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행해서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에 '영국'에 대한 대항책으로 '대륙봉쇄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프로이센'을 포함한 '유럽대륙 제국(諸國)'에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시켰고
그것으로 '영국'을 경제적인 곤궁에 빠뜨리는 것과 동시에 '프랑스시장'을 넓히려고 획책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산업혁명' 후의 '영국제품'을 수입하고 있던 '諸國'이나 '프랑스민중'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 대륙봉쇄령(앞장에서 개요는 설명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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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위>
1806년 11월 21일에 발령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국민들과 동맹국들과의 알력(軋轢)을 낳았고, 오히려 '나폴레옹'에 대한 적개심만 강하게 하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그때 '프랑스'에 종속되었던 '유럽제국'이나 '북유럽'은 '대륙봉쇄'의 참가를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풍부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과 통상을 할 수 없게 되자 곧 경제적인 곤궁에 처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반대로 '영국'은 '프랑스'를 봉쇄하기 위해서 '해상봉쇄'를 하고 나왔는데,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당초 중립을 선언했던 '미국'과 이해가 대립해서, 결국 1812년에 '미국과 영국'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 영미전쟁(또는 미영전쟁-War of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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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6월~1814년 12월, 영국 및 그 식민지였던 캐나다와 영국과 동맹을 맺었던 인디언 제(諸)부족들과 아메리카 합중국 사이에서 행해졌던 전쟁이었으며 <1812년 전쟁> <미국-영국 전쟁> <제2차 독립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캐나다, 미국 동해안, 미국남부, 대서양, 이리(Erie)호, 온타리오湖 등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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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영국 측'도 상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그로인해서 점차로 불황을 맞게 되었고, 또 바다 위에서는 '프랑스'의 사략선<私掠船-전쟁상태에 있는 일국(一國)의 정부로부터, 그 적국의 배를 공격해서 그 배나 화물을 빼앗을 수 있는 허가 또는 면허를 받은 개인의 배>들이 암약해서 상선들이 마구 약탈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영국 국내'에서도 폭동이 일어났었다거나, 수상이었던 '스펜서 퍼시벌'이 암살되기도 했으며, 왕 '죠지3세(George III)'의 발광(發狂)에다, 그에 더해서 '미국'과의 전쟁 등, 위 <영국사상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는 때를 '영국'은 그때 맞이해야만 했던 것이다.
** 스펜서 퍼시벌(Spencer Perceval) 1762년 11월 1일~1812년 5월 11일
영국의 정치가. 영국사상 유일하게 암살되었던 수상(나머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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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왕 죠지3세(George III, 1738년 6월 4일-1820년 1월 29일)
(본 내용과 크게 관계가 없으므로, 간단한 소개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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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그로인해서 '프랑스'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보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 동맹국들은 '영국'의 불황으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그 혜택을 받지 못해서 불만이나 불평들을 토로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대륙봉쇄령'은 '유럽'에서는 매우 인기가 없었으며, 또 '반 나폴레옹 정책'을 취했던 '스웨덴'이 그때 특히 거부했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러시아제국'을 부추겨서 '스웨덴'을 굴복시키는 것으로 '대륙봉쇄령'에 참가시켰다.
하지만 그 후에도 배반하는 나라는 이어졌고, 급기야는 '포르투갈'마저 협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그 시점에 '이베리아반도'로의 파병을 결단했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스페인'의 정쟁(政爭)에 어쩔 수 없이 개입하게 되었고, 이어서 '이베리아반도전쟁'의 수렁으로 다시 발을 넣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때까지는 관망만 하고 있던 '러시아'가 '대륙봉쇄'의 실상을 간파하고는 그것을 깨고 1810년 '영국'과의 통상을 재개했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1세'는 그 법령을 깬 '러시아'를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 '러시아원정(1812년)'을 강행했지만, 그러나 '러시아 측'의 '초토(焦土)작전' 등에 말려서 대패했고, 이후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로 치닫게 된다.
<평가>
'대륙봉쇄'는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1. 그것은 '영국'을 대신한 '프랑스산업'의 '대륙시장독점목적'에 기인했던 것으로, 군사지배와 관련해서 '프랑스'의 '종속정책'에 대해서 '제 국가'들의 불만이 강해질 수 있었다는 점.
2. 그리고 당시 '영국'만큼 기계화가 진행되지는 않고 있었던 '프랑스 산업'으로서는 '영국'에 대신할만한 역할의 완수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는 점.
