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2  나폴레옹麾下의 元帥들



 * 프랑수와 죠제프 르페브르(Francois Joseph Lefebvre)

 1755년 10월 25일-1820년 9월 14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제국 원수.

                       

 <생애>

 그는 Haut-Rhin(프랑스서부 알자스 지역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경기병연대 소속 평민 군인이었다.
 그는 18세에 프랑스 근위병연대에 입대했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공화파였던 그는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전장에서 수많은 활약을 했고, 그로써 1794년에 장군으로 승진했다.
 그리고는 몇 개의 군단에서 전위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이후 이집트원정에서 급거 귀국했던 나폴레옹과 만났고
 곧바로 그에 매료되어서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00년 4월 1일에 그는 원로원의 의원으로 지명되었다.
 그리고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제국 원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레지 온 드누르훈장을 받았다.


                 



 1807년 1월 23일, 그는 단치히(現그다니스크 또는 그단스크-폴란드 령 항만도시) 공략을 명받았다.
 그 작전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5월 19일에 기어이 그곳을 함락했다.
 그 공적으로부터 또 그는 단치히 공작의 칭호가 주어졌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베스트팔렌왕국의 왕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그는 아내와의 협의 끝에 <자신의 신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그것을 거절했다.
 이후, 그는 1808년의 스페인원정과 오스트리아원정에서 종군했고, 각지를 전전했다.
 그리고 1812년, 러시아원정에서는 노친위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서 보로디노 전투에 참가했으며
 퇴각 전에서는 부대의 선두에 섰다.
 그 이후 그는 1814년의 프랑스전쟁 끝까지 전전했지만
 그러나 4월 4일 더 이상의 항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나폴레옹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왕정복고 후 루이18세는 그를 프랑스 귀족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하자 변함없이 충성했다.
 (그러나 그때는 고령이었기 때문에 직위는 없었다)
 그 후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루이18세가 다시 파리로 돌아오자 그의 귀족신분은 중지되었다.
 (그러나 원수 位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1819년 3월 5일, 그는 다시 귀족신분을 회복했다.
 그리고는 1820년, 65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 쟌-바티스트 죠단(Jean-Baptiste Jourdan)

 1762년 4월 29일-1833년 11월 23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전쟁 기의 군인. 제국 원수.


                        


 그는 1762년 外科醫의 아들로 리모쥬(Limoges-프랑스중부에 있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 Limoges >


 1788년 그는 일병졸로서 도미해서 미국독립전쟁에 참가했다.
 1804년 그는 원수의 대열에 올랐다.
 1811년 그는 마드리드 총독이 되었다.
 1813년 그는 빅토리아 전쟁에서 영국의 Wellington에게 대패했고, 이어서 본국으로 소환된 후 퇴역했다.
 영화 <전장을 달리는 여자>에서는 그와 그의 아내의 로맨스가 묘사되었다.



 * 쟌-바티스트 베시에이르(Jean-Baptiste Bessieres)

 1768년 8월 6일-1813년 5월 1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전쟁 기의 군인. 제국 원수. 뮤라의 친구.
 
뮤라와 란누가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로리누와의 결혼을 둘러싸고 경쟁하고 있었을 때
 그는 뮤라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생애>

 그는 남 프랑스의 카오르(Cahors-프랑스남부 피레네 지역권에 있는 도시) 근교에서 태어났다.




<Cahors의 심벌에 해당하는 Valentre 다리> 

 
 그는 처음에는 동부 피레네軍에 소속된 후, 1796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원정 시에 그의 지휘 하로 들어갔다. 그는 이집트 원정에도 참가했고, 이후 나폴레옹과 함께 유럽으로 돌아와서 마렌고 전투에서는 기병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1804년에 원수로 임명되었지만, 그 인사는 평판이 매우 나빴다.<그때, 마르몬은 “베시에이르가 원수라면, 이 지구상의 인간들은 모두가 다 원수가 될 수 있다”라고 혹평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의 냉정하고도 용감한 자질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1805년부터 1807년까지의 전쟁(아우스트리트, 예나 아우어슈테트, 아이라우 전투 등)에서 친위기병을 지휘했다. 그 후, 그는 반도전쟁에도 참가했고, 메디나델리오세코 싸움에서는 단독으로 승리했다.



<Battle of Medina del Rio Seco>


 1809년에는 대육군에 복귀했고, 이어서 아스페른 에슬링 전투와 바그람 전투 등에 참전했다.
 그 결과로 동년, 그는 이스트리아公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또 그 후, 스페인전선으로 돌아가서 맛세나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귀환되었고, 보로디노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는 또 모스크바 퇴각 전에도 참가했고
 이어서 1813년 5월 2일에 행해졌던 뤼헬전투 바로 전날에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가 죽었을 때, 나폴레옹은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 기욤(길라움) 마리-안 브류누(프랑스 명:Guillaume Marie-Anne Brune)

 1763년 3월 13일-1815년 8월 2일
 프랑스 제1제정기에 활약했던 군인·정치가. 원수.
 나폴레옹1세에 의해서 임명된 26명의 원수 중 1명.


                 



 <약력>

 1789년 국민군대위.
 1797년 여단장 승진.
 제2차 이탈리아 원정 후, 주 터키대사로 취임.
 對영국戰을 위한 교섭을 담당했다.
 1804년 원수의 대열 합류했다.
 1815년 백일천하 뒤, 아비뇽 방문 중에 왕당파가 던진 폭탄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아비뇽>



 * 본 아드리안 쟈노 드 몬세이(Bon Adrien Jeannot de Moncey)

 1754년 7월 31일-1842년 4월 20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전쟁 기의 군인. 제국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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