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生涯

1.7  滅亡으로





   * 제5차 대불대동맹(Fifth Coalition, 1809년 4월 9일~1809년 10월 14일)



<바그람 전투에서의 나폴레옹>


 2. 1809년 오스트리아 전쟁



<아스페른-에슬링 전쟁에서 승리한 칼(카를) 대공>


 <배경>

 
1809년 4월 9일 '오스트리아 제국'은 '영국'과 '제5차대불대동맹'을 맺었고, 같은 날 '칼 대공'이 인솔하던 20만의 '오스트리아군주력'이 '바이에른'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즉시 '라인동맹' 주둔의 '프랑스군' 부대를 집결시켜서 반격했고, 4월 22일 '에크뮬의 싸움'에서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격파했다. 그러자 '칼 대공'은 '도나우 강' 북쪽으로 퇴각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도나우 강' 남안을 동진, 5월 13일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무혈 입성했다. 그러자 '칼 대공'도 '오스트리아군'을 '도나우 강'의 대안(對岸)에 집결시켰고, 이어서 결전의 준비에 들어갔다.

 
그때 '프랑스군'이 '도나우 강'에 가설했던 교량들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서 모두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프랑스군'은 도하점을 '도나우 강'의 흐름이 가는(細) 지류로 나누어져 있던 중주(中州)의 '로바우 섬' 주변지역으로 선택했다.

 그리하여 5월 19일부터 20일에 걸쳐서 '도나우 강' 남안으로부터 '로바우 섬'까지의 가교가 건설되어 20일 저녁까지 대부분의 군대가 '로바우 섬'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20일 저녁때부터 '프랑스군'은 대안으로 통하던 마지막 가교공사에 들어갔다.


 <아스페른-에스링크 전투도-흰색이 프랑스군. 中下가 로바우 섬>

<프랑스군이 설치했던 가교의 모습-구상도>


 <경과>

 
1일째

 
5월 21일 새벽녘까지 '프랑스군'은 ‘맛세나’의 '제4군단'을 선두로 24,000명, 야포 60문이 '도나우 강' 북안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좌익이 '아스페른'을, 우익이 '에슬링' 촌락을 확보해서 그 2개의 촌락을 묶는 선(線)으로 교두보를 쌓았지만
 그러나 그 배후에는 '도나우 강'이 막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은 배수의 진을 친 형국이 되었다.

 
그러자 '칼 대공'은 병력 95,000에다 야포 200문을 가지고 어느 정도 '프랑스군'이 도하할 때까지 지켜보다가
 반 정도 도하를 했을 때 한꺼번에 치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물론 그때 '나폴레옹'도 그런 위험성 정도는 이미 예측을 하고 승부에 나섰던 상태였다.

 
어쨌든 '오스트리아군'은 그때 ‘히라’의 제6군단과  ‘베르가르데’의 제1군단 그리고 ‘호엔트레룬’의 제2군단이 ‘아스페른’ 공격에 들어갔고 ‘로젠베르크’의 제4군단이 ‘에슬링’으로 향했다. 그러자 전투는 곧 '아스페른'에서 개시되어 '히라'와 '맛세나'의 양 부대는 촌락쟁탈전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두 개의 촌락 중간에다 진을 쳐서 '프랑스군' 중앙부를 전진시켰고, 그곳에서부터 흉갑(胸甲)기병을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부대로 돌격시켰다. 그러자 '오스트리아군'도 ‘리히텐슈타인’ 지휘하의 기병을 투입했고, 그에 '프랑스'의 흉갑기병들은 후퇴했다.

 
저녁이 다 되었을 때, 촌락은 ‘맛세나’의 부대가 확보했다. 그리고 그때 '에슬링'에서도 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 '
프랑스군'에서는 '란누'가 방어전을 펴서 저녁때까지 촌락을 계속해서 확보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그날 밤까지 증원을 더해서 병력 31,500명, 야포 90문으로 증가해두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오스트리아군'에는 열세였다. 그러자 양군은 곧 야영에 들어갔고 '아스페른'에서는 서로의 사정거리 내에서 일단 휴식에 들어갔다.

 2일째

 그날 밤사이 '프랑스군'에서는 '제2군단'과 '친위대'가 가교를 건넜다.
 
그리고 보병 50,000명과 기병 12,000 그리고 야포 144문이 증강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도 병력 100,000에다 야포 260문까지 증강시켰다.

 
22일, 이른 아침부터 전투는 재개되었다.
 
그러나 '에슬링'에서의 ‘로젠베르크’ 군단의 공격은 ‘생 하일레' 사단의 증원을 받았던 ‘란누’에 의해서 격퇴되었다.
 
그리고 중앙부에서도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페른'에서는 '히라' 군단과 '베르가르데' 군단의 거듭되던 공격으로 '맛세나' 군단의 전열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러자 '프랑스군'의 후방연락선도 위험한 상태에 빠졌다. 그것은 또 '도나우 강'에 설치했던 가교가 '오스트리아군'이 상류에서 흘려 내린 나룻배(艀-거룻배, 화물운반선-barge선)에 의해서 몇 번이나 파괴되었던 때문이었다.
 


< 참고-Ohio River Parkersburg-나룻배(艀-거룻배, 화물운반선-barge선)의 예>


 그러자 '칼 대공'은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 예비 병력의 투입을 결단했다. 그리고는 자신 스스로 군기를 들고 부대의 선두에 서서 '아스페른'으로 향했다. 그러자 '아스페른'은 '칼 대공'의 직솔 부대에 의해서 곧 함락되었다. 그리고 또 이어서 '에슬링'도 ‘로젠베르크’ 군단에 의해서 마침내 탈취 당했다.

 
그러자 오후 2시에 '나폴레옹'은 전군에 철퇴를 명했다. 그리고 그때 '란누'는 군대의 최후미에서 아군의 철퇴를 계속해서 원호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은 더욱 격렬해졌고, 이어서 '프랑스군'의 희생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란누'가 포탄에 맞아서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또 '프랑스군'은 그때 전투에 참가했던 73,000명 중 2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런 한편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도 23,340명에 이르렀다.


