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生涯

 1.7  滅亡으로




 
           <1808년5월3일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의 학살-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3rd May 1808 = 고야>
 ※
고야는 프랑스군에 의한 시민의 학살을 이 그림으로 격렬하게 비난했다

 


 * 半島戰爭(1808년~1814년)
 
 영:Peninsular War(반도전쟁)
 스:Guerra de la Independencia Espanola(스페인 독립전쟁)
 포:Guerra Peninsular(반도 전쟁)
 불:Guerre d'Espagne(스페인 전쟁)
 카타르냐:Guerra
del Frances(프랑스 전쟁)




                          <1808년 5월 2일 맘르크(노예병)들의 공격-고야작(1814년)>



 그러자 11월 29일에 포르투갈 왕비 외 섭정과 6000명이(함대소속 9000명의 선원 포함) 도망을 갔고
 그것은 '죠안' 왕자에게 브라질을 포함한 해외식민지의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그 일은 나폴레옹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는데, 그래서 나중에 '세인트헬레나 섬'의 기념비에
 <그것이 나를 멸망케 했다(C'est ca qui m'a perdu)>라는 기록까지 남겨지게 했다.

 아무튼, 프랑스와 스페인군의 포르투갈 점령을 위해서 나폴레옹은 군을 스페인의 요충지에 파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팜프로나’와 ‘바르셀로나’가 1808년 2월에 점령되었다.



 ** 팜프로나(Pamplona-바스크 어:이루냐 또는 이루나)




<산·페르민 축제의 광경. 구시가에 고층주택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 바르셀로나(Barcelona)






 그리고 또 그 사이에 스페인에서는 귀족의 정변으로 '카를로스 4세'가 퇴위되었고
 그 대신으로 '페르난도' 왕자가 '페르난도 7세'로 즉위했다.



 ** 카를로스4세(Carlos IV, 1748년 11월 11일~1819년 1월 20일)

 부르봉(보르본)朝의 스페인 왕
 (재위:1788년 12월 14일~1808년 3월 19일)

 





 ** 페르난도7세(Fernando VII, 1784년 10월 14일~1833년 9월 29일)

 스페인 국왕
 (재위:1808년, 1813년~1833년)





 그러자 나폴레옹은 스페인 王家를 바이욘느(Bayonne-프랑스 남서부 하단)로 추방했고
 스페인의 왕위를 자신의 형 '죠제프'에게 주었다. 그러자 스페인의 괴뢰의회는 그 新王을 승인했다.

 '죠제프'는 스페인 왕 ‘호세1세’로 개명하고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통치를 강화하려했다.
 그러자 프랑스인의 지배를 싫어했던 인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5월 2일, 마드리드시민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대해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그러나 '뮤라'에 의해서 곧 진압되었다.

 
아무튼, 그때까지 영국은 미숙한 군사작전으로 인한 실수와 잇따른 패전으로
 (1809년의 와르히렌 원정을 마지막으로)인해서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있었다.
 
그것은 또 강력한 동맹국 없이 단독으로 프랑스와 대적하는 것이 영국으로서는 힘에 부쳤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영국의 고립은 당분간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런 이유로 해서 포르투갈도 對 나폴레옹전쟁에서 영국의 지원을 거부했다.

 
그런 한편, 스페인군은 5월 19일부터 21일에 걸쳤던 ‘바이레인의 싸움’에서
 ‘피에르 듀퐁’ 지휘의 프랑스군을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어서 15000명 이상의 포로를 잡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또, 6월 18일에는 포르투갈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의 반란은 영국으로 하여금 다시 군사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고, 그리고는 이어서 ‘처음으로(최초의) 왕후(王侯)나 귀족이 아닌 평민에 의한 <거대 침략자>에 대한 반란’이라는 영국의 선전(宣傳)에 힘입어서, 상황은 또 곧 바로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반도전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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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화 2011-04-16 06:43   좋아요 0 | URL
추천해주신 분께, 감사인사 올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1 生涯

 1.7  滅亡으로


 

              

            <1808년5월3일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의 학살-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3rd May 1808 = 고야>
           


 1808년 5월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부르봉朝' 내분에 개입했고
 이어서 '나폴리 왕'으로 앉혀두었던 형 '죠제프'를 이번에는 그 '스페인 왕'의 자리에 앉혔다.

 


 * 부르봉家(Maison de Bourbon)

 유럽의 왕가로 프랑스王家 카페家 지류(支流)의 하나이다.
 현재의 스페인 왕가이며, 현재의 룩셈부르크대공가도 부계에서는 부르봉가의 계보를 이어받았다.
 Bourbon의 어원은 켈트족어로 진흙(Borvo, 혹은 Borbo)이란 의미를 가진다.

 


 ** 카페家(Capetiens)

 

 프랑스의 파리주변, 일-드-프랑스(프: Ile-de-France)에 기원을 둔 왕가이다.

 2명의 西프랭크 왕을 냈던 로베르家의 후신(後身)이다.

 가명(家名)은 시조였던 ‘유()그 카페’에서 유래하지만
 카페(capet) 라는 것은 짧은 외투(케이프)로
 원래는 ‘유그’에 붙었던 별명이었다.
 카페가는 프랑스왕가가 되었던 외에도, 그 분가로부터 많은 유럽제국의 군주 가계가 나왔다.
                                   



 ** 켈트족 語派(Celtic Languages)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하는 어파의 하나이다.
 원래는 유럽에 넓게 퍼져있던 켈트족의 언어를 말했던 것이었지만, 로마인과 게르만족에 쫓겨나서 현재는 아일랜드와 영국 또는 프랑스의 일부지역에만 남아있는 소수언어가 되었다. 이탤릭 어파와는 다소 공통점이 있고, 또 어휘에서는 게르만 어파와 일치하기도 한다.


