 되었다.(이후, 계속 수행)
 1796년 이탈리아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1798년 이집트전쟁에 참전, 23세에 장군이 되었다.
 1799년 브뤼메르 쿠데타에도 참가했으며, 각 부대의 사전교섭을 담당했다.
 1805년 뷰르텐베르크 공방에서 승리했다.
 1806년 달마치아의 총독이 되었다.
 1808년 제국원수에 임명되었다.(그때까지의 功績으로서는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1811년 포르투갈원정 총사령관이 되었다.(그러나 침공은 했지만, 1812년에 패주했다)
 1813년 Leipzig 전투에서 많은 부하를 잃었다.(이후는 패전의 연속)
 1814년 파리방위를 맡았지만 압도적이었던 적군의 수 앞에서 항복했고, 이어서 적군에 합류했다.
 (그 결과, 나폴레옹은 퇴위했고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왕정복고 후에 루이18세에게 충성했다)
 1815년 백일천하 때는 루이18세와 함께 벨기에로 탈출했다.
 (그러나 귀국 후에는 근위사단참모장이 되었다)
 1821년 나폴레옹은 유형지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서에서 마르몽을 용서한다고 밝혔다.
 1833년 7월 혁명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이후는 각지를 여행하며 회고록을 집필했다)
 1852년 78세에 사망했다.




 * 켈레르만(Francois Christophe Kellermann, 1735년 5월 28일-1820년 9월 23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전쟁 기의 군인.


             



 1792년, 바르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퇴하고 일약 유명해졌다.

 ** Valmy 전투-1792년 9월 20일,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투.
     프랑스군이 승리.





<바르미 전투>



 ** 바르미는 프랑스 마르누(Marne)의 코뮌 중 한곳.

                
                             <마르누(네)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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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2  나폴레옹麾下의 元帥들



 * 프랑수와 죠제프 르페브르(Francois Joseph Lefebvre)

 1755년 10월 25일-1820년 9월 14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제국 원수.

                       

 <생애>

 그는 Haut-Rhin(프랑스서부 알자스 지역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경기병연대 소속 평민 군인이었다.
 그는 18세에 프랑스 근위병연대에 입대했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공화파였던 그는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전장에서 수많은 활약을 했고, 그로써 1794년에 장군으로 승진했다.
 그리고는 몇 개의 군단에서 전위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이후 이집트원정에서 급거 귀국했던 나폴레옹과 만났고
 곧바로 그에 매료되어서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00년 4월 1일에 그는 원로원의 의원으로 지명되었다.
 그리고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제국 원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레지 온 드누르훈장을 받았다.


                 



 1807년 1월 23일, 그는 단치히(現그다니스크 또는 그단스크-폴란드 령 항만도시) 공략을 명받았다.
 그 작전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5월 19일에 기어이 그곳을 함락했다.
 그 공적으로부터 또 그는 단치히 공작의 칭호가 주어졌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베스트팔렌왕국의 왕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그는 아내와의 협의 끝에 <자신의 신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그것을 거절했다.
 이후, 그는 1808년의 스페인원정과 오스트리아원정에서 종군했고, 각지를 전전했다.
 그리고 1812년, 러시아원정에서는 노친위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서 보로디노 전투에 참가했으며
 퇴각 전에서는 부대의 선두에 섰다.
 그 이후 그는 1814년의 프랑스전쟁 끝까지 전전했지만
 그러나 4월 4일 더 이상의 항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나폴레옹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왕정복고 후 루이18세는 그를 프랑스 귀족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하자 변함없이 충성했다.
 (그러나 그때는 고령이었기 때문에 직위는 없었다)
 그 후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루이18세가 다시 파리로 돌아오자 그의 귀족신분은 중지되었다.
 (그러나 원수 位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1819년 3월 5일, 그는 다시 귀족신분을 회복했다.
 그리고는 1820년, 65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 쟌-바티스트 죠단(Jean-Baptiste Jourdan)

 1762년 4월 29일-1833년 11월 23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전쟁 기의 군인. 제국 원수.