<로바우 섬에 귀환한 나폴레옹-5월 23일>



 <영향>

 '
란누'는 긴급으로 오른쪽 다리 절단수술을 받아서 조금 나은 듯 했지만, 그러나 이내 재발해서 결국 31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후 '란누'는 전사한 최초의 '프랑스제국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 '프랑스군'은 심한 패배를 당하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
나폴레옹'은 그에 단념을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곧 '이탈리아방면'에서 올 ‘우제누’ 군단의 도착을 기다렸고
 그리고는 7월 4일에 재차 '도나우 강' 도하작전을 실시했다.



 ** 우제누(Eugene de Beauharnais. 1781년 9월 3일~1824년 2월 21일)

 '죠제피누 드 보아루네'의 아들.
 여동생은 오르탄스 드 보아루네.
 
나폴레옹1세의 양자로, 이탈리아 副王.
 후에 로이히텐베르크 공.


<1800년>




 어쨌든, 그 작전이 성공해서 7월 5일부터 6일에 걸쳐서 '바그람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쉔부룬(또는 쇤부른) 화약'으로 '오스트리아'를 다시 굴복시켰다.

 그리고 '
오스트리아'로서는 그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승리로, 1809년의 對 '프랑스전쟁'의 승리에 연결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때까지는 천하무적이었던 군사(軍事)적 천재였던 '나폴레옹'에게 한번 충격을 준 것만으로써 만족해야 했다.

 어쨌든, 그 후에 '칼 대공'은 '오이겐 공'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2대 영웅으로서 칭해졌고, 현재에도 '빈'의 '호후브르크(Hofburg-오스트리아의 빈에 있다) 궁전' 앞의 '영웅광장(Heldenplatz)'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호후브르크 신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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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7  滅亡으로





   * 제5차 대불대동맹(Fifth Coalition, 1809년 4월 9일~1809년 10월 14일)



<바그람 전투에서의 나폴레옹>



 2. 1809년 오스트리아 전쟁


  <아스페른-에슬링() 전쟁>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개요>


 같은 무렵 '폴란드'에서도 '포냐트후스키'가 인솔하던 '바르샤바공국군'이
 '라싱전투(4월 19일)'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했다.



 ** 포냐트후스키(Jozef Antoni Poniatowski, 1763년 5월 7일~1813년 10월 19일)

 폴란드의 군인, 귀족.
 나폴레옹 휘하에서 활약했고, 원수가 되었다.
 
프랑스명은 Joseph Antoine Poniatowski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그리고 '나폴레옹'이 인솔하던 '프랑스 주력군'도 '도나우 강' 남안(南岸)을 동진(東進)해서 5월 13일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무혈(無血)입성했다.
그러자 '칼 대공'도 '오스트리아군'을 '도나우 강'가에 집결시켰고, 결전의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프랑스군'은 '도나우 강'의 중주(中州)인 '로바우 섬'을 점령하고 가교(假橋)를 설치했다.
 그리고는 '아스페른'에서부터 '에슬링' 일대까지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의 파괴공작으로 가교가 자주 떠내려 가버렸기 때문에
 '프랑스군'으로서는 충분한 병력을 도하시킬 수가 없었다.

 
5월 21일부터 22일까지 '오스트리아군'은 물을 건너던(도하) '프랑스군'을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으로 그 '아스페른-에슬링 싸움'은 '나폴레옹' 자신이 지휘했던 전쟁 중 첫 패배가 되었다.
 
그리고 또, 병력의 손실도 물론이었지만, 그러나 그가 가장 신뢰했던 부하 ‘란누’가 그곳에서 전사를 했기 때문에
 그래서 '나폴레옹'에게서는 아주 골수(骨髓)에 사무쳤던 패배가 되기도 했다.


 


 ** 란누를 회고하며...



 란누(또는 란-Jean Lannes, 1769년 4월 10일~1809년 5월 31일)에 대한 보충설명.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우리들의 란누” 또는 “프랑스의 아이아스” 라고 불렸던 전설적인 용사였다.

                          


 <생애>

 
1. 성장 내력

 
소작농민 겸 구무원(廐務員-마구간지기)의 아들로 태어나서 궁핍한 소년시절을 보냈지만
 그러나 그 무렵부터 남다른 담력과 배려(配慮) 깊은 아이로 고향에서 알려졌다.
 
나중에 아버지의 추천으로 염색물사(染色物師)가 되기 위해 견습생으로 들어갔지만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
러다가 프랑스혁명이 시작되면서 국민위병대에 자원했다.

 
당시 사관(士官)은 병사(兵士)의 호선(互選-특정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뽑는 선거)으로 선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보병소위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분간 피레네방면(산맥근처의 고립된 근무처)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오지에서 근무했던 용기와 함께 부상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정신력으로 그는 금방 유명해지게 된다.

 2. 나폴레옹과의 만남

 
그리하여 불과 3년 만에 대대장까지 승진했던 그는, 그러나 1795년 상관과의 언쟁으로 강제 제대 당했다. 그러나 군대가 자신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던 그는 일병졸(一兵卒)로 이탈리아방면 군에서 백의종군했다. 하지만 그의 용기는 그곳에서도 금방 알려져서 곧바로 그는 군조(軍曹-한국의 중사에 해당함)로 승진했다.

 
그 후에, 이탈리아방면 군사령관이 된 '나폴레옹'은 그의 이력(履歷)에 흥미를 느끼고는 그와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의 용기와 솔직함에 매료되어서 소좌(한국의 소령에 해당함)에 복귀시킨다.

 
그 이탈리아전선에서 '란누'는 수많은 무공을 세웠고, 특히 ‘알코레 전투’에서는 항상 군의 선봉에 서서 3일간에 세 번의 중상을 입으면서도 계속해서 싸웠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자 그 용기에 감동했던 '나폴레옹'은 그 '알코레'에서 적으로부터 빼앗았던 군기에다 자신의 메시지를 적어서 그에게 주었을 정도였다.