 *** 유()그 카페(Hugues Capet)

 938년부터 940년경-996년 10월 24일
 카페朝 초대 프랑스 왕

                                

 그러나 그로인해서 '스페인'의 반발은 격렬해져서 '반도전쟁'(1808년-1814년)이 일어났고
 봉기했던 민중들의 복병들에 의한 저항으로 '프랑스군'은 고전했다.(‘게릴라’ 라는 말은 이때에 생겼다)
  


 * 半島戰爭(1808년~1814년)

  영:Peninsular War(반도전쟁)
 스:Guerra de la Independencia Espanola(스페인 독립전쟁)
 포:Guerra Peninsular(반도 전쟁)
 불:Guerre d'Espagne(스페인 전쟁)
 카타르냐:Guerra
del Frances(프랑스 전쟁)

                       

                           <1808년 5월 2일 맘르크(노예병)들의 공격-고야작(1814년)>


 나폴레옹전쟁 중에 이베리아반도에서 스페인군, 포르투갈군, 영국군이 모두 프랑스제국군에 맞서서 싸웠던 대 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해머(hammer)와 철침(鐵砧-모루)>의 전쟁으로 비교되고 있다.
 즉, 해머란 웰링턴(Wellington)공이 이끌었던 4만에서 8만의 군세였던 영포(英葡)군이었으며, 거기에 대해 철침은 스페인군과 게릴라와 포르투갈 민병군에 의해 프랑스군이 타격을 받았던 전쟁이었다.


 ** 웰링턴公(初代 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 1769년 4월 30일~1852년 9월 14일)


 영국의 군인, 정치가. 외무대신을 지냈던 ‘리처드 웰즈리’는 형.
 나폴레옹과의 싸움에서 군공을 거듭했고, 최종적으로 워털루 싸움에서 이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칭은 <철의 공작(Iron Duke)>, 후에 수상이 된다.
 애마(愛馬)는 코펜하겐.(이하, 생략)

                                                                    


 이 전쟁은 당시, 이베리아반도의 성질에 의해서 크게 좌우되었는데, 토지가 크게 부족했던 이베리아반도에서는 대군이 침공을 했어도 그곳의 식료(食料)가 부족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최고조에는 3만이란 병력까지 투입했었지만, 그러나 군을 집결시킬 장소가 마땅치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소부대에 의한 몇 군데의 지역에서 한정된 기간으로 전투를 치러야만 했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전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사회적, 경제적인 구조를 파괴해서 1850년까지 계속되었던 대내전(大內戰)과 함께 반도전쟁으로 훈련되었던 장교들에게 이끌려서 미쳐 날뛰게 되는 해방시대의 전조가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또, 그로인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전쟁의 경위>

 
1. 대륙봉쇄령

 
1806년, 나폴레옹1세는 대륙제국에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을 금지한다는 대륙봉쇄령을 베를린에서 선언했다. 그러나 그때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던 두 나라(스웨덴과 포르투갈)는 나폴레옹의 선언에 따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1807년의 틸지트 조약이 체결된 뒤, 스웨덴은 러시아와 다투게 되었고, 그때는 또 동쪽의 문제도 해결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베리아반도의 항구공략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1807년 11월, 대륙 동맹 참가에 대해서 난색을 표했던 섭정(攝政) 죠안 왕자(나중에 죠안6세)의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침략의 임무를 받았던) ‘쟌-안드슈 쥬노’ 지휘하의 육군을 스페인으로 보내게 되었다.


 ** 죠안 왕자(나중에 죠안6세-Joao VI)

 1767년 3월 13일~1826년 3월 10일
 포르투갈 왕. 재위:1816년~1826년


                                   


 ** 쟌-안드슈 쥬노(Jean-Andoche Junot, Duc d'Abrantes) 1771년 10월 23일~1813년 7월 29일

 프랑스 혁명기부터 나폴레옹 전쟁기의 프랑스 군인.
 나폴레옹 숭배자로,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츠아로부터도 <나의 6번째의 아들>로 사랑받았다.

                                    


 그리고 또 그와 같은 시기에 '스페인'의 수상 ‘고도이’가 '나폴레옹'의 위임을 받아서 ‘듀퐁 장군’을 카디스(Cadiz-스페인 서부 항만도시)방면으로 보냈고, 솔트 장군도 코르나 방면으로 떠났다.


 ** 카디스(Cadiz) 스페인 서부 항만도시

 

                                               


 ** 코르나(그:A Coruna, 스:La Coruna)

 스페인 북서부의 대서양에 접한 항만도시

                       

 그러자 스페인의 2개 사단은 대립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점령하기 위해서 당시 함대탈취를 목표로 하고 있었던 프랑스군과 합류했다. 그리고 이어서 리스본(Lisbon)은 포르투갈 육군이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항만과 해안을 지키는 데만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 군사적 저항 없이 12월 1일에 공략되었다.