3. 그리고 또, 대륙의 '諸 국가'는 무역을 기반으로 하는 '네덜란드'나 '한자도시' 그리고 농업국이었던 '러시아'와 '프로이센' '이탈리아' '스페인' 등과 공업이 비교적 발달했던 '서남독일' 등등, 다양한 국민경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나라들은 '영국'과의 무역을 배제하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는 점 등이었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볼 때, 1806년 이후의 '나폴레옹전쟁'은 모두 그 '대륙봉쇄령'과 관련되어 있었다.
즉 '영국'과의 무역을 저지하려면 '유럽제국'들을 전력(全力) 적으로 '대륙봉쇄령'에 협력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전략에 따라서 또 '독일'이나 '로마' 그리고 '이베리아반도' '러시아' 등의 제국들에 '대육군'이 침공할 수도 있는 일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전쟁'의 일면(一面)에는 그와 같은 경제적인 요인도 관련되어 있어서, 그래서 그것은 단순히 '나폴레옹' 자신의 '유럽정복'의 야심만으로 행해졌던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결과 '나폴레옹'은 그러한 논리의 귀결로서 제국의 확장에 전력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리고 또 그 결과로 '대륙봉쇄령'과 거기에 수반되었던 '영국'에의 확집(確執)이 '나폴레옹' 자신의 몰락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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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혁명(産業革命-Industrial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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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 일어났던 공장제기계공업의 도입에 의한
산업의 변혁과 거기에 따르는 사회구조의 변혁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시민혁명'과 함께 근대의 개막을 예고했던 사건으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근래에는 산업혁명에 대신해서 단순히 <공업화>라고 하는 견해가 많다.
다만 영국의 사례에 대해서는 최초의 공업화였던 것을 세계사적 의의로 해서
현재에도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자료가 많으므로, 이하 개요만 간단히 서술함)
<1814년 당시의 광부 모습><개요>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1837년 ‘루이 오귀스트 브랑키’에 의해서였다.
그 후, 1844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년 11월 28일~1895년 8월 5일-설명은 생략)’’에 의해서 퍼지게 되었고, 이어서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52년 8월 28일~1883년 3월 9일-설명은 생략)’가 그의 저작 안에 사용했던 것으로부터 학술용어로 정착했다.
원래 그것은 1760년대부터 1830년대에 걸쳐서 영국에서 일어났었던 '최초의산업혁명'을 가리켰던 말이었지만, 그러나 이른바 ‘발전단계론’에 의해서 산업혁명은 시민혁명과 함께 근대와 그 이전을 나누는 분수령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래서 영국을 시작으로 해서 벨기에, 프랑스, 미국, 독일, 일본이라고 하는 식으로
차례차례로 각국에서도 산업혁명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던 요인으로서는 원료공급지 및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존재
또는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에 의한 사회, 경제적인 환경정비와
축적된 자본내지 자금조달이 용이했던 환경 및 농업혁명에 의해서 초래되었던 노동력 등을 들 수가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조건의 상당수는 당시의 프랑스라고 뒤질 것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 유일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식민지의 유무에 있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176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여겨지지만, 7년전쟁이 종결되고
미국과 인도에 있어서의 영국의 프랑스에 대한 우위가 결정지어졌던 것은
1763년의 파리조약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또 식민지 그 자체는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1763년의 시점에서 영국이 시장과 원료공급지를 얻었다기보다는
프랑스가 산업혁명에 맨 앞장을 서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시장과 원료공급지를 잃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영국은 라이벌이었던 프랑스에 앞서서 산업혁명을 개시했고
그리고는 프랑스에 한정하지 않고 일체화되어있었던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바꾸어 말하자면 7년전쟁의 승리로 인해서 영국은 근대적인 세계시스템에 있어서의 헤게모니(독:Hegemonie-주도권)국가의 지위를 결정지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랬던 영국의 산업혁명은 1760년대부터 1830년대까지라고 하는 비교적 긴 기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서유럽지역에서는 ‘플로트 공업화’ 라고 불리던 기술적인 혁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또 그 때문에 영국의 '산업혁명'과 같이 장기적이고도 완만했으며 또한 유일하지도 않았던 그 진보가 과연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가 라고 하는 논의도 있다.