 그
후 '나폴레옹'은 그를 부하라기보다는 친구로 대우했고
 그 관계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3. 용자(勇者) 중의 용자

 
그리고 그는 계속되던 '이집트원정'에서도 '나폴레옹'과 함께 종군했으며, 사단장이었으면서도 항상 병사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다. 그리고 또 그는 몇 번이나 부상을 당했지만 결코 굽히는 일이 없어 그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져만 갔다. 그러자 '나폴레옹'의 친구였던 '드제이' 장군은

 <용사 중의 용사라는 것은 확실히 그를 두고 한 말이다!>

 라고까지 그를 격찬했다.

 
그리고 또 그는 1800년에 소장으로 승진했지만, 그러나 단순한 전선지휘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장군의 자질까지 유감없이 선보였고 '마렌고 싸움'에서는 열세의 전위부대를 지휘해서 '오스트리아' 대군을 반나절이나 묶어두는 활약까지도 선보였다.

 
그러나 그는 사생활에서는 불운해서, 처음의 아내가 간통에다 아이까지 가졌기 때문에 이혼했고, 이어서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었던 '카로리누'에게 구혼하려했지만 '뮤라'에게 빼앗기는 등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다행했던 것으로
 그는 곧, 궁정 제1의 미녀로 불렸던 아름답고 총명했던 부인과 재혼하게 된다.

 
그것은 또, 그 '뮤라'가 짜증이 강하고 변덕쟁이였던 '카로리누'에게 좌지우지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그래서 그에게서는 무척이나 행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또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원수로 승진했다.

 4. 우리들의 란누

 
그는 '나폴레옹' 즉위 후에도 중요한 전쟁에는 모두 참가했으며, 그로써 그의 '제5군단'은 대육군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친했던 '네이' 원수와 함께 '뮤라'의 지휘 하로 들어가게 되자 많은 불만을 가지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는 전장에서는 공(功)을 타투 듯이 활약했고 '아우스트리트 전쟁'에서는 또 좌익지휘관으로서 '러시아군'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이어서 그는 '프로이센 전쟁'에서도 활약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때도 사이가 나빴던 '뮤라'와 함께 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보고서들을 산더미처럼 남겼다.

 
어쨌든, 대체적으로 '란누'는 전위(前衛)로써 적군을 저지하거나 거점공략을 맡는 임무를 잘 수행해냈지만
 그러나 그 외에도 전체 병들을 통솔해서 싸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임무들도 잘 소화해냈다.

 5 스페인, 그리고...

 1808년 '란누'는 교착하고 있던 '스페인전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전쟁에서도 처음부터 중상을 입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곧 '스페인'의 야전군을 격파했고, 이어서 혈투 끝에 '사라고사'도 공략했다. 그리고 그때의 비참함으로 인해서 마음을 다쳤던 그는, 그 후로 점차로 전쟁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그 '사라고사' 공략 후에 이어서 그 다음 해에는 '오스트리아' 원정에 참가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는 '레겐스브르크 공략전'에서 지나친 고전에 전의를 잃어가던 부하들을 질타하며

 <나는 원수이기 이전에 척탄병(擲彈兵)이다!>

 라고 외치고는 스스로 사다리를 잡아서 성벽을 오르는 모범을 보여서(물론 그 이후 부하들에 의해서 제지는 되었지만) 그에 분발했던 장병들과 함께 그 견루(堅壘)를 함락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인 5월 22일, 그는 <아스페른-에스린크 싸움>에서 우세했던 '오스트리아'군을 맞아서 교전했고, 적탄을 무서워하지 않고 선두지휘를 하던 중 다리에 포탄을 맞아서 쓰러졌다. 그리고는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긴급수술을 받은 후에 즉시 후송되었지만, 그러나 상처가 다시 악화되어 결국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폴레옹은 그때, 그 넘어져있던 <란누>를 끌어안고는 한참동안이나 펑펑 울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전사한 최초의 <제국원수>가 되었다.

 6. 인물상(人物像)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에서 황제에게 가장 많은 신뢰를 받았고, 또 개인적인 우정까지 얻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한 후에도 그는 나폴레옹에게 <너> 라고 불렀고
 '나폴레옹' 또한 그것을 기꺼이 인정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나폴레옹'은 후에 그를 회상하기를

 <그 란누라는 남자는 처음에는 정신보다는 용기가 돋보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날이 정신 쪽도 그 기상이 높아져서 마침내 밸런스를 유지하게 되었다... 나는 작은 인물이었던 그를 등용했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이미 위대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라고 말을 했었다고 하며
 그
리고 또 '나폴레옹'은 그가 치명상을 입었을 때, 그 '란누'의 피로 자신의 군복을 다 적실 듯이 껴안고는

 <살아줘, 제발 부탁이야, 살아만 줘!-------------->

 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을 했었다고도 전해진다.

 
어쨌든, 그런 이유 등으로 '나폴레옹'으로부터 그 정도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은 아마도 그밖에는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는 지휘관으로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용기와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는 불굴의 투지로써 똘똘 뭉쳤던 그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단순한 맹장만이 아니었고 '나폴레옹'도 술회했던 것처럼, 그는 경험을 쌓을 때마다 전술에 일취월장을 보였던 그런 사람이기도 했었다.

 
그런데다 또 그는 전위(前衛)를 맡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힘에 부치는 적을 상대해서도 끈질긴 방어로써 교묘하게 군을 지켜냈으며, 특히 보병과 기병과 포병을 아우르면서 지휘했던 그의 능력은 과연,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신기(神技)였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나폴레옹'의 지시를 독자적으로 해석해서 행동할 수 있었던 얼마 되지 않았던 원수 중의 한사람이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눈에 띄게 미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옷차림에는 많은 신경을 써서

 <지휘관이란 자는, 모름지기 병사들의 눈에는 결혼식 날 밤의 신랑 같이 비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을 모토로 해서, 전장에서도 화려한 군장을 하고서는 장병들을 고무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성격이 급하고 격정적이었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전장에서는 항상 맨 앞장을 서서 달렸고, 그리고 또 그런 그의 모습은 일종의 신앙심까지 들게 해서, 장병들에게는 절대적인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리고 또 그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도 전해진다.