                      

                                    

                                                        <리스본 위치도>

 

 


 

 <반도전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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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6  絶頂期

 


<엘베 강을 건너가는 나폴레옹>




 병행해서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에 '영국'에 대한 대항책으로 '대륙봉쇄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프로이센'을 포함한 '유럽대륙 제국(諸國)'에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시켰고
 그것으로 '영국'을 경제적인 곤궁에 빠뜨리는 것과 동시에 '프랑스시장'을 넓히려고 획책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산업혁명' 후의 '영국제품'을 수입하고 있던 '諸國'이나 '프랑스민중'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 대륙봉쇄령(앞장에서 개요는 설명되었음)

 <경위>

 1806년 11월 21일에 발령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국민들과 동맹국들과의 알력(軋轢)을 낳았고, 오히려 '나폴레옹'에 대한 적개심만 강하게 하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그때 '프랑스'에 종속되었던 '유럽제국'이나 '북유럽'은 '대륙봉쇄'의 참가를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풍부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과 통상을 할 수 없게 되자 곧 경제적인 곤궁에 처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반대로 '영국'은 '프랑스'를 봉쇄하기 위해서 '해상봉쇄'를 하고 나왔는데,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당초 중립을 선언했던 '미국'과 이해가 대립해서, 결국 1812년에 '미국과 영국'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 영미전쟁(또는 미영전쟁-War of 1812)

 1812년 6월~1814년 12월, 영국 및 그 식민지였던 캐나다와 영국과 동맹을 맺었던 인디언 제(諸)부족들과 아메리카 합중국 사이에서 행해졌던 전쟁이었으며 
<1812년 전쟁> <미국-영국 전쟁> <제2차 독립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캐나다, 미국 동해안, 미국남부, 대서양, 이리(Erie)호, 온타리오湖 등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또 '영국 측'도 상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그로인해서 점차로 불황을 맞게 되었고, 또 바다 위에서는 '프랑스'의 사략선<私掠船-전쟁상태에 있는 일국(一國)의 정부로부터, 그 적국의 배를 공격해서 그 배나 화물을 빼앗을 수 있는 허가 또는 면허를 받은 개인의 배>들이 암약해서 상선들이 마구 약탈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영국 국내'에서도 폭동이 일어났었다거나, 수상이었던 '스펜서 퍼시벌'이 암살되기도 했으며, 왕 '죠지3세(George III)'의 발광(發狂)에다, 그에 더해서 '미국'과의 전쟁 등, 위 <영국사상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는 때를 '영국'은 그때 맞이해야만 했던 것이다.

 


 ** 스펜서 퍼시벌(Spencer Perceval) 1762년 11월 1일~1812년 5월 11일


 영국의 정치가. 영국사상 유일하게 암살되었던 수상(나머지 생략)


                                   


** 국왕 죠지3세(George III, 1738년 6월 4일-1820년 1월 29일)

                                   


(본 내용과 크게 관계가 없으므로, 간단한 소개만 함)
                                   

                       
 그리고 또, 그로인해서 '프랑스'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보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 동맹국들은 '영국'의 불황으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그 혜택을 받지 못해서 불만이나 불평들을 토로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대륙봉쇄령'은 '유럽'에서는 매우 인기가 없었으며, 또 '반 나폴레옹 정책'을 취했던 '스웨덴'이 그때 특히 거부했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러시아제국'을 부추겨서 '스웨덴'을 굴복시키는 것으로 '대륙봉쇄령'에 참가시켰다.

 
하지만 그 후에도 배반하는 나라는 이어졌고, 급기야는 '포르투갈'마저 협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그 시점에 '이베리아반도'로의 파병을 결단했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스페인'의 정쟁(政爭)에 어쩔 수 없이 개입하게 되었고, 이어서 '이베리아반도전쟁'의 수렁으로 다시 발을 넣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때까지는 관망만 하고 있던 '러시아'가 '대륙봉쇄'의 실상을 간파하고는 그것을 깨고 1810년 '영국'과의 통상을 재개했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1세'는 그 법령을 깬 '러시아'를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 '러시아원정(1812년)'을 강행했지만, 그러나 '러시아 측'의 '초토(焦土)작전' 등에 말려서 대패했고, 이후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로 치닫게 된다.

 <평가>

 '대륙봉쇄'는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1. 그것은 '영국'을 대신한 '프랑스산업'의 '대륙시장독점목적'에 기인했던 것으로, 군사지배와 관련해서 '프랑스'의 '종속정책'에 대해서 '제 국가'들의 불만이 강해질 수 있었다는 점.

 2. 그리고 당시 '영국'만큼 기계화가 진행되지는 않고 있었던 '프랑스 산업'으로서는 '영국'에 대신할만한 역할의 완수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는 점.

 3. 그리고 또, 대륙의 '諸 국가'는 무역을 기반으로 하는 '네덜란드'나 '한자도시' 그리고 농업국이었던 '러시아'와 '프로이센' '이탈리아' '스페인' 등과 공업이 비교적 발달했던 '서남독일' 등등, 다양한 국민경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나라들은 '영국'과의 무역을 배제하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는 점 등이었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볼 때, 1806년 이후의 '나폴레옹전쟁'은 모두 그 '대륙봉쇄령'과 관련되어 있었다.
 즉 '영국'과의 무역을 저지하려면 '유럽제국'들을 전력(全力) 적으로 '대륙봉쇄령'에 협력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전략에 따라서 또 '독일'이나 '로마' 그리고 '이베리아반도' '러시아' 등의 제국들에 '대육군'이 침공할 수도 있는 일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전쟁'의 일면(一面)에는 그와 같은 경제적인 요인도 관련되어 있어서, 그래서 그것은 단순히 '나폴레옹' 자신의 '유럽정복'의 야심만으로 행해졌던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결과 '나폴레옹'은 그러한 논리의 귀결로서 제국의 확장에 전력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리고 또 그 결과로 '대륙봉쇄령'과 거기에 수반되었던 '영국'에의 확집(確執)이 '나폴레옹' 자신의 몰락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었던 것이다.