                        


 그는 1762년 外科醫의 아들로 리모쥬(Limoges-프랑스중부에 있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 Limoges >


 1788년 그는 일병졸로서 도미해서 미국독립전쟁에 참가했다.
 1804년 그는 원수의 대열에 올랐다.
 1811년 그는 마드리드 총독이 되었다.
 1813년 그는 빅토리아 전쟁에서 영국의 Wellington에게 대패했고, 이어서 본국으로 소환된 후 퇴역했다.
 영화 <전장을 달리는 여자>에서는 그와 그의 아내의 로맨스가 묘사되었다.



 * 쟌-바티스트 베시에이르(Jean-Baptiste Bessieres)

 1768년 8월 6일-1813년 5월 1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전쟁 기의 군인. 제국 원수. 뮤라의 친구.
 
뮤라와 란누가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로리누와의 결혼을 둘러싸고 경쟁하고 있었을 때
 그는 뮤라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생애>

 그는 남 프랑스의 카오르(Cahors-프랑스남부 피레네 지역권에 있는 도시) 근교에서 태어났다.




<Cahors의 심벌에 해당하는 Valentre 다리> 

 
 그는 처음에는 동부 피레네軍에 소속된 후, 1796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원정 시에 그의 지휘 하로 들어갔다. 그는 이집트 원정에도 참가했고, 이후 나폴레옹과 함께 유럽으로 돌아와서 마렌고 전투에서는 기병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1804년에 원수로 임명되었지만, 그 인사는 평판이 매우 나빴다.<그때, 마르몬은 “베시에이르가 원수라면, 이 지구상의 인간들은 모두가 다 원수가 될 수 있다”라고 혹평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의 냉정하고도 용감한 자질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1805년부터 1807년까지의 전쟁(아우스트리트, 예나 아우어슈테트, 아이라우 전투 등)에서 친위기병을 지휘했다. 그 후, 그는 반도전쟁에도 참가했고, 메디나델리오세코 싸움에서는 단독으로 승리했다.



<Battle of Medina del Rio Seco>


 1809년에는 대육군에 복귀했고, 이어서 아스페른 에슬링 전투와 바그람 전투 등에 참전했다.
 그 결과로 동년, 그는 이스트리아公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또 그 후, 스페인전선으로 돌아가서 맛세나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귀환되었고, 보로디노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는 또 모스크바 퇴각 전에도 참가했고
 이어서 1813년 5월 2일에 행해졌던 뤼헬전투 바로 전날에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가 죽었을 때, 나폴레옹은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 기욤(길라움) 마리-안 브류누(프랑스 명:Guillaume Marie-Anne Brune)

 1763년 3월 13일-1815년 8월 2일
 프랑스 제1제정기에 활약했던 군인·정치가. 원수.
 나폴레옹1세에 의해서 임명된 26명의 원수 중 1명.


                 



 <약력>

 1789년 국민군대위.
 1797년 여단장 승진.
 제2차 이탈리아 원정 후, 주 터키대사로 취임.
 對영국戰을 위한 교섭을 담당했다.
 1804년 원수의 대열 합류했다.
 1815년 백일천하 뒤, 아비뇽 방문 중에 왕당파가 던진 폭탄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아비뇽>



 * 본 아드리안 쟈노 드 몬세이(Bon Adrien Jeannot de Moncey)

 1754년 7월 31일-1842년 4월 20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전쟁 기의 군인. 제국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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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2  나폴레옹麾下의 元帥들



 * 루이 아렉산들 베르티에(Louis Alexandre Berthier, 1753년 2월 20일-1815년 6월 1일)

 프랑스제국의 원수. 副宮內長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참모장.
 누샤텔大公, 바그람大公.




 
 <생애>

 
1. 成長來歷

 
그는 베르사유에서 공병부대(Corps de genie)사령관의 庶子로 태어났다. 그리고 13세에 왕립공병학교에 입교했고, 공병으로서의 지식을 익힌 후 17세에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미국독립전쟁에서는 로살()보伯의 휘하로 파견되었고, 그 후에 공적을 올려서 귀국 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프랑스혁명-바스티유감옥의 습격>


 그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국왕 '루이16세'에 의해서 베르사유 국민위병의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루이16세>


 그리고 1791년에는 루이16세의 숙모의 국외도피를 도왔으며
 그러나 그러한 王과의 깊은 관계 때문에 8월 10일사건 후에는 군무가 모두 해임되었다.