 <프랑스에 있어서도, 나에게 있어서도, 이 정도로 큰 손실은 아마도 결코 없을 것이다!...>

 
라고...






 





       <제5차 대불대동맹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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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7  滅亡으로




 
           <1808년5월3일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의 학살-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3rd May 1808 = 고야>
 ※
고야는 프랑스군에 의한 시민의 학살을 이 그림으로 격렬하게 비난했다




 * 半島戰爭(1808년~1814년)


 영:Peninsular War(반도전쟁)
 스:Guerra de la Independencia Espanola(스페인 독립전쟁)
 포:Guerra Peninsular(반도 전쟁)
 불:Guerre d'Espagne(스페인 전쟁)
 카타르냐:Guerra
del Frances(프랑스 전쟁)



                          <1808년 5월 2일 맘르크(노예병)들의 공격-고야작(1814년)>



 4. 포르투갈의 영향

 그 '반도전쟁'은 '포르투갈'의 충격적인 개막(開幕)을 예고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로 떠났던 궁정은
 그 후에 독립하게 되는 '브라질' 국가건설의 초석이 되었다.




 그리고 또, 궁정과 정부 그리고 육군으로 이루어졌던 1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망명했던 것은 '브라질'로서는 덤이 되었고 '포르투갈'로서는 은혜가 되었다.
 그것은 또, 그로써 독립에의 열망이 분출되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의 부재로 인해서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포르투갈 지사(知事)'에게는 별 영향이 없었다.
 
그리고 또 전쟁大臣 ‘미겔 페레이라 포르하스’의 역할은 아주 독특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
웰링턴'은 그를 <이베리아반도에서 단 한명의 착실한 정치가>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아무튼 그는 '포르투갈군'의 참모와 함께 55,000명의 상비군, 그리고 또 50,000명 이상의 국민방위대였던 <미리시아스> 그리고 또 여러 종류의 향토 방위대였던 <오르데난사스(전체 10만을 넘었던 무시할 수 없었던 병력)>의 창설을 지휘했다.

 
그는 또 1812년에 '러시아'의 궁정대신이었던 ‘슈타인 남작’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나폴레옹 침략군'을 타파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 작전>뿐이라면서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아렉산드르1세’는 '웰링턴'의 '포르투갈군' 전략을 모방해서 '나폴레옹군'을 아사(餓死)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써 <전투를 피하는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서 시련을 겪었던 '포르투갈 본토' 잔류의 새로운 계급층들은 그때쯤에는 '신생 포르투갈의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또 원 기득권 지도자층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거의 <프랑스혁명>과 맞먹었던 것이었다.

 '베레스포드 원수'는 1814년 이후에도 '포르투갈 육군'<예하(隸下)에 160명 정도의 영국군장교가 핵심이 되었다>의 사령관(국왕이 그때 브라질에 있었으므로, 그것은 일종의 식민지총독)으로서 잔류했다.
 그리고 그에 의해서 곧 '포르투갈'의 '신정책'이 책정되었다.

 
그때 그가 책정했던 것은 ‘루소 브라질 연합왕국’의 정체(政體)확인과 '아프리카 식민지'에 있어서의 노예공급문제, 그리고 '브라질'의 산업과 '포르투갈'과의 교역 등에 관한 향후 국가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1820년까지 그것들은 모두 파기되었다.

 '포르투갈 반도전쟁'에 참가했던 군 장교들은 곧 '영국군'을 그곳에서 추방했고, 8월 24일에는 ‘오포르트’에서 자유주의혁명을 개시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에서의 '자유주의체제의 수립'은 1832년부터 시작되었던 34년간의 내전종결 후에서야 결실을 맺게 된다.

 
5. 스페인의 영향

 新국왕 '호세1세(죠제프 보나파르트)'는 당초 '프랑스'와의 협력관계로 인해서 근대화와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아후란세사드스(親프랑스파)>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하나의 예가 <이단(異端) 심문>의 폐지였다.



<스페인의 이단심문>

그러나 그곳의 성직자들과 애국자들은 인민들을 선동했고, 그 결과 실제로 '프랑스군'이 '스페인'인을 억압하는 사건(1808년 마드리드)이 발생하자, 그들은 마치 때를 기다린 듯 일제히 나서서 인민들을 단결시키기 시작했고, 곧 이어서는 그들에게 용기까지 불어넣으면서 일을 확대시켜나갔다.

 그러자 그에 무관한 사람들은 하나둘씩 '프랑스군'을 따라서 '프랑스'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도 그런 ‘아후란세사드스’의 한사람으로, 전쟁 후에 고발되거나 그런 가능성으로 린치를 받을 것을 예상해서 미리 '프랑스'로 망명하기도 했다.



 **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년 3월 30일~1828년 4월 16일)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베라스케스와 함께 스페인 최대의 화가였으며. 궁정화가로서 중요시 되었다.


<자화상-1815년>



 하지만 그 시기에 '프랑스군'은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대량으로 약탈했다.
그리고 교회와 수녀원은 마구간이나 병영(兵營)으로 사용했고, 스페인의 문화유산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었던 미술품들은 어김없이 '프랑스'로 보내졌다.

 
거기에 더해서 '영포군'들은 '스페인'의 도시와 농촌들을 약탈했다. 그래서 그 전쟁은 '스페인'의 경제를 현저하게 저하시키게 되었고, 이어서 19세기의 정체(停滯)를 가져다주게 된다.




  <반도전쟁 끝>



당시 '나폴레옹 군'의 '스페인인 학살'을 그렸던 '고야'의 회화는 유명하다.
그리고 또 '나폴레옹'이 스스로 <스페인의 궤양(潰瘍)이 나를 멸했다!>
라고 말했던 대로, 그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나폴레옹' 영광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리고 7월 '스페인군'과 '게릴라 연합군'에게 ‘듀퐁 장군'이 인솔하던 '프랑스군'이 항복했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한 이래 <육상에서의 첫 패배>였다.