                         

           


   * 산업혁명(産業革命-Industrial Revolution)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 일어났던 공장제기계공업의 도입에 의한
산업의 변혁과 거기에 따르는 사회구조의 변혁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
시민혁명'과 함께 근대의 개막을 예고했던 사건으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근래에는 산업혁명에 대신해서 단순히 <공업화>라고 하는 견해가 많다.
다만 영국의 사례에 대해서는 최초의 공업화였던 것을 세계사적 의의로 해서
현재에도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자료가 많으므로, 이하 개요만 간단히 서술함)


<1814년 당시의 광부 모습>

<개요>

 '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1837년 ‘루이 오귀스트 브랑키’에 의해서였다.
그 후, 1844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년 11월 28일~1895년 8월 5일-설명은 생략)’’에 의해서 퍼지게 되었고, 이어서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52년 8월 28일~1883년 3월 9일-설명은 생략)’가 그의 저작 안에 사용했던 것으로부터 학술용어로 정착했다.

 원래 그것은 1760년대부터 1830년대에 걸쳐서 영국에서 일어났었던 '최초의산업혁명'을 가리켰던 말이었지만, 그러나 이른바 ‘발전단계론’에 의해서 산업혁명은 시민혁명과 함께 근대와 그 이전을 나누는 분수령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래서 영국을 시작으로 해서 벨기에, 프랑스, 미국, 독일, 일본이라고 하는 식으로
차례차례로 각국에서도 산업혁명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던 요인으로서는 원료공급지 및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존재
또는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에 의한 사회, 경제적인 환경정비와
축적된 자본내지 자금조달이 용이했던 환경 및 농업혁명에 의해서 초래되었던 노동력 등을 들 수가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조건의 상당수는 당시의 프랑스라고 뒤질 것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 유일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식민지의 유무에 있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176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여겨지지만, 7년전쟁이 종결되고
미국과 인도에 있어서의 영국의 프랑스에 대한 우위가 결정지어졌던 것은
1763년의 파리조약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또 식민지 그 자체는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1763년의 시점에서 영국이 시장과 원료공급지를 얻었다기보다는
프랑스가 산업혁명에 맨 앞장을 서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시장과 원료공급지를 잃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영국은 라이벌이었던 프랑스에 앞서서 산업혁명을 개시했고
그리고는 프랑스에 한정하지 않고 일체화되어있었던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바꾸어 말하자면 7년전쟁의 승리로 인해서 영국은 근대적인 세계시스템에 있어서의 헤게모니(독:Hegemonie-주도권)국가의 지위를 결정지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랬던 영국의 산업혁명은 1760년대부터 1830년대까지라고 하는 비교적 긴 기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서유럽지역에서는 ‘플로트 공업화’ 라고 불리던 기술적인 혁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또 그 때문에 영국의 '산업혁명'과 같이 장기적이고도 완만했으며 또한 유일하지도 않았던 그 진보가 과연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가 라고 하는 논의도 있다.

 그리고 또, 초기의 경공업중심 시기를 '제1차 산업혁명' 그리고 전기, 석유에 의한 중화학공업으로 이행한 이후를 '제2차 산업혁명' 그리고 또 원자력에너지를 이용하고 있는 현대를 '제3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입장도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기술형태에 중점을 둔 산업혁명에 대한 견해로서는 '산업혁명 부재설(不在說)'에 대한 유력한 반론은 나오기가 어렵다고 보이는 것이다.
그 때문에 또 현재에는 산업의 변화와 거기에 따르는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는 <혁명>이라고 할 만큼의 급격한 변화는 아니라고 하는 관점에서
단순히 <공업화>라는 말도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영국의 사례에 대해서는 여전히 <산업혁명>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래서 또 아무튼, 영국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노동자계급의 성립과 중류계급의 성장 및
지주귀족계급의 성숙에 의한 3계급의 구조 확립이나 소비사회의 정착 등
1760년대부터 1830년대라고 하는 '산업혁명기' 사이에 큰 사회적 변화를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세계사적인 관심에서 보게 되면 최초의 공업화인 영국 산업혁명 기에
노예무역을 포함한 무역의 확대나, 현재까지 이어지는 국제 분업체제의 확립이라고 하는
지구(地球) 규모로의 대변화가 시작되었던 때였다고도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세계규모로의 영향(負擔의 측면도 포함해서)은 선행했던 플로트 공업화 등에서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 산업혁명은 단순한 기술상의 변화로서가 아니고, 또 일국(一國)단위의 사건으로서도 아니고
보다 넓은 견지로부터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이하 생략-좀 더 자세한 것은 차기로 미루거나 생략함)


  ** 루이 오귀스트 브랑키(Louis Auguste Blanqui. 1805년 2월 1일~1881년 1월 1일)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혁명가.
 19세기 프랑스의 대부분의 혁명에 참가했고, 33년이나 수감되었다.
 카르보나리당원이기도 했으며, 많은 비밀결사나 음모에 관련했다.
 형이 경제학자 브랑키이다.

          
                                   

                       


             어쨌든 '나폴레옹'은 남은 강적 '러시아'를 발판으로 해서 '프로이센 왕'을 쫓아냈고
그리고는 '폴란드'에서 '프러시아연합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런데 거기서 '나폴레옹'은 젊고 아름다웠던 '폴란드귀족'의 부인이었던
‘마리아 바레후스카’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곧 '나폴레옹'의 애인이 되었고
나중에 '나폴레옹'의 서자(庶子) ‘아렉산들 바레후스키’를 생산하게 된다.