  ** 8월 10일 사건 <혁명전쟁과 8월 10일 사건>

 피르니츠 선언과 왕당파 망명귀족(에미그레-移民을 의미함)에 의한 선동활동은 혁명정부에 대한 중대한 협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유지를 위해서 대외전쟁을 단행했다.
 1792년 4월, 혁명정부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로 인해서 프랑스혁명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사관들은 귀족계급이었기 때문에 혁명정부에 비협조적이었고, 그 결과 프랑스군은 각지에서 패배했다.(그에는 또,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측에 프랑스군의 정보를 흘린 때문이라고도 전해진다거기다 또 프로이센군이 국경을 넘어서 프랑스 영내로 침입하자 그에 당황했던 정부는 조국의 위기를 전 국토에 호소했고, 그리고는 이어서 프랑스 각지에서 조직되었던 의용군들이 파리로 속속 집결했다. (그때, 마르세유에서 의용병들이 불렀던 노래 “라 마르세예즈”는 후에 프랑스국가가 되었다그리고 그때 파리 시민들과 의용병들은 프랑스군의 패배가 전쟁에 비협조적이었던 루이16세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8월 10일 튀일리 궁전을 공격해서 들어갔고, 이어서 왕권을 정지시켰으며, 국왕일가 전원을 템플 탑에 유폐시켰다.(이상, 8월 10일 사건)



<템플 탑-1734년>

<1792-8-10사건>


그 후, 당통의 연설을 계기로 9월 2일부터 반 혁명파 사냥이 행해졌고
며칠간에 걸치는 대학살이 행해졌다. (9월 학살-이하, 생략)



<당통>




 하지만 그때까지 프랑스혁명전쟁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고, 또 그에 따라서 유능한 사관이 요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곧 복귀했다.
 그 후에 그는 니코라 류크네르 원수의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다음 차례로 듀무리에, 케레르만의 휘하에서 근무했다.



                                   <케레르만>
                 

 2. 나폴레옹의 참모장

 1796년, 그는 이탈리아방면 군에 파견되어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정확하고 신속하게 군무를 해냈다.
 그는 또, 지휘관의 명령을 깊게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좋은 형태로 각 부대에 전달, 지도하는 뛰어난 능력 또한 선보였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를 이상적인 참모장으로서 더욱 높게 평가했다.
 그는 또 이탈리아원정에도 참여했고, 로디의 싸움 등에서 공적을 올렸다. 그리고 1797년에 캄포포르미오 조약이 체결되자 총재정부에 조약을 승인시키기 위해서 파리로 파견되었다.
 1798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로마공화국의 건국을 지도했고, 이어서 이집트원정에도 참여했다.
 1799년, 그는 나폴레옹과 함께 프랑스로 귀국했고. 동년 11월 9일 브뤼메르 쿠데타에도 관여해서 육군대신이 되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다시 이탈리아원정을 감행했고, 이어서 6월 14일 마렌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 전쟁에서 그는 예비군을 맡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나폴레옹의 참모장으로서 부지런히 일한 바 있었다. 그 후, 그는 평화조약체결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자 그 즉시 제국원수에 올랐다.
 
그리고 그 후의 여러 전쟁에도 참가했으며, 1806년에는 바란잘() 공작, 누샤텔 대공작이 수여되었으며, 1807년에는 帝國의 副宮內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 반도전쟁 및 對오스트리아 전쟁에도 참여했으며, 이후 바그람 대공작이 되었다.
 그는 1808년에 바이에른 왕의 질녀와 결혼했다.

 3. 나폴레옹과의 결별

 러시아 원정은 그에게서도, 나폴레옹에게서도 전환기가 되었다.
 그 두 사람은 보로디노 전투 때, 작전회의에서 번번이 이견으로 충돌했다.
 그 후, 나폴레옹은 그를 멀리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모총장으로서의 자신의 의무를 계속해서 완수해나갔다.
 그 후, 그는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나폴레옹을 떠났다.
 그 후에 그는 루이18세에게 복종했고, 왕제를 지지했으며, 파리입성에도 참여했다.
 그는 또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가있던 동안, 그가 보냈던 탈출계획에 관한 편지를 받게 되자 많은 갈등을 했다. 그리고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자 곧 窓으로 몸을 던져서 자살했다.
 그러나 그에는 또 사고설과 암살설이 있다.