아무튼 그때 '
나폴레옹'이 '스페인'에서 고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오스트리아'는
1809년에 다시 '영국'과 '제5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했다.



  * 제5차 대불대동맹(Fifth Coalition, 1809년 4월 9일~1809년 10월 14일)



<바그람 전투에서의 나폴레옹>


 '나폴레옹1세'의 '프랑스제국' 패권에 도전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제국'과 '영국'이 결성했던 동맹이었다.

 1. 동맹

 1808년 '나폴레옹'의 패권은 '유럽'의 전역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해상에서는 '영국'이 여전히 해상권을 잡고 '해상봉쇄'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스페인'에서는 '프랑스'의 통치가 현지주민들의 반감을 불러서 '게릴라'가 각지에서 궐기하고 있었다. 그에 '영국'은 ‘아서 웰즐리’를 파견해서 '스페인'의 반란세력을 지원했다. 그로부터 이른바 '반도전쟁'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러했던 육해(陸海)에서의 '나폴레옹'의 고전을 지켜봤던 '오스트리아제국'은, 이윽고 1809년 4월 9일 '영국(아일랜드 포함)'과 <제5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했고, 이어서 1805년 ‘프레스부루크 화약’에서 잃었던 영토탈환에 나섰다.



 ** 프레스부르크 화약(불:Paix de Presbourg, 영:Peace of Pressburg, 1805년 12월 26일)

 
나폴레옹 전쟁 중에 오스트리아 영내의 프레스부르크(현: 슬로바키아공화국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체결되었던 강화조약이었으며, 프레스부르크 강화조약(불:Traite de Presbourg, 영:Treaty of Pressburg)이라고도 불린다.
 (이하 앞에서 설명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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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809년 오스트리아 전쟁

 <에크뮐 전쟁>

 '
아우스트리트 싸움'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던 '오스트리아'는 재기를 위해서 군제개혁을 실시했다.
 그 결과 '
칼(또는 카를) 대공'이 총사령관으로 취임했고 '프랑스'와 같은 군단편성도 도입했다.




 ** 칼 대공(Erzherzog Karl von Osterreich, Herzog von Teschen)

 1771년 9월 5일~1847년 4월 30일
 
프랑스혁명전쟁,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오스트리아제국의 군인, 황족.
 
합스부르크 가의 신성로마황제 레오포르트2세와 황후 마리아 르드비카의 제3자.
 신성로마황제 프란츠2세(오스트리아 황제로서는 프란츠1세)의 남동생.





 거기다 옛날부터 내려오던 '용병 군'이 가세했고
 독일계주민을 중심으로 하던 '국민군<국방군(Landwehr)>'도 창설되었다.

 그리고 '국방군'은 15,000명이란 숫자가 1809년의 전쟁에 참가했고
 그 후 그것은 24만의 군대로 성장하게 된다.

 아무튼, 1809년 4월 9일 '칼 대공'이 인솔하던 20만의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프랑스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으로 침공을 개시했고, 동시에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단이 '바르샤바 공국'으로 그리고 '요한 대공'의 군단이 '이탈리아'로 침공했다.
 

 


 ** 요한 대공(Erzherzog Johann Baptist von Osterreich)

 1782년 1월 20일~1859년 5월 11일
 
오스트리아제국의 군인, 황족, 제국執政.
 전명은(Johann Baptist Joseph Fabian Sebastian). 요한 대공으로서 불려진다.
 
<알프스 왕> 또는 <슈타이아마르크의 프린스>라고도 불렸고
 민중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사전에 이미 그런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총참모장이었던 ‘베르티에’는 즉시 '라인동맹'에 주둔하고 있던 ‘다브’와 ‘우디노’
 그리고 ‘르페브르’와  ‘맛세나’ 등의 부대를 동원했다.



 ** 르페불(또는 르페브르-Francois Joseph Lefebvre)

 1755년 10월 25일~1820년 9월 14일
 
나폴레옹전쟁에서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제국 원수






 그리고 이어서 '나폴레옹' 본인도 곧 '파리'를 출발했고
 4월 18일에는 전선(前線)이었던 ‘인고르슈탓트’에 도착했다.



 ** 인고르슈탓트((Ingolstadt. 라:Auripolis)

 독일 바이에른주의 도나우 강가에 있는 郡(Kreis)에 속하지 않는 독립도시이다.
 
200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 121.801명. 오버 바이에른에서는 뮌헨에 이어서 2번째로 큰 도시.
 바이에른주에 있어어도 뮌헨, 뉘른베르크, 아우그스부르크, 레이겐스브르크, 뷰르트브르크에 이어서 6번째로 큰 도시이다.
 인접 대도시로서는 75km남방에 뮌헨, 95km북방에 뉘른베르크가 있다.
 1989년에 인구 10만을 돌파했고(대도시로 편입), 바이에른에서는 가장 새롭게 대도시가 된 마을이다. 또, 고급 자동차 메이커인 '아우디'의 본사와 공장이 있는 곳으로도 알려져있다.







 그때 전선에 집결했던 '프랑스군'과 '동맹군'은 약 18만 명에 이르렀지만,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정예부대는 '스페인'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곳에 집결했던 것은 2선급의 부대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군'의 分散상황을 간파하고는 즉석에서 반격으로 나섰다.

 '나폴레옹'은 그 중에서도 주력이었던 9만을 인솔해서 4월 20일에 ‘아벤스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의 전위(前衛)군을 돌파했다.
그리고는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다브'에게 맡기고, 본인은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추격해서 남하했다.

 21일 ‘란츠푸트’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깨부수고는 다시 반전 북상했고, 그리고는 22일의 ‘에크뮐의 싸움’에서 '칼 대공'이 인솔하던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격파했다. 
그러자 '칼 대공'은 '도나우 강' 북안(北岸) 으로 퇴각했다.