 


 * 마리아 바레후스카(Maria Walewska: 프-Marie Walewska) 1786년 12월 7일~1817년 12월 11일


                        

 나폴레옹1세의 애인으로 알려진 여성이며, 처음에는 폴란드의 명문귀족 ‘바레후스키 백작’의 아내였다.
 그리고 후술 되겠지만, 나폴레옹에게서는 의리의 애인이었으며,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무척이나 현명하고 온후한 성품에다 다정다감했던 여성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 아렉산들 바레후스키


 1810년 5월 4일~1868년 10월 27일
 프랑스 제2제정의 정치가, 귀족. 나폴레옹의 서자(庶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807년 2월의 '아이라우 전투'와 6월의 '하이르스베르크 전투'는 맹설(猛雪)과 정보누설 등으로 고전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 측'에서는 비록 이긴 전쟁이었다고는 했지만, 그러나 그때 잃었던 군사들이 너무도 많았던 때문으로 '프랑스군'으로서는 뼈 아팠던 결과였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동년 6월의 '프리틀란트 싸움'에서 '나폴레옹 군'은 보기 좋게 대승했고, 그로 인해 '틸지트 조약'도 체결되었으며,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보다 지리적으로 멀리까지 원정 왔었어도 선전했던 '러시아'에까지 '대륙봉쇄령'에 참가시키기 위해서 강화도 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프로이센'의 입장에서는 49%나 되던 영토를 빼앗기고도 소국으로 전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해서 고액의 배상금까지 '프랑스'에 지불해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폴란드' 땅에 '바르샤바공국'과 '베스트파렌왕국'이란 '프랑스'의 괴뢰국가도 탄생되었으며
 그에 더해서 '베스트파렌 왕'에는 '나폴레옹'의 남동생이었던 '제롬'까지 앉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스웨덴'에도 '베르나도트'를 왕위계승자로 보냈으며, 그 '베르나도트'는 1818년에 즉위 해서
 '스웨덴 왕 칼14세 요한'이 되었다. (그 스웨덴왕가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앞에서 설명 되었음)

 하지만 그 '베르나도트'는 개인적으로 '나폴레옹'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래서 서로 간의 결속 면에서는 약했던 상태였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덴마크'는 '영국'의 위협이 무서워서 부득이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가졌던 정도였지만
 그러나 '
나폴레옹전쟁'이 끝났을 때까지 그 동맹관계를 파기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폴레옹'의 세력은 '영국'과 '스웨덴'을 제외한 유럽 전 국토에 미치게 되었고
 이어서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폴란드'는 '프랑스제국'의 속국(屬國)이 되었으며
 그리고 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종속적인 동맹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나폴레옹의 절정기>로 평가되고 있다. 

 

 

 







< Napoléon Bonaparte - 1.6  絶頂期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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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6  絶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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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 강을 건너가는 나폴레옹>




  * 제4차 대불대동맹(Fourth Coalition, 1806년 10월 6일~1807년 7월 7일)



 ** 독일, 폴란드 전쟁(1806~1807)



 *** 프리틀란트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에서의 나폴레옹>


 프리틀란트의 전투(영: Battle of Friedland, 불: Bataille de Friedland, 1807년 6월 14일)

 <대강>

 '나폴레옹 전쟁'의 전투 중 하나이며 '동쪽 프로이센' 동부의 '프리틀란트'<現 러시아연방 칼리닌그라드 州 프라브딘스크(Pravdinsk)-지도는 上 칼리닌그라드 지도를 참조> 주변지역에서 '황제 나폴레옹 1세'가 인솔하던 '프랑스군'이 '벤닉센()'이 인솔하던 '러시아군'을 물리쳤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마렝고 전투'와 아주 흡사한 경과를 거쳤으며, 기이하게도 또 바로 그 6월 14일은, 그 7년 전의 '마렝고 전투'의 '전승기념일'이기도 했다.

 <배경>

 
1806년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의 싸움으로 '프로이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고,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동프로이센'으로 피신했다. 그러자 '러시아군'이 곧 그 '프로이센'을 구원하러왔고, 이어서 1807년 2월 7일부터 8일 양일간에 '프랑스군'과 '아이라우'에서 다투게 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승리했지만,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서 일단 후퇴했고, 이어서 '르페브르'를 지휘관으로 해서 3월 18일부터 '단치히'를 공격했다.

 
5월 27일 '프로이센군' 수비대가 항복을 했고
 그 사이에 '러시아군'도 '프로이센'의 임시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재편성을 끝냈다.

 
6월에 들어서 '러시아군'은 활동을 재개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10일 '하이르스베르크 싸움'에서 '프랑스군'에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는 곧장 '동프로이센'을 남북으로 흐르는 '아레 강'의 동쪽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 '러시아군'을 쫓아가지 않고, 오히려 그 출격거점을 치기 위해서 '쾨니히스베르크'로 군을 향했다. 그러자 또 '러시아군'은 '프랑스군' 중에서 제일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란누 군단'을 포착, 격멸하기 위해서 '쾨니히스베르크' 남동쪽 약 50킬로 지점에 위치해있던 마을 '프리틀란트'를 목표로 하고는, 다시 '아레 강'을 건넜던 것이다.


<프리틀란트 전투 前後의 兩軍의 機動> 


 <경과>

 
6월 13일 심야에 '러시아군'은 '아레 강' 서안(西岸)의 '프리틀란트' 도심을 점령해서, 그곳에 이미 진출해 있었던 '란누 군단'의 선발부대를 격퇴했다. 그러나 그때 '란누 군단'의 주력은 아직도 '프리틀란트'로 오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자 재빨리 ‘그루시’의 기병부대가 '프리틀란트' 북서 약 3킬로 지점에 있던 '하인리히스드르프' 촌락을 확보했고, 이어서 6월 14일 새벽녘 '프리틀란트'와 '하인리히스드르프' 사이에서 싸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1766년 10월 23일 - 1847년 5월 29일


 프랑스혁명전쟁, 나폴레옹전쟁기의 군인. 제국원수.
 나폴레옹 1세가 임명했던 26인의 원수 중 최후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815년의 백일천하에서도 함께 했다.