 4. 평가

 그는 개인적으로는 용감한 군인이었으며, 더불어서 진두에 서서 지휘를 했던 것으로 인해서 부상도 자주 당했다. (로디 전투에서 군기를 들고 돌격했던 것은 나폴레옹이 아니고 그였다는 설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한편, 그는 군단지휘관으로서는 보통의 역량을 보여준 것뿐이었고, 바그람 전투에서는 실패도 범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역시 그 걸출한 참모능력에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작전을 이해하고 그것을 최적인 형태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이상적인 참모장이었다.
 (워털루 전투에서 솔트가 실수를 범했던 것에 대해서 나중에 나폴레옹이 그를 평가했던 부분을 참조)
 그러므로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그의 참모능력은 필수였다.
 단, 그는 자신의 권능을 몹시 고집했던 타입이어서 동료들과의 충돌도 많았다.
 (특히, 다브와의 다툼은 전쟁 그 자체를 파탄으로 몰고 갈 뻔했다든지, 또 네이가 찾아냈던 군사학자 죠미니를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를 홀대해서, 그에 분개했던 죠미니는 러시아군으로 투항해버렸다는 등)
 



 * 란누(Jean lannes)

 앞에서 설명되었음.



                  




 * 루이-가브리엘 슈셰(Louis-Gabriel Suchet, 1770년 3월 2일-1826년 1월 3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1. 成長來歷

 그는 리용의 부유한 견직물 제조업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다른 동료 원수들이 대부분 궁핍하고 괴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별 부자유 없는 생활 속에서 소년시대를 보냈다.
 그는 그 리용에서 학교를 다녔고, 17세가 되자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했으며, 그로인해 가업을 물려받을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2년 후에 혁명이 발발했고, 그러자 그는 혁명에 찬동해서 가업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가서 국민위병대에 투신했다.

 
2. 혁명군의 士官으로서

 
그 후, 그는 곧 인품이 알려져서 중령으로 승진(호선방식-앞에서 설명되었음)했다.
 
그리고 1793년에는 고향인 리용의 반란진압에도 참가했고, 이후 전전하다 툴롱 공위전에서는 보병대대를 인솔했으며, 敵將을 잡는 등 수훈을 올렸다.
 그 툴롱의 싸움은 나폴레옹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던 싸움이었지만, 그러나 그때는 서로가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그 후에도 혁명정부의 모범적인 사관으로서 근무했고, 때로는 반혁명분자들을 단죄하기도 했다.
 1795년에 그는 이탈리아방면 군에 배속되어서 맛세나의 지휘 하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오스트리아군을 자주 물리쳐서 勇名을 날렸다.
 그 후에 그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방면 군사령관으로 취임하자 그에 대해서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장 이외에서 나태하고도 난폭했던 맛세나와의 감정적인 대립이 깊어지자
 그 스스로 나폴레옹에게 접근했다.

 
3. 프랑스 屈指의 師團長

 그는 그때 이미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던 우수한 사단장으로서 충분한 명성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역시도 보통사람들이 가지고 있을만한 그런 야심이나 출세욕구도 있었다.
 그러나 공화파로서의 경력이 문제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맛세나와의 대립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출세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어진 임무는 착실하게 해나갔고, 솔트 원수와 이어서 란누 원수 휘하에서 사단장으로 종군했다.
 그는 또 특히 란누에게서 신뢰를 받아서 아우스트리트 전투와 계속된 독일전쟁에서도 란누의 제5군단이 주력으로 활약했던 만큼, 그 副將격으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1808년부터는 군단마다 스페인전선을 전전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는 쥬노 장군 휘하로 들어가서 제3군단에 소속되었다.