 <제5차 대불대동맹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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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7  滅亡으로




 
           <1808년5월3일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의 학살-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3rd May 1808 = 고야>
 ※
고야는 프랑스군에 의한 시민의 학살을 이 그림으로 격렬하게 비난했다




 * 半島戰爭(1808년~1814년)

 
 영:Peninsular War(반도전쟁)
 스:Guerra de la Independencia Espanola(스페인 독립전쟁)
 포:Guerra Peninsular(반도 전쟁)
 불:Guerre d'Espagne(스페인 전쟁)
 카타르냐:Guerra
del Frances(프랑스 전쟁)


<1808년 5월 2일 맘르크(노예병)들의 공격-고야작(1814년)>


 
  그러자 전술적인 움직임으로써 '웰즐리'는 보급기지를 ‘리스본’에서 ‘산탄델’로 옮겼다.



 ** Santander





 그리고는 5월말이 되자 영포군은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부루고스’를 탈취했다.
 그리고 그때, 영포군은 프랑스육군을 측면에서 포위해서
 '호세1세(죠제프 보나파르트)'를 ‘사드라江’의 골짜기로 쫓아내버렸다.

 
6월 21일 ‘비트리아의 싸움’에서 '호세1세'의 65,000군은
 영국군 53,000명, 포르투갈의 27,000, 거기다 19,000의 스페인군에 의해서 퇴로마저 위협 당했다.
 그러자 '
웰즐리'는 프랑스군을 ‘산 세바스티안’으로부터도 내쫓아버렸다.
 
그리고 ‘산 세바스티안’ 마을은 화근을 없애기 위해서 불 질러졌다.



 **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 또는 드노스티아(바스크어:Donostia)

스페인의 도시. 공식으로는 '드노스티아=산 세바스티안'으로 불린다.
 
바스크 자치주의 기브스코어縣의 縣都이다.
 인구는 182,930명(2005년 推計)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그러자 또 동맹군은 퇴각하던 프랑스군을 계속해서 추격했고, 피레네산맥에는 7월초에 당도했다.



 ** 피레네산맥

 (프:Les Pyrenees. 스페인어:Los Pirineos. 옥크:Los Pireneus. 카타르냐:  Els Pirineus)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습곡(褶曲-주름진)산맥이다.
 유럽대륙과 이베리아반도를 나누는 산맥이기도 하다.
 산맥은 거의 동서방향으로 늘어나서 길이 430km, 폭은 대충 100km정도이다.
 
산맥의 중앙 동쪽 가까이에 미니(mini) 국가인 '안도라공국'이 있다. 




 그러자 '솔트'는 다시 반격을 개시했고 ‘마야의 싸움’과 ‘론세스바리스의 싸움’에서 쾌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곧 다시 패배했고, 그로인해서 전의를 상실했다.

 어쨌든 그 ‘피레네의 싸움’에서 '웰링턴'은 자신의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또, 적과 수(數)에서도 밀렸을 뿐만 아니라, 보급로로부터도 극히 먼 곳에서 싸워야만 했고, 또 프랑스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만 하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전쟁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기동(機動)작전과 충격(衝擊-접전) 그리고 포화의 혼란 속에서 어렵게 승리했던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의 절정'이었으며, 그래서 그때 '웰링턴'은 포르투갈 육군에게 <동맹군의 투계(鬪鷄)>라고까지 평가를 했던 것이다.

 아무튼
7월 17일, 동맹군은 ‘마르몬’이 진군해왔기 때문에 ‘사라만카’에 진주(進駐)했다.



 ** 사라만카(Salamanca)

 스페인의 도시. 카스티랴 이 레옹州 사라만카 縣의 현도(縣都).
 스페인을 대표하는 大學街가 있고
 대학이나 대성당이 있는 사라만카 舊市街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그러자 양군은 마침내 7월 22일 조우했다.

 그러나 그
‘사라만카의 싸움’에서 프랑스는 괴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레스포드 원수’는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또 7월 28일부터 30일에 걸쳤던 ‘소라우렌의 싸움’에서도 프랑스군은 동맹군에게 패배했고
 결국 적의 발아래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그 후, 프랑스군이 재집결했으므로 영포군은 ‘마드리드’에 8월 6일 입성했다.
 그리고는 포르투갈로 철수하기 전에 ‘부루고스’로 진군했다.


 ** 부르고스(Burgos)

 스페인의 도시. 카스티랴 이 레옹州 부루고스縣의 縣都.
 산타마리아 대성당(부루고스 대성당)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고
 중세의 민족적 영웅 엘시드(El Cid)와 그의 아내 등이 매장되어 있다.





 아무튼, 프랑스의 기사회생에 대한 소망은, 그러나 1812년 그 비참했던 '러시아원정'으로 무산되었다.
 나폴레옹은 그때 스페인군과 대치하고 있던 3만의 정예부대까지 빼서 러시아원정에 데리고 갔지만
 그러나 증원과 교대가 한계에 다다랐던 데다가, 또 동맹군이 1813년에는 공세로 변했으므로
 그래서 프랑스군으로서는 점차 무너져갔던 것이다.

 아무튼, 10월 7일 '웰링턴'은 독일에서의 전투재개(再開)를 통보받았고
 그리하여 동맹군은 ‘비다소아 江’을 건너서 프랑스의 국경을 넘었다.



 ** 독일에서의 전투재개(解放전쟁. 독일:Befreiungskriege. 영:German War of Liberation)

 나폴레옹전쟁의 최종단계-독일에서의 부름이다.

 1813년 3월 17일, 프로이센왕국의 對프랑스 선전포고로 시작해서
 10월 16일~19일의 Leipzig 전투(諸국민의 싸움)를 거치고
 1814년 3월 31일의 파리함락에 의해서 나폴레옹1세의 독일지배는 깨지게 된다.
 혹은 1815년의 워털루 싸움까지를 포함하는 견해도 있다.