 

 그러자 14일 오전 9시경 '러시아군'은 '아레 강' 서안에 45000의 병력을 투입했다.
 그러나 그때 '프랑스군'은 '란누' 지휘하의 9,000명과 '그루시' 지휘하의 8,000정도의 병력밖에는 없었다.
 그러자 '란누'는 '코사크 기병(우크라이나와 南러시아 등에 생활하고 있던 커뮤니티 또는 군사적 공동체의 명칭)'의 침투를 받으면서도 교묘한 지휘로 후퇴를 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우크라이나 코사크 연대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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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또 그때 '러시아군'은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하이르스베르크'에서 '프리틀란트'까지 약 50킬로 이상을 단시간에 달려왔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14일 오전 중)까지는 아직 충분한 전투태세가 갖추어져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두 번째의 보다 치명적이었던 실책은 '아레 강'으로 인해서 주력부대와 예비 병력이 분단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또 서해안의 주력부대도 '프리틀란트' 시내를 흐르던 용수로(用水路)에 의해서 남북으로 분단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정오까지 '모르티에'의 증원부대가 '코사크기병'을 격퇴했고, 이어서 '나폴레옹'도 그 전장에 도착을 했다. 그리고 오후 4시까지는 '네이 군단'과 '빅토르 군단'도 전장에 도착을 해서 '프랑스군'은  80,000명정도의 병력을 그곳에 집결시킬 수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점에서, 바로 또 그 다음날이면 '뮤라 군단'과 '다브 군단'도 그 전장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폴레옹'의 막료들은 그날 중에 반격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를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그런 치명적인 실책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곧 '네이'에게 '프리틀란트'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저것이 바로 골(goal)이다! 단숨에 전진하랏!-------------------->

 
그래서 오후 5시, 용수로 남쪽의 '러시아군' 좌익을 공격목표로 하고 맹렬한 포격과 함께 '네이 군단'이 전진을 개시했다. 그러자 '러시아군'은 예비의 기병을 투입해서 일시 '네이 군단'을 막아내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듀퐁 사단'과 근위포병대가 증원이 되어서 그것을 격퇴했다.

 그리하여 오후 8시가 되자 '러시아군' 좌익이 붕괴했고 '네이'는 용수로 남쪽을 제압했다.
 그리고 또 '아레 강'의 다리가 불에 타버림으로 해서
 용수로 북쪽에 남아있었던 '러시아군' 우익도 퇴로를 잃고 괴멸했다.

 <영향>

 
6월 16일에는 '솔트'가 '쾨니히스베르크' 점령했고, 그것으로 '프로이센'은 완전하게 패배했다.
 그러자 또 7
 월 7일에는 '나폴레옹'과 '러시아황제 아렉산드르1세' 사이에 '틸지트 화약'이 체결되었으며
 그리고 또, 그 화약에 의해서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는 협조관계가 성립했다.
 그리고 또 '폴란드'는 '바르샤바공국'으로 독립을 회복했고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 영토를 잃은 것과 함께 거액의 배상금을 부과 받았다.



 틸지트의 화약 (불:Paix de Tilsit, 영:Peace of Tilsit)


<戰前의 틸지트>


 나폴레옹전쟁 중, 1807년 7월에 '동프로이센'의 '네만 강'가 마을 '틸지트'(현 러시아연방)에서 체결된 강화조약이었으며, 불어로는 Trait de Tilsit, 영어로는 Treaties of Tilsit 라고도 불린다.



<네만 강>

'벨로루시'의 '민스크' 남서쪽에서 시작하여 '발트 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
길이는 937km이며, 여러 국가를 통해서 흐르기 때문에 각국마다 이름이 다름
상세한 것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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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7일'에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7월 9일'에는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조약을 체결했다.
그로 인해 '프로이센'은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를 잃었고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는 협조관계가 성립했다.

<개요>

1806년 '프로이센'은 '영국' '러시아' 등과
'제4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해서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10월 14일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의 싸움으로 괴멸했다.
그러자 '러시아'가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나섰다.

1807년 2월 7일과 8일 '아이라우의 싸움' 후에 양군은 일단 휴식상태에 들어갔지만
그러나 6월 14일의 '프리틀란트' 싸움에서 '러시아'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6월 21일 '3국'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어서 6월 25일에는 '나폴레옹1세'와 '러시아 황제 아렉산드르1세'가 강화에 나섰다.
그리고 그 장소는 '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국경이었던 '네만 강'의 배 위에서였다.

7월에 합의된 강화조약에 의해서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의 영토와
'폴란드'를 잃었고 '작센왕국'과 '러시아'에도 영토를 할양해야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프로이센'의 인구는 900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또 육군은 4만 명으로 제한되었던 데다가, 1억 2000만 프랑의 배상금까지 부과되었고
그 배상금이 전액 지불될 때까지 '프랑스군'의 국내 주둔을 인정해야했다.
그리고 '엘베 강' 서쪽의 '프로이센' 옛 영토에는 '베스트파렌왕국'이 세워졌고
그 국왕으로는 '나폴레옹'의 동생이었던 '제롬 보나파르트'가 즉위했다.



 제롬 보나파르트(Jerome Bonaparte-1784년 11월 15일~1860년 6월 24일)

 나폴레옹의 3번째 남동생(막내).
 프랑스의 괴뢰(傀儡)국가 '베스트파렌왕국'의 국왕(재위:1807년-1813년).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나서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금전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나폴레옹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았고, 나폴레옹의 추천으로 해군에 입대해서 마르티니크 섬의 해전에 참가했지만, 영국에 쫓겨서 당시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메리카합중국으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 후,
그는 그곳에서 부호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파타손'과 사랑에 빠졌고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03년에 결혼해서 2명의 아이를 낳았다.