 
4. 스페인 戰線

 그러나 그는 새롭게 모시게 된 그 쥬노를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으로 전출되었던 초기에는 의욕도 없이 실의의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자 그 즈음, 란누도 쥬노보다 그를 더욱 신뢰해서, 그 다음해 사라고사 함락과 함께 스페인을 떠날 때는 그 두 사람을 교대시키도록 나폴레옹에게 진언했다. 그러자 그것이 수용되어서 그는 간신히 염원하던 군단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피폐해있던 군단을 단기간에 고쳐 세웠고, 자신의 수비범위였던 아라곤지방의 안정에 진력했다. (그는 그때 약탈을 엄금했고, 파괴되었던 사라고사를 재건했다. 그리고 현지를 최대한 배려하는 유연성을 발휘해서 그 일을 성공시켰다)




<에브로 강과 사라고사의 석양>

 
 그것은 또 그때 그 스페인전선에서는 아주 예외적이었던 것으로, 그가 그만큼 행정관으로서도 지극히 우수했음을 보여주었던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자 또 그는 적으로부터도 경의가 표해져서, 그때의 敵將 중에서는 그의 새 신부(그는 그때 20세 연하의 스페인에서 데려온 여성과 결혼했던 바로 직후였다)가 살고 있던 숙소는 포격대상에서 제외하도록 지시까지 했던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또 게릴라소탕에도 아주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또 군사적인 성공뿐만이 아니라 스페인인들과 공동으로 소탕작전을 실시하는 등, 현지인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희유의 지휘관 모습을 보여주었던 일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공적으로 원수로 승진했고, 그 후 러시아원정 실패 후의 스페인전선 붕괴 때도 잘 견뎌냈으며, 그러한 것은 나폴레옹이 퇴위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아라곤의 ordesa 계곡>


 5. 백일천하와 그 후

 나폴레옹 실각 후, 그 역시도 일단은 신왕 루이18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이 돌아오자 다시 그에게로 돌아갔다. (네이의 권유로)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를 알프스방면 군총사령관에게 임명했고, 이어서 이탈리아방면과 프랑스본국의 수비를 맡겼다. (그러나 그 인사에는 비판이 많았다)
 그는 사실 참모총장으로서는 솔트보다도 훨씬 적임이었으며, 또 전선지휘관으로서도 그 능력은 주전장이었던 서부전선 쪽이었어야만 했었다. 그러자 나폴레옹도 그에 대해서 나중에 <그루시가 아니라 그를 임명했었더라면 워털루에서 이겼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아무튼, 그는 알프스방면으로 가서도 활약했지만, 그러나 그 도중에 워털루의 패보가 도착하자 항복했다. 그리고 그는 왕정복고 후에는 네이의 도망을 도와주려다가 일시 추방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곧 명예회복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공직을 맡는 일없이 평온하게 생애를 끝냈다. 그러자 사라고사의 시민들은 그를 위해서 추도의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6. 인물상

 St Helena에서 나폴레옹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휘하에서 가장 뛰어났던 지휘관은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에 <어려운 질문이지만, 내가 보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슈셰일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만약 그가 두 명이었더라면, 아마도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평정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평도 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세상살이가 서툴렀던 탓에 승진이 늦어지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전술지휘관으로서의 그 역량은 다브나 맛세나와 동등했고, 또 조직의 관리자나 통솔자 또는 民政家로서는 동료들에 비견할 수 없었을 정도로 수완을 가지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또 그런 면에서 사람에 따라서는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에서는 최우수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거기다 또 그는 인품도 온화했던 데다가 병사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었기 때문에(그러나 그 역시도 사관들에게는 어렵게 대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나폴레옹이 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시켜주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하는 아쉬움도 남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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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아라곤의 Teruel 대성당>



 * 니콜라 샤를 우디노(Nicolas Charles Oudinot, 1767년 4월 25일-1847년 9월 13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루지오 공작.
 
1808년 7월 2일, 제국 백작.
 에슬링 및 바그람 전투의 공으로 1809년 7월 12일에 제국 원수로 승진.
 제국민 전쟁에서는 베를린 공략을 맡았지만, 그로스베렌의 싸움에서 패배해서 실패했다.
 복고왕정 하에서는 근위대 소장.
 1823년의 스페인 간섭 때는 제1군단 사령관으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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