** 비다소아 강(스:Bidasoa. 프:Bidassoa)

스페인북부의 바스크지방을 흘러서 프랑스의 국경을 통해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나바라州에 있는 에라즈山(Errazu)에 근원이 있다.
드네츠테베(Doneztebe) 등의 마을을 흘러서 대서양의 비스케灣으로 흘러들어간다.
하류의 약 10km가 프랑스의 안다이유(Hendaye)와
스페인의 온다리비아(Hondarribia) 사이에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이 되고 있다.
그곳에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공동통치로 관리되고 있는 '페잔트 섬'이라는 중앙州가 있다.



 그로부터 '반도전쟁'은 ‘베라 고개(언덕)’와 ‘니브르 전투’ 그리고 바이욘누 가까이의 ‘니브 전투(1813년 12월 10일-14일)’ 그리고 ‘오르세 전투(1814년 2월 27일)’ 그리고 ‘툴루즈 전투(4월 10일)’ 등으로 해서 동맹군의 승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마지막 싸움은 나폴레옹 유형(流刑) 뒤의 것이다.

 3. 게릴라전

 그 전쟁 중에 영국은 포르투갈 民兵과 스페인 게릴라를 지원해서 프랑스대군을 못 박았다.
 그때 영국은 정규군을 이용하는 것보다 저렴하다고 생각해서 그 지원을 실시했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성공했던 유격대의 하나였으며 ‘게릴라’란 말의 어원(語源)이 되었다.


 

 

 

                                                     <반도전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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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7  滅亡으로




 
           <1808년5월3일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의 학살-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3rd May 1808 = 고야>
 ※
고야는 프랑스군에 의한 시민의 학살을 이 그림으로 격렬하게 비난했다




 * 半島戰爭(1808년~1814년)

 
 영:Peninsular War(반도전쟁)
 스:Guerra de la Independencia Espanola(스페인 독립전쟁)
 포:Guerra Peninsular(반도 전쟁)
 불:Guerre d'Espagne(스페인 전쟁)
 카타르냐:Guerra
del Frances(프랑스 전쟁)


                          <1808년 5월 2일 맘르크(노예병)들의 공격-고야작(1814년)>


 2. 영국군상륙

 1808년 8월, 영국군은 소장이었던 ‘아서 웰즐리(웰링턴)卿’의 지휘아래 포르투갈에 상륙했다. 그리고는 포르투갈의 ‘베르나르디무’ 정찰대가 ‘로와슨’을 저지하고 있던 동안 ‘웰즐리’는 ‘드라보르두’의 군대를 8월 17일 ‘로리사의 싸움’에서 이겼다.

 
8월 21일 영포(英葡)군은 ‘쥬노’ 지휘의 프랑스군과 ‘비메이로의 싸움’에서 맞닥뜨렸다. 그러나 ‘웰즐리’의 주의 깊은 관리와 강한 지도력 그리고 그에 합당한 전략으로 프랑스군과 그 동맹군을 제거했다.

 그러나 계속 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웰즐리는 너무 젊었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때 포르투갈에 새롭게 보강되었던 원정대를 지휘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서, 그 자리는 ‘헤리 발라드’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그 발라드가 죽자 그 다음에는 ‘휴 다르린 풀’이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런 일련의 승리로 인해서 맺어졌던 ‘신트라 협정’에 근거해서 프랑스군은 1808년 8월 포르투갈로부터 철퇴했다.
 그리고 영국군의 사령관들은 3만의 정예부대를 인솔할 ‘존 무어’경만 남기고 '신트라 협정'에 관한 조사를 받기 위해서 본국으로 모두 귀환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친히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베리아반도로 향했다.

 영국군은 ‘부루고스市’ 근교에서 프랑스군과 맞섰지만(부루고스의 싸움) 곧 퇴각해야했고, 거기다 또 ‘사아군의 싸움’과 ‘베나펜테의 싸움’ 그리고 ‘카카베로스의 싸움’까지 치러가면서 프랑스군의 끈질긴 추격을 받아야만 했다.

 1809년 1월, 영국은 ‘코르나’로부터 철병을 완료했다. 그리고 ‘무어’는 그 <코르나의 싸움>이라고 알려진 전투 중에 시가방위를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코르나 전투>


 
그래서 불과 2개월 남짓 스페인에 머물렀던 나폴레옹은
 
지휘권을 원수(元帥)들에게 다시 되돌려주고는 프랑스로 귀국했다.

 
3월에는 '솔트 원수'가 북쪽으로 향해서 2번째 포르투갈 침략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 처음은 미노 강에서 포르투갈의 민병대에게 격퇴 당했지만, 그러나 이어서 ‘차베스’와 ‘브라가(Braga-포르투갈 북서부 도시)’를 공략했고, 거기다 1809년 3월 29일에는 ‘포르트’를 공략했다. 



<브라가 16세기 지도>


 ** 포르트(토) Porto

 포르투갈 북부항만도시. 인구 약 263,000명. Lisbon에 이어서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트 도시권의 인구는 약 160만정도이다.
 영어(英語)로는 전통적으로 Oporto 라고도 부른다.
 
聖그레고리우스聖堂과 大聖堂, 포르사궁, 聖프란시스코聖堂 등
 市街地는 포르트 역사지구로서 1996년에 世界遺産으로 등록되었다.




 그러나 ‘아마란테’ 도시 등에서의 저항은 '솔트 군'을 '오포르트'에 고립시켰고, 그로써 '솔트'는 <북쪽 포르투갈의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 나라에서 퇴각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나폴레옹의 승리로 인해서 스페인군을 괴멸되었다지만, 그러나 스페인국민들은 그때부터 프랑스의 패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게릴라전법>을 개시했다.

 또 포르투갈에서는 ‘미겔 페레이라 포르하스’라는 <전쟁 大臣>이 영국에서 보내온 자금과 병력으로 국군의 재건을 꾀하고 있었고, 그것은 또
1806년부터 제시되어왔었던 군제개혁이 그때서야 실행된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2만 명의 상비군과 3만의 민병 소집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수는 상비군 5만, 민병 5만으로 불어났고, 거기다 <오르덴난사스>라고 하는 의용군까지 더해지게 되었다.