 
1804년 나폴레옹이 즉위하자 알현을 위해서 부부가 프랑스로 향했지만,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상륙은 허가되지 않았다. 그러자 혼자 파리에 도착했던 제롬은 곧 이혼을 강요당했고, 이어서 부득이 동의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실망해서 돌아갔다.

 그 후, 뷰르텐베르크의 왕 프리드리히1세의 딸 카타리나와 정략결혼 했고
 1808년 6월 6일에 틸지트 화약에 의해서 나폴레옹이 만든 베스트파렌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치세로서는 근대적인 제도를 도입했지만
 그러나 프랑스군의 병참기지로써 국민에게 많은 부담을 주기도 했다.

 1812년 러시아원정이 시작되면서 자국 군 7만을 인솔해서 참전도 했지만
 그러나 도중에 나폴레옹과 대립하고는 마음대로 전선에서 이탈했다.

 1813년의 라이프치히 싸움에서 패배, 그로인해 왕국은 소멸했지만
 그러나 자신은 도망해서 양부(養父)에게 의지했다.

 나폴레옹 사후에는 안정된 생활을 보냈고
 프랑스 제2제정이 성립하면서 정치에 개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때까지 분할로 인해서 독립을 못하고 있었던 '폴란드'는 '바르샤바공국'으로서 부활했고
그 군주로는 '작센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1세(Friedrich August I)'가 즉위했다.



  바르샤바공국


 나폴레옹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국이었다.
 1807년의 틸지트조약에 의해서 프로이센왕국으로부터의 영토할양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나폴레옹이 1812년에 러시아원정에 실패한 후, 공국은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점령되었고
 1815년의 빈 회의의 결과 2개의 나라로 분할되었다.(이하 생략)



<1807년 공국헌법을 수여받고 있는 나폴레옹>



그리고 또 '러시아'는 '제4차 대불대동맹'으로부터 탈퇴했고
對 '영국' 경제봉쇄였던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영국'에 선전포고했다. (英露전쟁)

그리고 또 '스웨덴'에 대해서는 '대륙봉쇄령'에 참가시키기 위해서 '러시아'가 압력을 가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그것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러시아'의 '핀란드획득(1809년)'이 용인되었다.
(제2차 러시아-스웨덴 전쟁)

그리고 '지중해'에서는 '캄포포르미오 화약'에 의해서 '프랑스령'이 되었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러시아해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이오니아제도<그리스 서부, 북동 이오니아海에 위치해있는 제도(諸島)>'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 대륙봉쇄령(Continental System, Continental Blockade)


 나폴레옹이 1806년 베를린에서 발령했던 경제봉쇄명령(베를린칙령이라도 한다).
 프랑스제국과 그 동맹국들의 지배자가 되었던 나폴레옹은, 그 당시 산업혁명 중에 있었던 영국을 봉쇄해서, 유럽이 프랑스하고만 통상하도록 만들어서, 유럽대륙의 경제를 지배하려 했던 명령이었다.(이하의 설명은 차기로 미루거나 생략함)


 ※ 영노전쟁(Anglo-Russian War, 1807년-1812년)


 나폴레옹전쟁과 병행해서, 영국과 러시아 간에 벌어졌던 산발적인 전쟁이었다.(이하 생략)


 ※ 제2차 러시아-스웨덴 전쟁(1808년~1809년) 

 나폴레옹전쟁에 준했던 러시아제국과 스웨덴과의 전쟁을 말한다.
 핀란드 전쟁이라고도 한다.
 
핀란드를 전장으로 해서 스웨덴의 ‘호르슈타인-곳트르프家'와
 러시아의 '호르슈타인-곳트르프-로마노프家' 양가(兩家)가 개전했던 전쟁(1788년-1790년)을
 제1차 전쟁이라고 하고, 그 뒤를 이은 것을 제2차 전쟁이라고도 말한다.
 
1, 2차 모두 러시아-스웨덴 전쟁으로 불리고 있다.


 

 

 <전후처리>

 7월 7일부터 9일까지 '틸지트 화약'이 체결되어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강화(講和)했고, 동맹으로부터 탈퇴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으로부터 할양시킨 영토에 '베스트파렌 왕국'을 건국했고, 자신의 남동생 '제롬'을 왕위에 앉혔다. 거기다 '폴란드'를 독립시켜서 '바르샤바공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폴레옹'은 중부유럽과 동구까지의 패권을 획득했다.

 그
후 '대륙봉쇄령'에 참가를 거부했던 '스웨덴'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아렉산드르1세'와 회담했고, 이어서 1808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나폴레옹'은 '북유럽'도 제압하게 되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해 10월 '예나와 아우어슈테트(Schlacht bei Jena und Auerstedt)의 싸움'으로 '프로이센군'에 대승했고, 이어서 '베를린'을 점령했다. 그러자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폴란드'로 도망쳤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 '영국' '스웨덴' '오스만제국' 이외의 유럽중앙을 거의 제압했던 '나폴레옹'은 형 '죠제프'를 '나폴리 왕'에, 남동생 '루이'를 '네델란드 왕'에 앉혀서 독일 서남일대를 '라인 동맹'으로 하고, 그것을 보호국(保護國) 化하는 것으로 이후 '독일'에 대해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까지 긴 역사를 자랑해 왔던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 신성로마제국(독:Heiliges Romisches Reich, 라:Sacrum Romanum Imperium, 962년~1806년)

 중세에, 현재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체코, 이탈리아북부를 중심으로 해서 존재했던 정체(政體)였으며
 수도는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제국이라고 하기보다는 실질적으로 크고 작은 국가연합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 기간은 길었으며, 그 중에서는 또 나중에 오스트리아제국(당시는 오스트리아大公領) 및 합스부르크家 지배지역이나, 프로이센왕국 등, 독일 제(諸)국가들로 성장해 갔다. 그리고 또 '독일제국'이라고도 불렸으며, 1806년 제국해산 때의 조칙(詔勅)에서는 그 이름으로 발포(發布)되었다.