그리고 또, 초기의 경공업중심 시기를 '제1차 산업혁명' 그리고 전기, 석유에 의한 중화학공업으로 이행한 이후를 '제2차 산업혁명' 그리고 또 원자력에너지를 이용하고 있는 현대를 '제3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입장도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기술형태에 중점을 둔 산업혁명에 대한 견해로서는 '산업혁명 부재설(不在說)'에 대한 유력한 반론은 나오기가 어렵다고 보이는 것이다. 그 때문에 또 현재에는 산업의 변화와 거기에 따르는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는 <혁명>이라고 할 만큼의 급격한 변화는 아니라고 하는 관점에서
단순히 <공업화>라는 말도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영국의 사례에 대해서는 여전히 <산업혁명>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래서 또 아무튼, 영국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노동자계급의 성립과 중류계급의 성장 및
지주귀족계급의 성숙에 의한 3계급의 구조 확립이나 소비사회의 정착 등
1760년대부터 1830년대라고 하는 '산업혁명기' 사이에 큰 사회적 변화를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세계사적인 관심에서 보게 되면 최초의 공업화인 영국 산업혁명 기에
노예무역을 포함한 무역의 확대나, 현재까지 이어지는 국제 분업체제의 확립이라고 하는
지구(地球) 규모로의 대변화가 시작되었던 때였다고도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세계규모로의 영향(負擔의 측면도 포함해서)은 선행했던 플로트 공업화 등에서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 산업혁명은 단순한 기술상의 변화로서가 아니고, 또 일국(一國)단위의 사건으로서도 아니고
보다 넓은 견지로부터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이하 생략-좀 더 자세한 것은 차기로 미루거나 생략함)
** 루이 오귀스트 브랑키(Louis Auguste Blanqui. 1805년 2월 1일~1881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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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혁명가.
19세기 프랑스의 대부분의 혁명에 참가했고, 33년이나 수감되었다.
카르보나리당원이기도 했으며, 많은 비밀결사나 음모에 관련했다.
형이 경제학자 브랑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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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폴레옹'은 남은 강적 '러시아'를 발판으로 해서 '프로이센 왕'을 쫓아냈고
그리고는 '폴란드'에서 '프러시아연합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런데 거기서 '나폴레옹'은 젊고 아름다웠던 '폴란드귀족'의 부인이었던
‘마리아 바레후스카’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곧 '나폴레옹'의 애인이 되었고
나중에 '나폴레옹'의 서자(庶子) ‘아렉산들 바레후스키’를 생산하게 된다.
* 마리아 바레후스카(Maria Walewska: 프-Marie Walewska) 1786년 12월 7일~1817년 12월 11일
나폴레옹1세의 애인으로 알려진 여성이며, 처음에는 폴란드의 명문귀족 ‘바레후스키 백작’의 아내였다.
그리고 후술 되겠지만, 나폴레옹에게서는 의리의 애인이었으며,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무척이나 현명하고 온후한 성품에다 다정다감했던 여성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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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렉산들 바레후스키
1810년 5월 4일~1868년 10월 27일
프랑스 제2제정의 정치가, 귀족. 나폴레옹의 서자(庶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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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807년 2월의 '아이라우 전투'와 6월의 '하이르스베르크 전투'는 맹설(猛雪)과 정보누설 등으로 고전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 측'에서는 비록 이긴 전쟁이었다고는 했지만, 그러나 그때 잃었던 군사들이 너무도 많았던 때문으로 '프랑스군'으로서는 뼈 아팠던 결과였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동년 6월의 '프리틀란트 싸움'에서 '나폴레옹 군'은 보기 좋게 대승했고, 그로 인해 '틸지트 조약'도 체결되었으며,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보다 지리적으로 멀리까지 원정 왔었어도 선전했던 '러시아'에까지 '대륙봉쇄령'에 참가시키기 위해서 강화도 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프로이센'의 입장에서는 49%나 되던 영토를 빼앗기고도 소국으로 전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해서 고액의 배상금까지 '프랑스'에 지불해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폴란드' 땅에 '바르샤바공국'과 '베스트파렌왕국'이란 '프랑스'의 괴뢰국가도 탄생되었으며
그에 더해서 '베스트파렌 왕'에는 '나폴레옹'의 남동생이었던 '제롬'까지 앉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스웨덴'에도 '베르나도트'를 왕위계승자로 보냈으며, 그 '베르나도트'는 1818년에 즉위 해서
'스웨덴 왕 칼14세 요한'이 되었다. (그 스웨덴왕가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앞에서 설명 되었음)
하지만 그 '베르나도트'는 개인적으로 '나폴레옹'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래서 서로 간의 결속 면에서는 약했던 상태였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덴마크'는 '영국'의 위협이 무서워서 부득이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가졌던 정도였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전쟁'이 끝났을 때까지 그 동맹관계를 파기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폴레옹'의 세력은 '영국'과 '스웨덴'을 제외한 유럽 전 국토에 미치게 되었고
이어서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폴란드'는 '프랑스제국'의 속국(屬國)이 되었으며
그리고 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종속적인 동맹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나폴레옹의 절정기>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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