 아무튼, 1809년 4월 '웰즐리'는 영포군을 지휘하기 위해서 포르투갈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또
그 무렵에는 이미 ‘포르하스’와 각 지역의 지사(知事)들이 영국군을 조직해두었고, 또 ‘베레스포드’ 장군에 의해서 영국 풍의 전투에 맞게 개편되었던 포르투갈 연대가 보강되어 있었다.

 그러했던 신군(新軍)은 5월 10일부터 11일의 ‘그리호의 싸움’과 5월 12일의 ‘오포르트 싸움’에서 '솔트 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또 북부의 全도시가 ‘시르베이라’에 의해서 공략되었다.

 '웰즐리'는 불안했던 新점령지의 포르투갈군을 떠나서 ‘그레고리오 데 라 쿠에스타’군에 합류하기 위해서 스페인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연합군은 7월 27일부터 다음 28일 ‘타라베라 데 라 레이라의 싸움’에서 호세1세가 인솔하던 왕국 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또 그곳은 연합군이 궁지에 몰리자 포기하고 서방(西方)으로 줄행랑을 쳤던 곳으로, 그래서 그곳을 되찾는 데는 아주 비싼 대가가 지불되었다. 그러나 그 ‘타라베라’에서의 승리로 '웰즐리'는 자작(子爵)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스페인군은 ‘오카나의 싸움’과 ‘아르바 데 트르메스의 싸움’에서 심한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웰즐리'는 스페인군과의 협력이 잘 되지 않는 것과 또 새로 투입된 프랑스군을 염려해서 포르투갈의 방위를 강화하려는 결단을 내렸다.

 
'웰즐리'는 리스본 방위를 위해서 ‘네베스 코스타’ 소좌(少佐)의 계획을 채용했고, 그리고는 중요한 도로와 참호 그리고 토루(土壘-흙으로 만든 진지, 보루)를 이어서 강력한 보루선(162)을 구축해서, 이른바 ‘트레스 베드라스線’을 형성했다.

 그러자 1811년 7월에 프랑스군은 ‘안드레 마세나 원수’가 인솔하던 60,000의 병력으로 재침공했다.



 ** 안드레 마세나(Andre Massena. 1758년 5월 6일~1817년 4월 4일)

 프랑스의 군인. 제1제정下의 원수. 에스린크(大侯爵). 리보리 공작.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주로 方面군사령관을 맡았고
 스위스전쟁이나 반도전쟁 등에 참가했다.




 그 전쟁의 발단은 ‘코어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후, 마세나는 <포르투갈에서 최악의 길>을 답사해야만 했다.

 9월 27일 ‘브사코의 싸움’에서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전술의 부주의로 패배를 당했지만
 그러나 영포군을 ‘트레스 베드라스선’까지는 철퇴시켰다.

 10월 14일 ‘소브랄의 공격' 후에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을 정도로 성새(城塞)는 인상적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종군했던 ‘찰스 오만’은 그날의 상황에 대해서

 <10월 14일 농무(濃霧)의 아침, 소브랄에서 '나폴레옹의 조수(潮水)'는 최고조에 이르렀으나, 그리고는 곧 썰물이 시작되었다...>

 라고 기술(記述)해두었다.

 아무튼, 포르투갈 인들은 그 전선에서 초토작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그때 보급로의 결여와 질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1811년 初頭, 신규 영국군의 도착으로 재차 증강된 동맹군은 공세로 바뀌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카디스’의 포위를 푼 것이 실책의 한 요인이 되어서 3월 5일 ‘바롯사의 싸움’에서 패배했고 또 ‘마세나’는 5월 3일부터 5일까지의 ‘펜테 데 오노로의 싸움’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하는 수 없이 또 포르투갈로부터 철수했다.



<카디스 항구>


 그리고 ‘마세나’는 그때 25,000명의 병사들을 잃었기 때문에 ‘마르몬’과 교대했다.
 


 ** 마르몬(Auguste Frederic Louis Viesse de Marmont) 1774년 7월 20일~1852년 7월 22일

 프랑스의 군인, 귀족, 정치가.
 나폴레옹1세의 하급사관시대부터의 심복의 부하였지만, 1814년 연합군이 파리까지 쫓기던 절망적이었던 상황 속에서도 미적거려서, 결국 프랑스를 항복으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고, 회상록 등에서도 비난을 계속했지만, 그러나 유서에서는 그를 용서했다.




 그리고 또 '솔트'는 ‘바다호스’를 위협하기 위해서 남부로부터 이동했지만, 그러나 ‘윌리엄 베레스포드’가 인솔하던 영포군과 스페인군에 의해서 5월 16일 ‘아르브에라의 싸움’으로 내몰렸다.




 ** 바다호스(Badajoz-스페인의 도시)
 




  



 그러나 그 피투성이의 전투 뒤에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후, 전쟁은 일시휴전으로 들어갔지만, 그러나 수에서는 우세하고서도 프랑스군은 열세에 몰려있었던 가운데, 스페인의 게릴라활동 또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프랑스군은 그때 양쪽으로 고배를 마시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군은 350.000이 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중에 20만 이상의 병력이 보급로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실전병력은 많이 부족했던 실정이었다.

 
어쨌든, 그때부터 스페인은 자유주의적인 <1812년의 카디스 헌법>초안 만들기에 착수했다.
 그리고 1812년이 시작되자 '웰즐리'는 서서히 스페인으로의 동맹군재편을 실시했고, 이어서 1월 19일에는 ‘시우다드 로드리고’의 성새화(城塞化) 되어있던 마을을 포위해서 공략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4월 6일에 ‘바다호스’를 아주 비싼 대가를 지불한 뒤 상기와 같이 공략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두 마을은 모두 군에 의해서 처참하게 약탈되었다.
 

 

 

<반도전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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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화 2011-04-16 06:43   좋아요 0 | URL
추천해주신 분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