<1630년의 신성로마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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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6  絶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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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 강을 건너가는 나폴레옹>




  * 제4차 대불대동맹(Fourth Coalition, 1806년 10월 6일~1807년 7월 7일)




 ** 독일, 폴란드 전쟁(1806~1807)


 그리고 '예나 방면'에서는 '나폴레옹'이 인솔하던 '프랑스군' 주력부대가 '프로이센군'의 후위 부대를 격파했고
 아우어슈테트 방면'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와 '브라운슈바이크공'이 이끌고 있던 '프로이센군' 주력부대가
 2배의 병력으로 '다브 군단'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격퇴 당했다.

 그러자 이어서 '
프랑스군'은 패주하던 '프로이센군'을 추격해서 10월 25일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제압했고
 10월 27일에는 '나폴레옹'도 그 '베를린'에 입성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개전이 시작된 지 불과 19일만의 일이었다.
 그러자
그때 '프리드리히대왕'의 묘소를 방문했던 '나폴레옹'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오늘 여기에 없었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 그리고 11월 6일에는 '마그데부르크'의 수비대가 항복했고
 그로인해 사실상 '프로이센군'은 소멸했다.



 
 *** 마그데부르크(Magdeburg)

 독일 동부에 있는 도시이며, 중세에 한자 동맹 도시로 번영하였으나 30년 전쟁으로 몰락하였다.
 사탕무와 과일 등 야채 재배가 활발하며, 기계와 화학 그리고 식품 공업이 발달하였다.
 작센안할트 주의 주도(州都)이다.



<1900년의 모습> 



 *** 아이라우(Eylau) 전투



<아이라우 전투에서의 나폴레옹>


 1807년 2월 7일부터 8일에 걸쳐서 동쪽 '프로이센' 남부의 작은 마을 '아이라우'의 교외에서 행해졌던 전투였다.

 <대강>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의 결과 '프리드리히·빌헬름 3세'는 '동쪽 프로이센'으로 도망을 갔고
 '쾨니히스베르크(아래 後述)'를 임시수도로 삼았다
 그러자 '러시아'는 10만의 원군을 다시 '동쪽 프로이센'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폴란드'로 진군했고
 그에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을 조국의 해방자로서 열렬히 환영했다.

 1807년 1월말, 嚴寒 속에서 '프랑스군'은 '쾨니히스베르크'로 향했다.
 그리하여 2월 7일과 8일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과 '아이라우'에서 충돌했다.
 그 결과 양군은 모두 취설 속에서 엄청난 피해자를 냈고, 이어서 '프랑스군'은 일단 후퇴했다.
 그리고는 다시 '르페불'을 지휘관으로 해서 3월 18일 '단치히'를 공격했으며
 5월 27일에는 '프로이센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이라우(독:Eylau)


 現, '러시아'의 '바그라티오놉스크(Bagrationovsk)'로 '러시아 공화국' '칼리닌그라드 州'에 있는 소도시.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쾨니히스베르크의 前名) 南東 약 30킬로에 위치해있으며
 나폴레옹 전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칼리닌그라드의 위치도>


  쾨니히스베르크


 '러시아어'로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이여, 라틴문자 전사(轉寫)의 예로는(Kaliningrad)이다.
 '러시아연방' 서부에 있는 '칼리닌그라드 州'의 州都이다.
 '발트 해'에 접해있는 항만도시로, 인구는 약 42만 명.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있는 '러시아'의 뚝 떨어진 영토이며, 인구는 대략 95만 명이고
 세계 유수(有數)의 호박(琥珀) 산지로서도 유명하다.
 '칼리닌그라드'는 원래 1255년에 '독일인'들의 '동방식민'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도시였고
 1946년까지 사용되었던 구명(舊名)은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독일어로 ‘왕의 산’이란 뜻)였다.
 20세기 전반까지는 '독일' 東北邊境의 중요 도시였다. (이하, 상세한 것은 생략함)



<19세기 말경의 쾨니히스베르크 성>


 <개요>

 '나폴레옹'은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친 후
6만의 병사를 몰아서 그때 '폴란드'로 도망을 쳤던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 7만과 결전에 임했다.
 그러나 눈보라와 정보 부족으로 '프랑스군'은 곧 고전에 직면했다.
 그러자 그런 기회를 놓칠세라 '샤른호르스트'가 인솔하던 '프로이센군'이
그 취설(吹雪) 속에서 '프랑스군'의 측면을 찌르려고 기도했다.
그러자 그로인해 '프랑스군'은 大 패배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다 또 설상가상 '오쥬로' 원수가 중상까지 입어서 군은 곧 전멸할 것 같았지만
그러나 바로 그때에 '네이' 원수의 원군이 극적으로 그 전장에 도착했고, 이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러자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은 23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고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군'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그때, '프랑스군'도 22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므로
그래서 그것은 '프랑스' 측으로서도 아주 힘겨운 승리였다고 할 수가 있었다.

 <결과>

 그 후 '나폴레옹'은 군을 다시 추슬러서 6월 14일에 '프리트란트의 싸움'에서 대승했다.
 그리고 그 전투의 결과, 7월 7일에 '틸지트'에서 '러시아'와 강화했다. (틸지트조약)
 그런 한편 '프로이센'은 거액의 배상금을 부과 받았고, 또한 많은 영토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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